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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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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고통은 위대하다

등록 2012-12-21 19:09 수정 2020-05-03 04:27
고통스런 예술가들이 창조하는 세계는 행복한 예술가들의 그것보다 위대하다. 끔찍한 유년 시절을 그린 크레이그 톰슨의 , 가난한 집 여자들의 참담한 성장기인 사이바라 리에코의 는 너무나 슬프고 아름답다.

고통스런 예술가들이 창조하는 세계는 행복한 예술가들의 그것보다 위대하다. 끔찍한 유년 시절을 그린 크레이그 톰슨의 , 가난한 집 여자들의 참담한 성장기인 사이바라 리에코의 는 너무나 슬프고 아름답다.

팀 버튼의 는 심심했다. 마녀의 저주를 받아 흡혈귀가 되어 200년 동안 땅속 관에 묻혀 있었던 남자. 사랑했던 그 남자가 외면하자 저주를 내리고, 내내 곁에서 지켜보았던 마녀. 흥미로운 요소들은 가득했지만 팀 버튼 특유의 아찔한 기운은 증발해버렸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팀 버튼은 “어린 시절에 고통을 많이 겪을수록 어른이 된 뒤의 삶은 풍요로워집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성공한 예술가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유년, 사춘기의 고통과 절망은 그만큼의 감성과 고뇌를 숙성시키는 법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리사 마리를 거쳐 헬레나 본햄 카터에게 정착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 것이 원인일지도 모른다. 불안하고 예민한 예술가들이 가정이나 종교 등 평화롭고 안정적인 세계에 들어앉으면서 무뎌지고 지루해지는 경우는 종종 있으니까. 그것 역시 개인에게는 아주 큰 성취이겠지만, 상처 입은 영혼을 사랑했던 팬의 처지에서는 참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인생의 공평함이 참 잔인하다 싶기도 하고.

를 보고 나서, 크레이그 톰슨의 를 읽었다. 심약한 소년 크레이그가 있다.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운 산골 오두막에 사는 크레이그의 유년은 악몽 같았다. “어린애인 내 눈에 비친 삶은 이미 너무나 끔찍했기에, 난 틈만 나면 좀더 살기 편한 곳으로 도망가는 꿈을 꾸었다.” 늘 괴롭힘을 당하는 학교는 속세라 치부하며 외면할 수도 있었지만, 독실한 기독교도인 부모의 뜻에 따라 가야 하는 교회나 성경 캠프에서조차 그는 외톨이였다. “구원자로서, 또한 외롭고 길 잃은 양을 찾는 목자로서 하나님은 내게 의미가 있지만… 이런 군중심리로는 아니었다.” 그런데 캠프에서 레이나를 만난다. 사랑에 빠지고, 부모의 허락을 받아 그녀의 집에 가서 2주간의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레이나의 부모는 이혼 직전이고, 정신지체아인 언니와 몽고병인 오빠와 함께 지내는 그녀의 삶은 자기생존의 처절한 고투였다. 레이나와의 사랑은 깊어졌지만, 그는 곧 ‘다시 외로워졌다. 그리고 그 외로움을 연료로 삼았다’. 사랑은, 종교는 영원하지 않았다. 자전적인 그래픽 노블 는 크레이그가 어떻게 만화를,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단지 한 예술가의 자기고백만이 아니라 ‘눈을 돌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을 행했던 인간의 담담한 회상이다. 한순간일지라도 우리의 기억 혹은 어딘가에 남아 있는 ‘발자취의 지도’를 그리는 것. 그것은 고통과 상처에서 출발했고, 완벽한 종교의 세계에서 벗어나 예술로 뛰어들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유년의 참담함을 말한다면 의 사이바라 리에코를 빼놓을 수 없다. 가출, 매춘, 약물로 점철된 어촌 마을에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살아남은 세 남매의 이야기. 그것은 의 여자친구들 이야기로 이어진다. 가난한 집 여자들이 걸을 수밖에 없었던 그 참담한 성장기. 아수라장 속에서 유년을 보낸 사이바라는 도쿄로 와서 술집을 다니며 돈을 벌고 마침내 만화가가 된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이야기는, 사이바라가 직접 겪거나 보고 들은 사건들인 것이다. 사이바라의 만화를 보고 있으면, 그 모든 것을 겪고도 살아남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너무나도 아름답고 슬프고 고통스럽다. 그 고통과 상처가 배어난 만화를 다시 보고, 또 보고 끝내 목이 메면서 눈물까지 흐른다. 그런 점에서 때로, 고통은 위대하다.

고통을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고통을 겪은 그들이 창조하는, 고통 속에서 단련된 서늘하거나 깊고 온화한 정서를 느낄 때마다 인정하게 된다. 고통이 그들을 만들었다는 것을, 그들이 그 찬란한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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