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벌어서는 안 된다. 월급만으로는 전셋값 따라가기 어려운 직장인을 지배하는 강박이다. 정확히 10년 전 ‘10억원 만들기’로 시작한 재테크 유행은 지금 ‘스마트 컨슈머’를 향해 숨차게 달리고 있다. 요즘 화두는 ‘현명한 소비’다. 재테크 동호회는 신용카드 서비스와 할인 내역을 비교하는 정보로 넘쳐난다. 아예 스마트폰 사용자들에게 신용카드별로 할인 혜택을 최대한 뽑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인 ‘체리피커’라는 앱도 나왔다. 쇼핑에서도 할인상품만 골라잡는다는 체리피커형 소비자들은 새로운 카드 서비스와 할인에 민감하다. 소셜커머스 같은 할인 서비스를 주도하는 것도 이들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10억원 만들기’에서 ‘체리피커’까지 재테크 흐름을 좇아 산 지 10년, 우리 집 자산은 중산층에 훨씬 못 미치는데 카드 개수만 대한민국 평균을 넘어선 것이다.
발 빼기 어려운 ‘신용사회’
우리 집 신용카드는 부부 합산 12장이었다. 2011년 말 기준 한국인은 1인당 평균 4.9장의 신용카드를 갖고 있다. 2008년부터 신용카드 발급률은 가파른 상승세를 보여왔는데, 2008년 9624만 장이던 신용카드 수는 2009년에는 1억699만 장으로 1억 장을 넘어섰다. 신용카드가 많아도 쓰지 않는다면 무슨 문제가 될까? 재무설계회사인 에듀머니 제윤경 이사는 “자신의 잔액과 수입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선 지출에 대한 자각이 없어진다. 소비가 카드한도에 좌우되면 출발부터 재테크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잘 쓸 줄 몰라서, 많이 벌지 못해서 쫓기며 사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과다 신용사회에서는 카드 사용자 모두가 잠재적 채무자다. 신용카드가 자산이 아니라 잠재적 빚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카드와 계좌를 줄이는 살림 구조조정에 나섰다.
지난 1월19일 금융감독원은 ‘장롱카드 특별 정리기간’이라는 걸 발표했다. 금감원이 추산해보니 지난해 우리나라 사람이 가진 신용카드는 총 1억2258만 장이고 그중 3218만 장이 1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휴면 카드란다. 30% 가까운 신용카드가 장롱속에서 묵혀지는 셈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3월까지는 각 카드사와 은행이 자체 계획을 수립해서 장롱카드를 정리하도록 요구했으며 실적이 미진한 카드는 앞으로 적정성 여부를 중점 점검하겠다”고 했다. “해지 사유를 확인하며 다른 카드상품을 권유하는 행위는 금지한다”는 깨알 같은 해지 지도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정리기간을 틈타도 카드 해지는 쉽지 않았다.
우선 구조조정 대상이 된 카드는 지난해 놀이공원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면제받는 대신 만든 카드다. 분명 나보다 없는 형편일 텐데 입장료를 대신 내준 카드 모집인에게 이 카드로 석 달간 아파트 관리비를 자동이체하기로 약속한 터였다. 자동차 살 때 할인해주는 대신 1년 동안 1500만원 넘는 돈을 카드로 쓰기로 했던 다른 카드도 마찬가지였다.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떠날 때가 됐다. 1년 전 VIP 고객으로 선정됐다는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만든 VIP 신용카드는 어떤가. 호텔 갈 일 없고 비행기 탈 일 없는 처지에 연회비만 10만원 가깝게 냈으니 정리 1순위다. 그러나 “열심히 쓴 당신, 떠나라”고 말해주는 카드사는 없었다. 처음 전화한 카드사에서부터 나는 기가 꺾였다. 상담원들은 현금처럼 쓸 수 있는 포인트를 남긴 채 카드를 해지하는 것은 진심으로 아까운 일이라며 내 처지를 걱정해주었고, 어떤 상담원은 내 소비 생활을 분석해보니 이 카드를 계속 쓸 때 얼마나 이익을 보게 될지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대형 서점, 영화관에서 이미 5%씩 꼬박꼬박 할인을 받으셨거든요.” 그래도 망설이자 연회비를 돌려주겠다는 결정적 제안이 날아왔다. 두 군데에서 연회비를 돌려받자 신명이 붙었다. 이미 나는 카드를 해지하려고 전화를 돌리는 사람이 아니라 연회비를 벌어볼 수 없을까 해서 전화를 돌리는 사람이 돼 있었다. 결국 5장의 카드 중 VIP 카드 하나만 해지했고, 그 대신 해지한 카드사의 다른 카드를 2장 더 만들기로 했다. 카드는 늘어났지만 돈을 번 것 아닌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 나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래서 안 쓰는 카드, 없애지 말고 굶기라는 말이 있나 보다 했다.
