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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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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독립 만세

좋은 원단과 만듦새, 희소한 디자인과 정직한 가격이란 경쟁력…
고가의 브랜드 의류와 대형 SPA 사이에서 돌파구 찾은 독립 디자이너들의 도전
등록 2012-04-19 21:03 수정 2020-05-03 04:26
» 스펙테이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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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동 레벨5 매장.

» 명동 레벨5 매장.

» 디자이너 이명신. 로우클래식 제공

» 디자이너 이명신. 로우클래식 제공

회사원 김창희(46)씨는 얼마 전 고민에 빠졌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회사 근처 옷가게에서 마음에 쏙 드는 슈트 한 벌을 발견했는데 난생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외국 옷처럼 날렵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무게감도 있다. 옷값은 60만원. ‘보세’라고 불리는 동대문 옷보다 비싼 가격이다. 2~3년마다 한 벌 정도 비싼 옷을 장만하는 김씨는 주로 평소 옷을 봐두었다가 백화점 세일 때 100만원 조금 못 되는 가격에 구입하곤 했다. 망설이다 3일 뒤 다시 가보니 뜻밖에 품절됐다. 알고 보니 어떤 젊은 디자이너가 만든 이 옷은 계절마다 몇 벌 만들지 않는데다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사가는 팬들까지 있단다. 이곳은 신진 디자이너들의 옷을 한 가게에 모아둔 편집매장이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거리인 가로수길에는 편집매장이 즐비해 있었다.

샤넬과 유니클로 사이, 독립 지대

‘패션 1번지’ 서울 중구는 둘로 나뉜다. 자라·유니클로·H&M 등 SPA(제조·직매형 의류)가 위세를 떨치는 명동이 패스트 패션의 땅이라면, 건너편 롯데·신세계 백화점은 날로 고급화 추세다. 그런데 예전엔 보세 옷이나 국산 브랜드가 차지했던 중간 거리에는 편집매장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2006년 젊은 디자이너들의 편집매장을 표방하며 처음 에이랜드가 문을 열 때만 해도 한국 디자이너들의 비중이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그런데 2006년 명동에 첫 매장을 연 에이랜드가 서울 홍익대 앞, 경기도 부천, 가로수길 등에 이어 지난해 명동에 두 번째 매장을 냈다. SPA 브랜드들이 들어선 명동 눈스퀘어 빌딩 5층 ‘레벨5’에선 한국 젊은 디자이너 100명의 옷을 판다. 지난 2월 롯데백화점 3층에 문을 연 편집매장 ‘바이에토르’에서도 외국 수입 브랜드와 나란히 한국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의 옷을 걸었다. 롯데백화점 글로벌엠디팀 이승주씨는 “경력·학력에 관계없이 눈에 뜨이는 디자이너들의 옷을 팔기로 했다”며 “국내 브랜드와 다른 느낌에 저렴한 가격이 장점이다. 브랜드보다 스타일을 중시하는 20~30대 여성이 많이 찾고 있다”고 했다. 레벨5 박영준 편집숍 디렉터도 “새로운 디자인을 선호하는 트렌드세터들에게 독립디자인은

» 스펙테이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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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신상’이다. 동대문은 물론 국내 기성복 브랜드가 이들의 디자인을 베끼는 실정이다”라고 전한다. 레벨5는 회원으로 등록된 고정 고객만 7만 명이다. 자본과 투자 없이 새로운 디자인을 무기 삼아 홀로 일하는 젊은 디자이너, 후퇴하는 한국 중저가 브랜드를 대체해 거리패션에 등장한 작은 브랜드, 이들은 독립 디자이너라고 불린다.

