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네덜란드 엔데몰사에서 처음 리얼리티쇼의 포맷을 공개했을 때에는 자조의 뉘앙스가 남아 있었다. 외딴섬에 갇힌 남녀 커플 몇 쌍을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이 관찰하는(훔쳐보는) 전대미문의 엔터테인먼트쇼에 란 이름을 붙여버린 아이러니에서 그런 뉘앙스를 느낀 게 아주 이상하진 않았단 얘기다.
엔터테인먼트가 되어버린 삶
적어도 거기엔 미디어를 통해 확대재생산되는 통제 불가능의 욕망에 대한 냉소의 흔적이 있었다. 물론 지나보니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21세기와 함께 시작된 리얼리티쇼가 그나마 근근이 버티고 있던 20세기의 윤리의식과 도덕률을 TV 엔터테인먼트 안에 밀어넣고 믹서기로 돌려버린 건 사실이다. 덕분에 뉴밀레니엄의 인류는 원래 뭐였는지 알 길 없이 뒤죽박죽 엉겨붙은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21세기적으로 소비하게 됐다.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먹어보니 나쁘지 않더라고 말하면서, 심지어 어느 쪽으로든 유익하지 않겠는가 말하면서, 만인 앞에 사생활이 노출되든 말든 그건 개인의 선택이니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모던하게 누군가의 인생을 소비한다.
TV에 인생을 소비하는 건 출연자도 마찬가지다. 이에 더해 그들은 욕망의 전시에서 더 적극적이다. 가수가 되거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 혹은 연애나 결혼을 위해 사람들은 TV에 출연한다. 카메라 앞에 개인의 삶을 공개하고(동시에 인터넷 프로토콜로 그 삶이 소환되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속으로 기꺼이 뛰어든다. 잘하면 상금과 명성을, 못해도 인기 검색어 순위 정도는 얻을 수 있으므로 출연자들은 어쨌든 손해 볼 것 없다는 생각으로 카메라 앞에 몸을 내맡긴다. ‘누구든 몇 초는 유명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앤디 워홀의 현대적 잠언은 그렇게 현실이 된다.
자, 그래서 21세기에 짙게 드리운 리얼리티쇼의 흑막은 죄다 천박한 욕망을 가진 출연자들 때문일까. 아니다. 브랜드가 없는 사람들, 요컨대 일반인의 삶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걸로 제작비를 줄이고 동시에 그 삶을 전시하는 걸로 광고수익을 올리는 방송사가 없었다면 애초에 그들은 카메라 앞에 나서고 싶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을 전시했을 것이다. 이때 문제는 리얼리티쇼가 제작자의 윤리 대신 출연자의 경험과 학습을 자기 정당화의 논리로 소환한다는 점이다.
오디션에 떨어져 쓸쓸하게 뒷모습을 보이던 출연자는 카메라를 쳐다보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이제부터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단 몇 주의 경험으로 삶이 달라지는가. 대중에 대한 노출로 삶이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면 결국 그 삶은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노출되지 않고선 유지되기 힘들지 않겠는가. 그건 압도적인 욕망 때문이라기보다 삶의 관성 때문일 것이다. 방송사와 출연자는 그렇게 담합하고, 쇼는 사람을 갈아치우며 계속된다. TV를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믿음은 TV가 세계를 반영하거나 대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TV, 이를테면 광의의 엔터테인먼트는 그 자체로 순수하게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을 때에나 비로소 써먹을 만한 가치가 생긴다. 그래서 우리 삶이 곧 엔터테인먼트처럼 연출되고, 액션과 리액션의 타이밍으로 전환될 때의 당혹감은 소외감에 가깝다.
모두가 성장할 수 있다는 착각이런 오해가 극대화된 건 최근 문화방송 의 ‘신입사원’이다. 문화방송의 아나운서 공채를 리얼리티쇼 형식으로 전환하겠다는 이 야심만만한 기획은 리얼리티쇼와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판타지 속에서 정당성을 얻는다. 외모와 학력이 아닌 실력으로 평가받고, 또한 애초에 기회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 기회를 얻는다는 환상, 그걸 통해 모두가 성장할 수 있다는 판타지. 하지만 그 쇼에 나온 누군가 성장했다면 그건 TV 때문이 아니라 자기 경험을 내면화하고 성찰의 발판으로 삼은 의지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성장하지 않아도 좋고, 굳이 그걸 TV에 중계하지 않아도 좋다.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그건 오로지 나만이 아는 것이므로.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