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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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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자가 된다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게 생명을 넘어 역사를 바꾸는 문제가 되었을 때…
<지팡구>와 <타임슬립 닥터진>의 다른 선택
등록 2012-03-24 10:25 수정 2020-05-03 04:26
무라카미 모토카의 <타임슬립 닥터진>.

무라카미 모토카의 <타임슬립 닥터진>.

요즘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애초에 세상이 그리 좋은 곳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지난 대선의 결과가 달랐다면 지금보다는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러나 착각이다. 역사를 가정해 더 좋은 선택을 주장하는 것은 나른한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때 올바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 인류는 더 좋은 세상에 살고 있을 거야’라는 상상은 오산이다. 언젠가 최고의 선택을 했어도, 여전히 인간은 차별과 폭력의 시간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시간여행을 다룬 만화와 영화 등이 보여주는 결과도 대부분 그렇다. 영화 에서는 과거로 가서 문제의 근원을 고칠 때마다 미래는 더 안 좋아진다. 현재는 과거의 수많은 변수가 결합돼 만들어진 것이지, 단지 하나의 선택이나 사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변수는 있겠지만 그것 역시 수많은 변수들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고, 올바른 선택을 되돌리는 악수도 무수하게 존재한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1889)에서는 과학문명을 체득한 근대인이 ‘마법의 시대’로 타임슬립해 영웅이 된다. 총과 성냥 등 간단한 문명의 도구와 지식만으로도 마법사 멀린을 뛰어넘는 대마법사가 된다. 종교를 넘어 이성과 과학의 시대를 맞이한 작가다운 발상이다. 가와구치 가이지의 만화 도 설정은 비슷하

가와구치 가이지의 <지팡구>.

가와구치 가이지의 <지팡구>.

다. 최신예 구축함 미라이호가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시간으로 가버린다. 항공모함이나 잠수함은 물론 함대 전체를 초토화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미라이호가 전쟁에 개입한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판도가 바뀔 것이다. 책임을 깨달은 미라이호는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눈앞에서 죽어가는 부상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들을 구해주기로 한다.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알게 된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생명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에게는 인도주의를 넘어선 또 하나의 선택이 필요하다.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인가, 차라리 역사에 개입해 모든 것을 바꿔버릴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신이 될 수도 있다. 한데 신이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신념은 과연 옳은가. 어쩌면 신 역시, 미라이호의 그들처럼 우왕좌왕하며 그릇된 선택을 하고 때론 악행을 저지르는 존재일지 모른다. 우익 성향의 작가가 그려낸 는 역사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이들의 고뇌를 보여준다.

의 갈팡질팡하는 선택에 비하면 무라카미 모토카의 만화 은 심오하지만 간단하게 결정한다. 내과의사인 미나가타는 1862년의 세계로 타임슬립을 한다. 이유도 모른 채 150년 전의 세계로 돌아간 미나가타는, 현대라면 평범한 처치만으로도 이겨낼 수 있는 병이나 상처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게 된다. 그래서 결단을 내린다. ‘역사를 바꾸겠지만, 쓰러져가는 생명을 못 본 척할 순 없어. 난 의사로서 살아가겠다. 그게 날 이 시대로 보낸 신의 의지라고 믿고 싶다.’ 어쩌면 의 군인들처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존재가 아닌, 오로지 생명을 구하는 의사이기 때문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의 무라카미 모토카는 긍정적인 작가다. 인간의 의지를 믿고, 생명의 소중함을 믿는다. 과거로 간 미나가타도, 그를 친구이자 동료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너무나 쉽게 서로를 신뢰하고 인정한다. 순진하지만 그 마음의 힘은, 소재와 주제로는 진부한 이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한 발판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리메이크될 정도로. 때로 해결책은, 가장 단순한 게 옳다.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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