패션에 인디 물결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09년쯤으로 여겨진다. 그해 젊은 디자이너들의 창업이 불붙듯 일었다. 사회적 기업 ‘오르그닷’을 운영하는 김진화 대표는 “그해부터 SPA 브랜드들이 시장을 휩쓸어 국내 의류업체들이 몰락하기 시작하자 중저가 패션시장에 공백이 생겼다. 때마침 세계경제 위기로 외국 의상학교로 유학 갔다가 현지에서 일자리를 잡지 못한 젊은 디자이너들이 바로 국내로 들어와 젊은 브랜드가 물결을 이루었다”고 되돌아본다. ‘큰 회사에서 착취당하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옷을 만들어보자’는 젊은 디자이너들과 ‘좋아하는 브랜드보다 좋아하는 스타일이 확실한’ 20~30대 소비자가 죽이 맞은 결과 2~3년 동안 독립 패션 시장이 무르익었다. 김 대표는 “지금 한국에는 낮춰 잡아도 200~300명의 독립디자이너가 있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마진 줄여 옷매무새를 고치다

디자이너 안태옥씨도 3년 전 자신이 좋아하는 옷만 만들고 싶어서 다니던 의류회사를 그만두고 ‘스펙테이터’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는 군복에서 힌트를 얻어 일상복에 이유 있는 디테일을 더한다. 단추 하나도 뗐다 붙였다 할 수 있게 만들고 덧댈 때도 장식은 물론 기능이 있어야 한다. 조끼·셔츠·바지 등 기본 의상도 한눈에 보기에 맞춤 옷 못지않은 정성과 경험이 느껴졌다. 이 시장은 뭔가 다르다. 안태옥씨 블로그에는 “옷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팬들의 인사가 넘친다. 김진화 대표는 “인디 음악에 ‘밴드 하나를 위해 1천 명의 팬이 있으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인디 디자이너들에게도 1천 명의 팬이 있으면 지속 가능한 시장이 형성된다”고 예측한다. 팬심이 형성되는 이유는 디자인과 원자재가 기성복과 다르기 때문이다.

기성복에서 옷 한 벌을 만들 때 들어가는 돈은 적게는 옷값의 10%에 불과하다. 많아야 40%를 넘기 힘들다. 옷은 알리고 유통·판매하는 데 많은 돈이 들어가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취재 과정에서 만난 독립 디자이너들은 옷을 만드는 데 옷값의 절반 이상을 쓴다고 했다. 원가와 가격을 함께 줄인 저가 의류와의 차별화를 위해서고,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후회 없이 만들겠다는 ‘인디 정신’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주로 편집매장이나 온라인을 통해 옷을 팔아 수수료를 낮추고, 패션쇼나 마케팅처럼 불필요한 패션계의 관행에 기대지 않는다. 안태옥씨는 “지금 소비자가 원하는 옷은 정직하게 만들어 정직한 마진이 붙은 옷”이라며 “가격은 싸지만 창피하지 않은 옷”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안씨는 직접 디자인과 제작은 물론 영업까지 뛰어 판매 수수료를 줄인다. 기획부터 디자인·생산·유통·판매를 모두 한 회사가 진행하는 SPA 브랜드의 학습효과로 독립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1인 다역을 해낸다.

‘디자인은 무엇을 더할 것인지가 아니라 무엇을 뺄 것인가의 문제’라는 격언은 패션계 일반에 통용돼야 할 말인지 모른다. “오트 쿠튀르에 대한 욕망을 버리면 실제로 입을 수 있는 좋은 옷이 나오더라”는 안씨처럼 친구들과 ‘로우클래식’이란 브랜드를 만든 디자이너 이명신씨도 “이윤을 줄이면 옷매무새가 달라진다”고 말한다. 2009년 신인 디자이너 발굴 프로그램인 온스타일의 로 이름을 알린 이명신씨는 그즈음 패션계가 변화하는 분위기를 느꼈다. 기존 브랜드나 디자이너, 어느 한 곳에 안주하기가 아까웠다. 소비자가 백화점이나 대리점을 벗어나 재미있는 쇼핑 장소를 찾아나서듯 디자이너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온라인 매장을 열고 동대문 두산타워 지하에 위치한 ‘두체’(두타 챌린지존)에도 자리를 잡았다. 소비자가 ‘내 취향’을 찾으러 다니듯 이명신씨와 친구들도 자신이 입고 싶은 옷에 돈을 아끼지 않는단다. “매 시즌 옷을 만들 때마다 꼭 10벌 중 1벌은 안 팔릴 게 뻔한 과감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요. 디자이너는 소비자가 좋아하는 옷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높은 디자인을 선보이는 사람이라고 믿어요. 대신 그런 옷은 이윤을 남기지 않죠. 옷은 누군가 입어야 생명을 얻으니까요.” 스펙테이터도 그렇지만 로우클래식 또한 한 디자인을 두고 많아야 30벌의 옷을 만든다. 2~3벌만 만드는 옷도 있다. 다 팔리면 다시 만들지도 않는다. 독립 디자이너들의 높은 자존심과 적은 자본 덕에 재고가 거의 쌓이지 않는 셈이다.

