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올가을엔 ‘귀여운 소녀’는 가고 똑 떨어지는 슈트를 갖춰 입은 ‘완벽한 그녀’가 온다</font>
▣ 심정희 〈W Korea〉 패션 에디터
디자이너들은 참 변덕도 심하다. 봄이 시작되던 무렵까지만 해도 우주탐험선에 언제라도 몸을 실을 수 있도록 등장인물 같은 옷들로 차려입으라고 호들갑을 떨더니 이제는 또 1940년대 여배우들을 본받으라 한다. 여자란 모름지기 사랑밖에 몰라야 한다며 간지러운 프릴 드레스 입기를 강요할 때는 언제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정제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여자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여자라고 말을 바꾼다. 그래서 이번 가을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펼치는 주장은 이렇다.
바야흐로, 클래식의 시대
베이브 팔레이(Babe Paley)라는 여자가 있다. 미국 〈CBS〉 방송사의 창립자 윌리엄 팔레이의 부인이었고, 1940년대와 1950년대 뉴욕 사교계의 중심에 있었던 여자. 그런가 하면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옷차림을 했던 것으로 알려진 여자. 이번 가을과 겨울에는 베이브 팔레이식 옷차림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이템과 스타일을 막론하고 모든 디자이너들이 정제된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데 헌신하고 있는 의상은 슈트로 허리를 강조하고 재킷의 허리 아래 부분(페플럼)을 살짝 퍼지게 디자인한 1940년대 스타일의 스커트 슈트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커팅한 재킷과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팬츠가 짝을 이룬 미니멀한 슈트들이 백화점 쇼윈도를 장악할 전망이다. 지난 몇 시즌 동안 ‘옷차림의 강약을 조절한다’는 명목 아래 허용됐던 다양한 ‘반칙’들은- 캐주얼한 티셔츠에 진주 목걸이를 매치한다거나 여성스러운 미니 드레스에 해골 펜던트 목걸이를 한다거나 하는 식의- 올가을과 겨울엔 허용되지 않는다. 모든 장신구들은 옷과 어우러져야 하며, 모든 것이 정확히 그 위치에 있어야 한다. ‘도대체 얼마나 갖춰 입어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을 위해 베이브 팔레이의 친구이자, 자신 역시 당대의 스타일 아이콘이었던 슬림 키이스가 자서전에 남겼던 말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아무리 매력적인 사람이라도 배 위에서 자신의 스타일을 지키기란 쉽지 않죠. 그러나 베이브는 달랐어요. 며칠간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 동안, 그녀는 날이 갈수록 더 아름다워졌죠. 아무리 바람이 심하게 몰아쳐도 베이브의 옷은 구겨지지 않았어요. 머리 또한 바람에 흐트러지지 않았죠.”
‘소녀 흉내내기’의 고통은 이제 끝났나니
클래식의 시대가 도래함과 동시에 소녀들의 시대는 끝났다. 적어도 올가을·겨울에만은 연분홍 블러셔로 뺨을 물들이고 ‘샤방샤방’한 미니 드레스를 입고 간지러운 목소리를 낼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간 ‘소녀 흉내내기’에 헌신하느라 고통받아온 20대 후반 이상의 여성들에겐 꽤나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소녀시대가 끝났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증거 중 하나가 ‘나 사랑스럽지?’를 온몸으로 외치는 것 같던 미니 드레스들이 종적을 감춘 것. 그리고 그 빈자리는 허리선을 강조하고 가슴을 돋보이게 하는 롱 드레스들이 채울 전망이다. 1930년대와 1940년대 할리우드 ‘골든 에이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여배우들- 리타 헤이워드, 그레타 가르보, 조안 밀러, 베로니카 레이크 등 -이 영화에서 선보였던 반짝이고, 길고, 날씬하며, 미끈한 느낌의 드레스들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고로, 특별히 멋지게 차려입고 가야 할 연말 모임이 있는 여성이라면 ‘애들 같은’ 미니 드레스는 옷장에 고이 걸어두고 롱 드레스를 준비할 것을 권한다. 이런 드레스에 크리스털이 촘촘히 박혀 있는 클러치를 들고 크리스찬 루부탱이나 지미 추 스타일의 하이힐을 신고, 고급스러운 퍼 숄을 곁들이는 것이 올겨울 파티 룩의 정석.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귀엽게’가 아닌 ‘관능적으로’ 보이는 게 이번 시즌의 포인트라는 것. 더 완벽한 분위기 연출을 위해 ‘나는 리타 헤이워드다’라고 속으로 되뇌는 것도 꽤 도움이 된다(큰소리로 떠들면 이상한 사람으로 오인받을 수 있으므로 주의가 요망된다).
