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오래도록 채집과 수렵을 통해 삶을 영위했다. 수렵과 채집에 나선 남성들은 공간을 정확히 인지해야만 자신과 가족을 살릴 수 있었다. 공간을 인지 못하는 남성은 도태되고, 오랜 시간 남성의 DNA에는 공간을 효과적으로 인지하는 정보가 입력됐다. 남성이 넓은 들판과 산 같은 공간을 인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여성은 내 품 안에 기르는 아이의 얼굴을 보고 길쌈을 하며 요리를 했다. 남성이 공간을 인지하고 기억하고 분석해야만 했다면, 여성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대신 아이의 얼굴을 보고 아이의 상태를 알아내거나, 길쌈 중인 옷감의 부분적 상태를 통해 전체를 떠올릴 수 있어야 했다. 구분하자면 남성은 공간적이고, 여성은 평면적이다. 인류의 오랜 진화를 통해 형성된 이미지를 대하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로 굳어졌다.
공간은 장식적이지 않다. 공간은 사건을 품는다. 들판의 왼쪽에 들소들이 있고, 오른쪽 수풀 속에는 맹수가 숨어 있다. 이건 장식이 아니라 사건이다. 곧 이어질 움직임이 예측돼야 한다. 오른쪽 수풀 속 맹수가 튀어나오고 들소가 도망갈 것이니, 이곳에서는 들소를 사냥하기 어렵다. 만약 공간을 바라본 선사시대 남성이 사건을 예측하지 못하고, 들소와 맹수 사이로 들어간다면 그의 생명은 그걸로 끝!
평면은 장식적이다. 젖을 먹이다 바라보는 아이의 얼굴, 어머니의 품안에서 잠든 그 평온한 얼굴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본다. 그다음 무언가를 만들 때 아이의 얼굴에서 바라본 아름다움을 꾸미고 싶어 한다. 길쌈한 옷감에 형상을 넣는다. 그렇게 장식이 많아지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시장에서 더 잘 팔리게 된다. 장식성이 경쟁력이 되었다.
이제 만화를 보자. 남성들은 여성만화(순정만화)를 보지 못한다. 첫째 이유, 그림이 거슬려서다. “순정만화에 나온 남자들은 왜 머리가 길고, 허리가 길어? 세상에 이런 남자가 어디 있어?” “왜 눈이 크고 반짝거려? 이거 서양을 동경하는 사대주의 아니야?” “대체 왜 칸 위로 캐릭터가 튀어나와 있고, 캐릭터 옆에 장미꽃이 등장하는데?” 대개 이런 이유들을 대며 여성만화를 비난한다(때론 여성만화가 열등하다고 비하하기도 한다). 모든 비난의 원인은 장식성 때문이다.
여성만화는 세계 역사상 둘도 없을 정도로 여성에 의해 창작되고, 여성에 의해 소비되는 여성 콘텐츠다. 당연히 여성성에 기초한다. 이미지를 표현하는 여성성의 특징은 평면성과 장식성이다. 여성은 공간보다는 평면을 더 쉽게 인지하고, 인지한 평면에 장식을 넣기를 원한다. 그래서 여성만화 특유의 스타일이 등장한 것이다. 대신 공간성의 남성은 평면성과 장식성이 과도하게 등장하는 여성만화를 애초에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건 문화의 벽이 아니라 인류 진화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벽이다. 그러니 누구도 비난하지 말자. 애초에 남성과 여성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어쩌란 말인가!
하지만 안심하시라. 만화라는 매체는 자연스레 공간성과 평면성이 통합돼가는 중이다. 여성만화에는 과도한 장식성을 배제하고 공간성이 살아 있는 만화가 등장한다. 내용 자체는 정서적이지만, 치밀한 공간 구성과 과도한 장식을 배제한 나 같은 만화가 좋은 사례다. 남성만화도 장식성을 받아들인다. 남성만화가 받아들인 대표적 장식성은 얼굴의 빗금. ‘두근두근 기호’다. 다카하시 신의 작품을 보면 두근두근 기호가 남발되다시피 하는 만화도 있다. 가 좋은 사례다. 인류의 비밀이 만화에 숨어 있다. 흥미롭지 않은가?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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