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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도 꽃도 사람도 소중하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 사소한 ‘찌라시’도 손바닥 그림 안에서는 보석처럼 빛난다…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
등록 2011-11-18 15:55 수정 2020-05-03 04:26

기자의 주머니 안에 언제나 수첩과 펜이 있다면, 그의 주머니 안에는 언제나 손바닥만 한 화첩과 펜이 들어 있다. 말하자면 그는 언제나 그림 그릴 태세를 갖추고 있다. 그는 이젤을 펴고, 너른 도화지를 펼치고, 물감을 짜고, 붓을 고르며 그림을 그리기보다 시시때때로, 손바닥에 펼친 수첩에, 손에 잡히는 재료로 그린다. 사람을 기다릴 때, 지하철을 타고 긴 거리를 갈 때는 순간을 포착해 그림으로 저장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이렇게 쌓은 시간들을 모으고 정리해 책으로 펴냈다. (한겨레출판 펴냄)다.

‘손바닥 그림’에 당긴 평범한 우리

박재동 화백은 숨 쉬듯 그림을 그리는 듯하다. 일상의 세세한 결마저 놓치지 않고 새겨둔 그림을 보노라면 그리는 행위에 아주 밀착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손바닥만 한 공간에 일상을 새겨넣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냥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마치 손가락 사이로 새나가는 모래처럼 흘러가버리는 느낌이 들어” 일종의 그림일기를 그리기로 마음먹은 것이 ‘손바닥 그림’의 출발이다. 그렇게 수천 점의 그림이 쌓였다. 책에는 추려서 220편의 작품이 실렸다.

1988년 창간 멤버로 참여해 8년 동안 한 컷짜리 시사만화 ‘한겨레그림판’을 그린 박 화백은 직설적이면서 호쾌한 풍자로 “한국의 시사만화는 박재동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세간의 평을 들었다. 그런 과감성과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공감이 그의 그림일기에 담겼다.

형식과 내용은 다양하다. 펜으로 가는 선을 꼼꼼히 채운 그림이 있는가 하면, 붓펜으로 그려 거칠고 질감이 도드라지는 그림도 있다. 도구는 세월에 따라 바뀌어왔는데, 2004년 즈음에는 주로 가는 펜으로 대상의 윤곽을 그리고 채색으로 마무리했다면 최근에 올수록 붓펜의 터치감이 강조됐다. 주로 담는 내용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다. 포장마차 아줌마, 육교 위 노점상, 과일 장수, 택시 기사, 소변 보는 남자, 단골 음식점 주인, 노숙인 등이 그 주인공이다.

하나의 소재에 천착해, 모아놓고 보니 연작이 된 경우도 있다. ‘지하철에서 만난 사람들’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모아놓은 그림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혹은 우리 모습이다. 지하철에서 조는 여학생, 사람 많은 그곳에서 음악을 들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여성, 책 읽는 사람, 자기 팔에 기대 고단한 모양으로 서 있는 사람….

바퀴벌레에 대한 관찰과 사유와 집착을 그린 22편의 ‘바퀴벌레 관조기’는 박 화백 스스로도 상당히 만족스럽게 여기는 작품이다. 온갖 책과 자료로 “난지도가 된” 작업실, 모든 게 너무 소중해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성격은 음식물 찌꺼기마저 버리는 걸 잊게 해 바퀴벌레를 들끓게 만들었다. 처음엔 기가 막혔지만 박 화백은 이내 낙천적으로 돌아선다. “전부터 바퀴벌레를 그리고 싶었는데 제대로 관찰할 기회가 생겨 잘됐다! 이참에 바퀴벌레와의 사귐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보자. …월트디즈니를 봐라, 가난한 젊은 시절 방에 쥐가 들락거리는 것을 보고 쫓아버리지 않고 사귀어서 세계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았느냐.” 그렇게, 얼굴 위로 기어다니는 바퀴벌레마저 용인하며 시작된 바퀴벌레 관조기에서, 그는 죽어 배를 보이며 누워 있는 바퀴벌레를 보며 죽음과 여생의 의미를 사유하고 때로는 우주와 진화의 차원으로 생각을 넓혀간다. 그러나 어투는 무겁거나 어렵지 않게, 일상적 가벼움을 섞어서. 혐오와 공포 대신 애정과 미안함을 담아서.

사소함이 예술로 승화하다

이중섭이 조그만 담뱃갑에 그림을 새겨넣었듯, 그에게도 세상의 모든 작고 사소한 사물들이 화첩이 될 수 있었다. 박 화백은 주로 작은 화첩에 그림을 그렸지만,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습성은 각종 ‘찌라시’도 조그만 공간이 있다면 도화지로 삼는다. 박 화백은 손바닥 그림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것이 ‘찌라시 아트’라고 말한다. 길가에 떨어져 있는 찌라시들을 주워 모으며 그는 “이것저것 그래도 만들 땐 신경 써서 만든 것인데, …이런 물건 하나하나가 다 이 시대를 증언해주는 말인데”라고 생각한다. 택시 뒤에 붙어 있는 검정고시 학원 광고 스티커를 보고는 100년 뒤 귀한 물건이 될 것이 틀림없을 거라고 자신하며 택시 기사에게 허락을 구하고 살뜰히 뜯어온다. 그 과정을 글로 쓰고 만화로 그렸는데, 100년 전의 골동품을 구한 수집가처럼 기뻐한다. 화첩 쇼핑을 한 영수증에는 마음이 두둑해진 화가의 가슴벅참이 담겼고, 마이너스 50만원, 85만원, 350만원이 찍힌 은행 거래명세표에서 박 화백은 우울하고, 더 우울해지고, 나중에는 미칠 지경에 이른다. 과자 박스, 빈 라면 봉지, 도너츠 가게 냅킨마저 그리고 생각하는 대상으로 삼는 박 화백은 서울 상암운동장 크기의 생활사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소망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더 많이 모으고 그 곁에 더 많은 사유를 담는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본질은 다음의 과정을 거쳐 정의된다. 우리 삶이 특별한 것만으로 이뤄져 있지만은 않다. 그러나 자신이 귀하게 여기는 정서나 가치가 담겨 있다면 그림의 소재나 대상에 관계없이 새로운 특별함과 소중함이 만들어진다. 그 소중함을 혼자 가지려 하지 않고 나누려 애쓴다면 그것이 예술이다. 박 화백이 ‘그림을 그리는 이유’ 또한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본질과 맥락을 같이한다. “사람을 그리면 사람이 소중해지고, 꽃을 그리면 꽃이 소중해지고, 돌멩이를 그리면 돌멩이가 소중해진다.”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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