재무적 무력감에 빠진 체리피커
그러나 재테크 정보보다 더 필요한 것은 상식이었을지도 모른다. 해지 의사를 밝힐 때 카드사가 고객에게 연회비를 돌려주는 것이 위법은 아닌지 금감원에 물었더니 “이미 연회비를 낸 상태에서 카드를 해지할 때는 잔여 일수만큼 계산해 남는 연회비를 돌려주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지난달에 연회비를 냈던 것을 고려하면 결국 지금 카드를 해지했다 하더라도 받아야 할 돈과 그리 차이 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카드사가 제시하는 현란한 카드 혜택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신용카드는 대부분 한 달에 얼마 이상을 사용해야 할인을 적용하는 실적제로 운용된다. 통신비 자동이체 제외, 연 8회 이상 할인 제한 등 신용카드의 부가서비스가 다양해지는 만큼 사용 횟수와 할인 한도 제한도 다양해졌다. 연회비 면제 조건을 꼼꼼히 따지고 프로그램까지 이용해서 최소한의 연회비만 내고 카드를 적게 쓰면서도 최대한의 할인 혜택을 받는다는 체리피커족이 등장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에듀머니의 제윤경 이사는 “카드사가 신규 회원을 유치할 때 약속했던 혜택과 서비스는 대부분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여신전문금융업법에서는 일방적으로 서비스를 변경하고도 소비자에게 통보만 하면 되도록 하고 있으며, 대부분 카드 발급 안내문에는 ‘포인트나 카드 관련 서비스나 기능은 변경 또는 중단될 수 있다’는 단서가 붙는다. 할인 한도가 슬그머니 바뀌어도 소비자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할인 혜택을 고스란히 누린다 해도 마찬가지다. 제 이사는 체리피커족인 한 여성을 상담해보니 그가 1년에 돌려받는 할인 금액은 연회비를 빼면 1만5천원 정도였다는 계산이 나왔다고 했다. 1만5천원을 받으려고 카드 혜택을 줄줄 꿰고 있어야 하고, 컴퓨터를 켜면 카드동호회에 출석해 새로운 정보를 챙기고, 가고 싶지 않은 가게에도 가야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삶일까. 할인을 누린 대가는 필요해서 쓰는 게 아니라 쓰기 위해 쓰는 생활에 포섭되는 것이다. 제윤경 이사는 신용카드 알뜰족의 가장 큰 문제점이 “여러 장의 카드를 돌리며 현명한 소비를 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론 자신이 돈의 흐름을 조절하지 못하는 재무적 무력감에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경제적 최약자들이 카드론, 리볼빙 서비스, 햇살론을 순서대로 밟아가며 파산 상태에 빠지는 이유는 그들이 소비 충동을 자제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해서가 아니라 소비의 주도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신용 공급이 과잉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 돈의 흐름’ 되찾아오기
가장 보수적인 일반 예금 시장에도 트렌드는 있다. 저금리가 계속되고 유동성이 넘치던 2010년 최대의 재테크 화두는 이자율이었다. 재테크 커뮤니티는 이자율을 촘촘히 비교하고 공동 가입을 권유하는 글로 넘쳐났다. 저축은행 파산 이후에는 단연 안전성이 중요하다. 경제부 기자였던 한 선배는 새로 문을 연 은행의 이자율이 높다는 소문을 들으면 택시를 타고라도 가서 계좌를 텄다. 그러나 얼마 안 되는 이자보다 택시비가 더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깨닫자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여러 은행의 예금통장들은 만기를 넘기도록 잠자기 일쑤였다. 