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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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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공포에 잠식당한 지 1년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 사회 일상의 변화를 기록한 정남구의 <잃어버린 후쿠시마의 봄>
등록 2012-03-17 11:43 수정 2020-05-03 04:26

다시 봄이 왔다. 엘리엇은 ‘황무지’의 첫 구절에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썼지만 지난해만큼은 3월처럼 잔혹한 달이 없었다. 2011년 3월11일, 우리는 일하던 손을 놓고 모두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영상 속에서 우리의 이웃은 거대한 파도를 뒤로한 채 정신없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쪼개지고 휘어진 도로가 검은 입을 벌린 채 그들을 위협하고 가로막았다. 속수무책이었다. 신을 믿지 않는 자도 누군가를 향해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세상의 끝과 같은 현장을 그곳에서 보았다. 그러나 재앙이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곧이어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그날 저녁 7시3분 ‘원자력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저녁 8시50분 발전소에서 반경 2km 구역에 사는 주민들에게 피난을 지시했다. 이어 밤 9시23분에는 반경 3km 권역으로 확대하고 반경 10km 안 주민들에게는 옥내 대피를 지시했다. 끔찍한 공포가 반경을 넓히며 퍼져나갔다.

모든 땅이 오염되었다

동일본 대지진 1년을 맞아 관련 책들이 서가를 채웠다. 대지진 현장을 그린 (올림 펴냄), 원전 사태 이후의 일본과 세계에 대해 일본 지식인들이 쓴 (그린비 펴냄), 한-일 반핵 인사들의 글을 엮은 (서해문집 펴냄), 지진이 일어난 시점부터 후쿠시마 원전의 연이은 폭발, 이후 일본인들의 삶의 변화를 기록한 (시대의창 펴냄)을 비롯해 곧 26주기를 맞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기리며 그린 그래픽노블 등이 그것이다. 이 중 도쿄특파원으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정남구 기자가 쓴 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중심으로 원자력 에너지의 위험성을 집중해서 다룬다. 저자는 재해 현장과 원전 사고의 비극을 바라보며 참담한 마음이 들어 몇 번이나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10만 명이 넘는 피난민을 만들었다. 일본 정부는 제1원전에서 반경 20km 안을 경계구역으로 정했다. 주민들은 언젠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생각으로 떠났지만, 원전 주변의 방사능 오염이 점점 심해서 그 희망은 옅어지고 있다. 방사능에 노출된 땅이 오염됐고, 그 땅에서 자란 채소를 비롯해 자갈, 나무, 지렁이 할 것 없이 모두 오염됐다. 축적된 방사능 오염물질은 인간의 신체에 들어와 어떤 교란을 일으킬지 모른다. 저자에 따르면 전신에 8시버트(Sv·인체 피폭선량 단위) 이상 피폭한 환자는 현대의학으로 생명을 건질 수 없다. 6Sv 이상 피폭시에는 99% 사망, 3~4Sv 피폭시에는 백혈구 감소에 의한 감염증 등으로 50%가 사망한다. 많은 양에 노출되지 않았더라도 안도할 수 없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원전에서 1500km 떨어진 스웨덴 베스테르보텐주 소수민족 마을에서 암환자가 급증한 사례는 저선량 피폭도 암 발생률을 급격히 높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이제 겨우 반의 반세기가 지난,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공포를 되살려놓았다. 일본 정부는 제1원전 1호기가 수소폭발을 일으킨 지 꼭 한 달째 되던 4월12일 오전, 후쿠시마 사고를 원자력 사고 등급상 최악인 ‘레벨7’에 해당한다고 발표했다. 체르노빌과 같은 사고 등급이다. 혹자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직원의 부주의로 인한 인재였다는 점에서 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다르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저자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어난 결정적 원인은 자연재해가 아니라고 말한다. 국가가 아닌 민간(도쿄전력)이 원전산업을 주도한 게 재앙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도쿄전력은 학계와 주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진이 잦아 원전 터로 부적합한 도호쿠 지방에 원자력발전소를 지어올렸다. 경제적으로 낙후한 후쿠시마는 지역 개발을 위해 도쿄 사람들이 쓸 전기를 생산하는 원전을 유치했다. 도쿄전력은 사고가 일어나기 이전에도 여러 차례 원자로에 문제가 있었지만 비용 절감을 이유로 제대로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원전 머니’에 길들여진 정계·학계·언론은 안일한 운영에 눈감아줬다.

<한겨레> 김정효

<한겨레> 김정효

원전 21기 계속해서 가동 중인 한국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일본을 비롯해 주변국들은 원전 정책을 전면 재검토했다. 원전대국 독일은 2011년 6월30일 현재 가동 중인 17기 중 8기를 폐기하고, 나머지 9기도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폐기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스위스는 2034년까지 기존 원전의 수명이 끝나는 대로 모두 폐로하기로 했다. 이런 와중에 원전 21기를 가동 중인 한국의 이명박 정부는 오히려 원전 확대 정책을 강조하고 있다.

70여 년 전 현대 과학기술이 핵분열을 발견해낸 건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우리는 인공적으로 원시 우주의 상태를 재현해내며 엄청난 에너지를 얻었다. 그러나 한 가지 외면한 것이 있다. 방사선을 내뿜지 않는 안정된 원소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을 찾지 않은 채 이 위험한 요소를 일상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이다. 인공 방사성 핵종들이 더는 방사선을 내뿜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은 지금으로는 오직 수천~수십만 년의 시간뿐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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