미니 드레스뿐 아니라 미니스커트 역시 이번 시즌엔 옷장에서 ‘겨울잠’을 자게 해도 될 것 같다. 1940년대의 컴백과 때를 같이해 치마 길이가 길어졌다. 가장 눈에 띄는 길이는 ‘미디’라고 불리는 무릎을 지나 종아리 중간까지 내려오는 스타일이지만 키가 작아 보이고 종아리가 더 둔탁해 보이는 이 어정쩡한 길이를 우리나라 여성들이 받아들일지는 아직 미지수. 미디 스커트가 부담스럽다면 프라다 쇼에 등장했던 다양한 디자인의 H라인 스커트들처럼 무릎을 살짝 덮는 길이에 도전해보는 게 좋다. 무릎 길이 스커트는 미디 스커트만큼이나 성숙한 분위기를 내뿜지만 미디 스커트에 비하면 다리 선이 한결 아름다워 보인다. 어쨌거나, 허벅지를 훤히 드러내는 미니스커트는 당분간 잊는 게 좋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여성들의 미니스커트 차림에서 삶의 위안을 얻었던 남성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
‘스쿨걸 스타일’ 니트의 변형도 다양해
베이브 팔레이는 아름다움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여성이 베이브 팔레이처럼 살 수는 없는 법. 아름다움에 바치는 많은 노력과 자기 절제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여성들이라면 베이브 팔레이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스타일에서는 대척점을 이뤘던 캐서린 헵번을 참조해볼 만하다. 남자의 슈트를 그대로 축소해놓은 듯한 초크 스트라이프 슈트, 역시나 신사화를 그대로 줄여놓은 것 같은 옥스퍼드 슈즈, 풍성한 와이드 팬츠 등이 캐서린 헵번 룩을 이루는 근간. 몇 시즌 전부터 시작된 디자이너들의 ‘강인한 여성상에 바치는 오마주’는 이번 시즌에는 좀더 어두운 분위기로 변주됐는데 캐서린 헵번 룩을 시도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버버리 프로섬을 비롯해 몇몇 브랜드들이 내놓은 ‘다크 앤젤’ 룩을 포인트로 활용할 수도 있다. 와이드한 팬츠와 옥스퍼드 슈즈의 조합에 더해진 가죽 바이커 재킷이나 스터드가 박힌 장갑, 가죽 모자 등은 24시간을 오롯이 아름다움에 바치지 않는 여성에게도 ‘트렌디’하다는 헌사를 허락해줄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시즌까지 요란한 타이포그래피로 장식된 네온 컬러 티셔츠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클럽을 전전하던 소녀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디자이너들은 그들이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영화 에서 알리 맥그로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너희는 모를걸? 꽝꽝 언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는 찰리 브라운과 그 친구들이 얼마나 귀여운지도 말이야.” 스쿨걸 스타일이 우리의 관심 밖에서 완전히 벗어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스쿨걸 스타일은 여자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한편, 남자들에게는 묘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이번 시즌에는 특히나 다양한 스쿨걸 스타일이 사랑을 받을 전망이다. 그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스타일은 여성적인 향취가 물씬 풍기는 여대생 스타일. 올이 굵은 실로 짠 느슨한 스웨터나 롱 카디건 한 벌이면 누구나 이 스타일을 쉽게 완성할 수 있는데 좀더 섹시한 느낌을 내고 싶을 때는 스텔라 매카트니가 쇼에서 선보였던 허리를 묶게 되어 있는 카디건을 원피스 대용으로 활용하면 된다(물론 치마는 안 입는다). 샤넬의 칼 라거펠트와 마크 제이콥스가 ‘마크 by 마크 제이콥스’를 디자인할 때 그랬던 것처럼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노는 꼬마 숙녀들의 스타일 또한 참조할 만하다. 그러나 타임머신의 도착지를 어느 시기로 맞추느냐와 무관하게 니트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념할 것.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은 ‘니트를 누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하느냐’를 놓고 내기라도 한 것처럼 다양한 소재, 다양한 두께의 실을 활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직조한 니트들을 내놓고 있는데 섹시하고 여성적인 느낌을 내는 데는 올이 두꺼운 실로 짠 느슨한 니트웨어가, 귀여운 느낌을 내는 데는 촘촘하게 짠 것들이 적합하다.
“왜 이런 게 유행인데?” 너무 고민 마시길
패션에서 매 시즌 달라지는 트렌드는 게임의 규칙과도 비슷한 것으로, ‘왜 그렇게 정했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턱을 받치고 앉아 “왜 이런 게 유행인데?”라고 묻는 건, “왜 술래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동안에만 움직일 수 있는가?”라고 따져 묻는 것과도 같다. 그러니 왜 1940년대가 돌아왔고, 미니스커트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는가 하는 것에 대해 너무 깊이 고민하지 말기를. ‘규칙이 같은 게임을 매 시즌 반복하면 재미가 없으니까, 이제 바뀌었나 보다’ 생각하면 좀더 즐거운 마음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트렌드 따라잡기’는 게임에 불과하므로, 모든 사람이 반드시 참가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해두고 싶다. 숨바꼭질에 흥미가 없는 이들은 디자이너들의 주장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삼삼오오 모여앉아 공기놀이를 해도 좋다. 숨바꼭질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놀이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숨바꼭질의 규칙을 알 필요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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