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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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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던 만화가가 헤어졌을 때

등록 2012-10-16 17:33 수정 2020-05-03 04:27

지난 9월 게시판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 벌어졌다. 지금은 수습되어 자세히 소개하기는 민망하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작가 A와 B는 연인이었다. 남자 작가 A의 작업에, 여자 작가 B가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런데 둘은 헤어졌다. B는 커뮤니티에 자신의 작업을 올리며, 협업을 했는데 작가 이름을 표기해주지 않았고, 2차 활용(단행본 등)에서 저작권 배분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글을 올린다. 당연히 댓글이 달리고, 원문이 이리저리 옮겨졌다. 문제가 심상치 않게 확산되자 A와 B 사이에 합의문이 올라왔고, 그 뒤 몇 번의 우여곡절을 더 겪는다.

개인 작업으로 보이지만 만화는 협업과 세분화된 분업으로 만들어진다. 2005년 <한겨레21> 인턴기자가 만화가 작업실에서 밤새 먹칠을 하는 취재 현장.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개인 작업으로 보이지만 만화는 협업과 세분화된 분업으로 만들어진다. 2005년 <한겨레21> 인턴기자가 만화가 작업실에서 밤새 먹칠을 하는 취재 현장. 사진 한겨레21 박승화

만화는 흔히 개인 작업이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협업이 많다. 전통적 협업은 작가-제자(문하생)가 함께 작품 작업에 참여하는 도제 제도. 그다음에는 주로 스토리와 작화의 분화가 이루어졌고, 만화방 프로덕션 시스템에서는 콘티·데생·펜터치·얼굴·배경처럼 디테일한 협업이 이루어졌으며, 학습만화와 웹툰 이후 전통적 채색 단계도 대부분 협업으로 해결된다. 아무리 문하생 혹은 스태프의 손을 빌려도, 만화 작업은 지난한 시간과의 싸움이다. 협업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무르게 된다. 피 끓는 젊은 남녀라면 정분이 나는 것도 당연한 일.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만화계에는 작가 부부가 꽤 많다. 1960∼80년대의 작가 부부는 대부분 순정만화를 그렸다. 한 가지 공통점은 여자 작가가 남자 작가 문하생으로 일했다는 점. 1960~70년대 한국 순정만화의 대표작가인 엄희자 선생도 조원기 선생의 문하생으로 시작해 이후 부부가 되었다. 의 작가 민애니 선생은 특이하게 명랑만화를 그렸던 김기백 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인지 1970년대 들어 만화방용 순정만화 시장이 줄어들자 명랑만화로 전향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새로운 순정만화의 문을 연 김동화 선생도 문하생이던 한승원 선생의 스토리도 써주고, 함께 작업도 하더니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등 ‘하니’를 내세운 명랑순정만화가인 이진주·이보배 선생은 스타일도 거의 비슷한 작업을, 마치 한 작가처럼 하기도 했다.

1990년대 들어 선생-문하생 구도에서 비롯된 인연이 바뀌기 시작했다. 1990년대의 대표적 만화가 부부인 강도하·원수연, 이빈·전호진, 신영우·신시하, 손희준·오은지 부부는 선생-문하생 관계보다는 모임이나 소개 등으로 만나 인연을 맺었다. 이 밖에 부부가 만화와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는 최호철·유승하, 이우일·선현경 작가 부부도 있다. 1990년대 부부 작가들은 협업하기보다는 완전히 다른 자기 영역을 갖고 작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에도 부부 만화가가 꽤 많다. 의 작가 도가시 요시히로와 의 작가 다케우치 나오코 부부는 수익으로 따지면 웬만한 중소기업 수준이다. 의 작가 도리야마 아키라의 부인 미카미 나치도 유명 작가 부부다. 의 감독 안노 히데야키와 의 작가 안노 모요코도 부부다. 모요코는 남편 안노 감독과의 결혼 생활을 이란 작품으로 그리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선 일상적인 에세이 만화를 그리는 웹툰작가 부부들이 극적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화로 보여주기도 한다. 로 큰 인기를 끈 네온비·캐러맬 작가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그린 웹툰 , 정철연 작가 역시 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리고 수많은 연인들이 협업을 하고 있다. 이들이 사랑과 전쟁을 찍지 않기 위해 어떤 원칙을 지켜야 할까. 첫 번째, 협업에 대해서는 사전 합의가 필요하다. 만화는 기획·스토리·작화·컬러링·후반작업 등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다양한 협업 사례가 존재할 수 있다. 안타깝게 우리는 협업에 임하면서 내 권리는 크게 생각하고 상대방의 권리는 되도록 작게 생각하려는 관행이 있다. 상대방 때문에 내가 손해 봤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간다. 그러니 차라리 시작하기 전에 의무와 권리를 정리해야 한다.

두 번째로 작업에 참여하는 스태프가 있다면 이를 밝혀줘야 한다. 구조적으로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단행본으로 출간할 때 판권에는 꼭 기입해야 한다. 서구의 경우 컬러링이나 레터링처럼 디테일한 역할에도 이름이 표기된다.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려면 참여자들도 그에 걸맞은 역할과 완성도를 보여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합의의 정신이다. 순간순간 우리는 억울한 일들과 조우한다. 하지만 억울한 일이 생기는 족족 게시판에 풀어놓는다면, 그야말로 내 억울함 한번 풀려다가 초가집을 다 태울 수 있다. 합의와 조율에서는 당사자 모두가 나의 입장과 함께 타인의 입장도 깊이 숙고해야 한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았던 시절이라면 몰라도, 연인 관계가 깨지든 아니면 결혼에 성공하든 간에 행복하고 지속 가능한 작업을 위해서는 처음부터 협업 틀을 잘 짜는 편이 좋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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