» 독립 디자이너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브랜드 중심이던 패션계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개인의 취향을 중시하는 1980년대생이 패션 소비와 생산의 중심이 되자 나타난 경향이다. 위로부터 디자이너 윤형석. 안태옥.

» 독립 디자이너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브랜드 중심이던 패션계에 지각변동이 일고 있다. 개인의 취향을 중시하는 1980년대생이 패션 소비와 생산의 중심이 되자 나타난 경향이다. 위로부터 디자이너 윤형석. 안태옥.

“독립 디자인, 에너지가 끓고 있다”

이름 있는 디자이너들 밑에서 사사하는 디자이너들이 숨죽이는 반면, 독립 디자이너들은 자신만만하다. 안태옥씨는 “에르메스가 여러 명의 장인 손길을 거쳤다는 이유로 비싼 값을 받는다면, 모든 원단에 2번 이상 봉제를 하는 내 옷도 장인의 작품”이라고 말한다. ‘커버낫’ 윤형석 디렉터도 패션쇼 무대는 가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비주얼에 치중하기보다는 만듦새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일본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커버낫’이라는 브랜드를 만들 때부터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이

» 커버낫 제공

» 커버낫 제공

다. 어깨에 힘준 디자인 철학은 생략하고 “멋내기 좋아하는 예비역들을 위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인스턴트 옷을 싫어하는 만큼 원단을 중시한단다. 윤씨는 “두 달에 한 번은 일본에 가서 원단을 직접 골라온다. 다양한 원단이 옷의 개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처럼 보이지만 부드러운 푸른색 면셔츠, 씨실과 날실의 직조가 독특한 물결을 이루는 재킷. 어떤 천으로 만들었든 간에 원가는 거의 계산하지 않는단다. 새로 옷이나 가방을 만들면, 성격까지 인디밴드를 닮은 커버낫 디자이너들이 모여 앉아 ‘이건 얼마짜리야, 나라면 얼마에 사겠어’ 하는 식으로 값을 정한다. 2008년 문을 연 커버낫은 제법 이름을 알린 남성복 브랜드로 자리잡아가고 있지만, 원단에 공들이는 만큼 아직 큰 자본을 굴리지는 못한다고 했다. 윤형석 디렉터가 꾸는 꿈은 “한국에서는 조금 만들어서 쉽게 품절되고, 대신 미국과 일본 등 다른 나라에서 파는 옷으로 먹고사는” 거다. 그렇게 된다면 디자이너로서 진짜 멋있어 보일 것 같단다.

아닌 게 아니라 “인디들은 에너지만 부글부글 끓고 있다. 편집매장만으로는 부족하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오르그닷 김진화 대표의 진단이다. 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한국 패션계를 지루하게 여기고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어 하는 것만은 분명한데, 문제는 이 분위기를 이어서 생산적인 일을 해낼 수 있느냐는 것이란다.

[%%IMAGE10%%]패션 산업의 공동체적 시도

김 대표는 독립 디자이너들의 네트워크 ‘레어투웨어’를 만들고 있다. 패션계의 자원이 될 만한 디자이너들을 조직해서 독립 디자이너의 존재감을 알린다는 이 프로젝트에 모인 젊은 디자이너들은 요즘 ‘야드 프로젝트’라는 것을 하고 있다. 야드 프로젝트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새로 개발한 원단을 두고 저마다 각기 다른 옷이나 모자로 디자인해낸다. 디자이너는 새로운 원단을 접할 기회를 얻고, 원단을 만드는 사람들은 새 원단을 실험할 기회를 얻으며, 사회적으로 친환경적이거나 동물권을 지키는 윤리적 원단을 더 많이 선보인다는 기획이다. 레어투웨어의 최종 목표는 디자이너가 옷을 만들기 전에 소비자가 원하는 옷이 무엇인지 소통해 알아내고 생산해내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취향 제일주의’ 패션계에서 공동체적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패션계는 지각변동 중이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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