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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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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벽 속 삶’ 탈출 비법

등록 2013-01-05 00:12 수정 2020-05-03 04:27

“이 사람의 전과 기록을 알아내면 돈 2천달러를 주겠소.”
의뢰인이 매력적인 제안을 해온다. 다른 사람들을 추적해 개인정보를 캐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스킵 트레이서’(Skip Tracer)에게 이건 일도 아니다. 동전을 많이 바꿔 인적이 드문 공중전화로 향한다. 대상자의 거주지인 사우스브롱크스 경찰서로 전화를 한다. 먼저 미드타운사우스의 크리스토퍼 형사라고 가짜 신분을 댄 다음, 내 사무실의 텔레타이프(전신) 통신이 두절됐다고 둘러대며 목표물들의 정보 확인을 부탁한다. 그는 성가시다는 듯 회신 전화번호를 요청했다. 마침 비어 있던 옆 칸 공중전화 번호를 댔다. 몇 초 뒤 옆 칸의 전화벨이 울렸고, 말투를 바꾸어 전화를 받는다.
 
조지 클루니 신상 털고 르윈스키 찾고

은 잠적하고 싶은 이들에게 인터넷과 신용카드를 가장 먼저 끊으라고 조언한다.

은 잠적하고 싶은 이들에게 인터넷과 신용카드를 가장 먼저 끊으라고 조언한다.

“미드타운사우스 경찰서입니다.” 좀 전의 경찰이 크리스토퍼 형사를 바꿔달라고 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한 다음, 전화기를 통해 주변을 지나가는 기차 소리가 들릴까봐 손으로 송화구를 틀어막았다. 그러곤 말했다. “통화 중이네요. 말씀 전해드릴까요?” 그는 필요 없다며 통화를 마치고는 잠시 뒤 첫 번째 공중전화로 다시 전화를 걸어서 말했다. “필요한 정보가 뭡니까? 크리스토퍼.”

스킵 트레이서 프랭크 에이헌은 단 3번의 전화 통화로 2천달러를 손에 쥐었다. 경찰을 상대로 명분을 꾸며내 민감한 정보를 빼내는 것이 특기인 그는, 자타 공인 미국 최고의 스킵 트레이서다. 영화배우 조지 클루니의 신상을 털고, 잠적한 모니카 르윈스키를 찾아낸 사람도 그였다. 미국에서 떠들썩한 유명인의 정보 유출 사건이나 위장 자살, 도피 사건 등이 벌어지면, 십중팔구 그가 관련돼 있거나 혹은 그의 코멘트를 딴 기사가 등장할 정도다. 그의 본업은 상대가 누구든 지구상 어디에 있든 추적해 찾아내는 일.

의뢰를 받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추적하던 저자는 어느 날 서점에서 잠적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스스로 성공적인 잠적에 방해될 행동만 하는 한 남자를 만난다. 그의 잠적을 도운 계기로 지은이는 사람을 추적하는 자신의 기술을 거꾸로 돌려 잠적이나 개인정보 보안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한다. 세계 각지의 잠적을 원하는 사람들을 돕던 그는 실제로 잠적을 원하는 사람뿐 아니라, 디지털 세상에서 곤경을 겪는 이들을 위해 (씨네21북스 펴냄)을 펴냈다.

“우리는 유리벽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유리벽 속에서 우리는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잠을 자고, 섹스를 한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유리벽 속의 삶’에서 ‘사라지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자신의 공적·사적 흔적을 말끔하게 없애고 자신을 추적하는 이들을 완벽하게 따돌려 새로운 인생을 만드는 법과, 만천하에 노출된 자신의 정보를 파악하고 관리해 잠재적 도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구체적 방법이 담겼다.

또한 흥미진진한 잠적의 실체와, 추적 과정에서 벌어진 생생하고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들을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실제 스토킹 피해자나 법정 증인의 도피 작전, 의뢰인의 재산을 노리는 친족이나 사기범을 멋지게 골탕 먹인 과정이 재치 넘치는 입담을 통해 영화나 소설처럼 펼쳐진다.

사실 저자의 말처럼 잠적은 그저 다 버리고 ‘훌쩍’ 떠 나면 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 공개된 자신의 모든 정보를 찾아내 파기하거나 숨기고(정보 교란), 수많 은 가짜 미끼들을 마련해야 하며(허위 정보 유포), 새로 운 인생을 꾸리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 저자는 잠적을 위한 기본적인 방법론과 함께 처한 상황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 방안을 제시한다. 미처 발견 못할 구멍을 속속들이 찾아내고, 그것들을 메우는 창의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무릎을 치게 만드는 저자의 속임수

굳이 잠적이 아니더라도, 인터넷이라는 이름의 ‘유리 벽’을 통해 자신이 훤히 들여다보일까봐 걱정하는 이들 도 저자의 얘기에 귀기울일 일이다. 검색엔진에 이름과 함께 학교나 회사 이름, 또는 전화번호 같은 간단한 정보 를 함께 쳐넣는 것만으로도 개인정보를 상당량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과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오늘날,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자신의 정보를 흩뿌리고 다닌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소셜미디 어를 비롯해 인터넷 보안에서 공공서비스와 우편, 통신 에 이르기까지 집 안팎을 떠도는 정보들의 관리·보안 상 태를 점검하라. 그리고 불필요한 정보 노출을 최소화하 라. 당신에 대해 감시망을 확대하고 있는 것은 정부나 기 업뿐만이 아니다.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을 억제 하지 못하는 대중이라는 실체가 프라이버시의 공간을 점점 위협”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범죄소설을 엿보는 재미라도 즐기길 권한다. 스킵 트레이서의 세계와 무릎을 치게 만드는 저자의 속임수는 마치 영화 이나 을 보는 것 같은 짜릿함을 준다. 유명 한 위장 자살 사례를 분석하거나 해외 도피의 세계를 들 여다보는 등 쉽게 접할 수 없는 내용도 눈길을 잡아끈다. 무엇보다 사람 뒤를 캐는 일이 많은 이놈의 기자질에 도 움이 될 만한 취재 요령 팁을 주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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