실속은 없는데 통장 꾸러미만 큰 것은 우리 집도 만만치 않다. 부부 합산 15개의 통장과 12개의 신용카드. 증권사 수시 입출금 상품부터 국책은행의 가상계좌까지, 부지런히 달렸는데 우리 집 자산은 물가 인상도 따라잡지 못한 인상이다. 대출도 자산이라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돈이 돈을 벌던 시절의 이야기다. 자주 가던 재테크 동호회에서 신용등급에 상관없이 마이너스 통장 여러 개 만드는 비법을 전수받고는 마이너스 통장을 3개 마련했다. 은행 잔고에 둔감해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할인을 좇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 쓰고, 신용이 아니라 가진 만큼 쓰자는 단순한 진리를 따르려면 어떻게 살림을 살아야 할까.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를 사용하기로 하자 현금 계좌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커졌다. “필요한 돈을 미리 저축해서 사용하라”는 것은 재테크 상담원들의 가장 기본적인 충고다. 얼마 안 되는 이자율 차이를 좇아 여러 은행을 쇼핑하기보다는 은행은 한곳으로 정하고 계좌를 여러 개 만드는 게 좋단다. 은행 가는 일이 번거로울수록 소득과 소비를 관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윤경 이사는 “용도별로 여러 개의 인터넷 계좌를 만들라”고 충고한다. 월급이 들어오면 생활비로 쓰는 계좌, 자동이체되는 돈을 내는 계좌로 돈을 보낸다. 그리고 남는 돈을 저축하는데, 이때도 용도별 저축 계좌를 따로 만드는 것이 좋단다. 비상금, 교육비, 여행자금에다 가끔 찾아오는 지름신을 위한 계좌도 만든다. 충동적으로 소비하고 나중에 빚을 갚아나가는 신용카드에 기대지 않고 미리 저축해서 꼭 사고 싶은 것을 사며 내 돈의 흐름을 되찾아오기 위한 방법이다.
하루 꼬박 통장과 카드를 없애다
월차를 내고 그동안 쓰지 않던 통장을 모조리 해지했다. 일일이 은행을 다니며 6개의 통장을 해지하는 데 5시간 가깝게 걸렸다. 통장에 잠자고 있던 돈 1만5천원을 돌려받았지만 그 돈은 그날 점심값과 차비로 고스란히 나갔다. 통장을 만들 때도 부부가 합심해서 그랬던 걸 생각하면 ‘덤앤더머’가 따로 없다. 그다음엔 신용카드 해지에 다시 도전했다. 이번엔 전화해서 무조건 “신용에 문제가 있어서 그러니 카드를 해지해달라”고 애원했다. 울먹일 준비도 했지만 상담원들은 두말없이 해지해주었다. 이렇게 어렵게 없앤 통장과 카드를 다시 또 만들 날이 올까. 전 국민이 과감하게 금융 재테크라는 이름으로 투기에 나섰던 시절이 저물었지만 그사이 은행은 더 늘어 있었다. 그때 우린 다수 대중의 투기로 금융자본을 먹여살렸던 것일까.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명태균 1억 받고 채용한 지인 아들, 현재 용산6급 근무”
응급실 돌다 숨진 10대…법원 “거부한 병원, 보조금 중단 정당”
조국, 다음달 ‘자녀 입시비리’ 대법 판결 “사과나무 심겠다”
선거법위반 1심 중형 받은 이재명, 25일 위증교사 혐의 1심에 촉각
[영상] “대통령이 자꾸 거짓말”…수능 마친 고3도 서울 도심 ‘퇴진’ 집회에
윤 대통령 부부, 기존 개인 휴대전화 사용 중단…새 휴대전화 개통
세계 5번째 긴 ‘해저터널 특수’ 극과 극…보령 ‘북적’, 태안 ‘썰렁’
‘반쪽’ 사도광산 추도식…‘조선인 강제 동원 언급’은 끝내 없었다
검사로 돌아간 한동훈, 이재명 유죄 ‘반사이익’ 어림 없다
“국민 요구 모두 거부하니”…서울 도심서 ‘윤 대통령 거부’ 행진·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