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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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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의 옷’에서 부와 패션의 상징으로

불황 속 40만~50만원대 고가 수입 청바지 유행…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특별한 욕구 만족시켜줘”
등록 2009-04-24 19:05 수정 2020-05-03 04:25

천막천으로 만든 광부의 옷, 청바지가 패션계를 주름잡은 지 160년 가까이 됐다. 유행을 타지 않을 것 같은 청바지는 사실 가장 트렌디한 옷이다. 시대 따라 발전하고 진화하며, 유행하고 소비된다. 제임스 딘이 입으면 ‘나쁜 남자’의 소품이 됐고, 전지현이 입으면 섹시한 여성의 전유물이 됐다.

한때는 통기타와 함께 청춘의 상징

여성들은 다리가 길어 보이고 날씬해 보이며 ‘힙업’ 효과를 줄 수 있는 청바지를 동경한다. 사진 CKD리빙 제공

여성들은 다리가 길어 보이고 날씬해 보이며 ‘힙업’ 효과를 줄 수 있는 청바지를 동경한다. 사진 CKD리빙 제공

청바지를 보면 시대도 읽힌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청바지는 통기타와 함께 청춘의 상징이었다. 80년대 후반에는 교복 자율화가 이뤄지면서 너도나도 청바지를 입었다. 젊은이들은 리바이스·게스·마리테 프랑수아 저버 등 수입진에 열광했다. 게스의 세모꼴 상표만 떼어다 청바지에 붙이고 다니기도 했다. 90년대 중반에는 닉스·GV2·스톰 등 국내 브랜드들이 인기를 끌었다. 스타가 입으면 따라 입었다.

2000년대 현재는? ‘누구나 가질 수 없는’ 청바지가 유행이다. 편안함과 아름다움은 기본이고, 고가 브랜드가 만들어놓은 가치와 이미지를 덧입는 청바지 구매가 이뤄지고 있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프리미엄진’이 그 예다. ‘청바지 귀족’으로 통하는 프리미엄진은 40만~50만원대 고가의 수입 청바지를 말한다. 트루릴리전·세븐진·허드슨진·로빈스진·제임스진 등 브랜드도 다양하다. 워싱과 핏, 주머니 장식 등을 차별화해 고유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브랜드들이다. 과거에 고가의 청바지로 불리며 유행했던 10만~20만원대의 캘빈클라인·리바이스·게스 등은 중가 상품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케이트 모스, 빅토리아 베컴 등 할리우드 패셔니스타들이 즐겨입는 브랜드로 각광받으면서 프리미엄진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고급 청바지를 브랜드별로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프리미엄진을 모은 백화점 청바지 편집 매장(특정 제품을 브랜드별로 모아 판매)이 성업 중이다. 신세계백화점 ‘블루핏’, 롯데백화점 ‘진스퀘어’, 현대백화점 ‘데님바’ 등이 지점별로 매장을 늘려가고 있다. 롯데백화점 본점 진스퀘어의 경우 1~3월 누계 기준으로 다른 매장보다 매출액이 45%가량 올랐다.

불황에도 소비자가 흔하고 만만한 청바지를 40만~50만원이나 주고 사는 이유는 뭘까? 직장인 김연철(33)씨는 “한눈에 봐도 고가의 특정 브랜드라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에 내 가치가 높아진 듯한 만족감이 있다”며 “특별한 날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멋 부리지 않은 듯 멋을 낼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진캐주얼 담당 김상효 선임상품기획자는 “프리미엄진의 차별화된 디자인이 남들과 다른 특별한 상품을 찾는 소비자의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즉, ‘가치소비’(가격보다는 가치가 주는 만족도를 중요시하는 소비 형태)를 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는 분석이다. 마음에 드는 청바지 하나면 다양한 코디가 가능하다는 점도 청바지에 비싼 돈을 들이는 이유다.

청바지가 여성의 섹시미를 돋보이는 의상으로 주목받으면서 ‘성형 청바지’도 등장했다. 직장인 박진아(31)씨는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을 걷다 ’WGXP’라는 낯선 브랜드의 청바지 매장을 발견했다. 엉덩이가 두툼한 바지가 있어 호기심에 살펴보니 납작한 엉덩이를 보정해주는 ‘패드’가 들어 있었다. 엉덩이를 ‘힙업’시키는 기능성 제품은 아니어도 착시 효과는 줄 수 있는 바지다. 평소 바지 맵시를 살리지 못하는 납작한 엉덩이가 고민이었던 박씨는 ‘쇼퍼홀릭’처럼 충동구매를 했다. “청바지 하나로 몸매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기 때문에 40만원이 넘는 돈이 아깝지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프리미엄진 바람은 도·소매 상가들이 모인 서울 동대문시장에도 불었다. 동대문운동장 두타 지하 매장에는 프리미엄진 편집 매장이 두 개다. 한 매장의 직원은 “엉덩이에 날개 모양의 자수가 놓인 로빈스진이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라며 블랙진을 권했다. 굵은 실의 스티치가 돋보이는 트루릴리전은 유행 없이 매년 판매 1위란다.

고가의 명품이 인기면 저가의 짝퉁이 없을 리 없다. 도매상가인 서울 평화시장을 둘러보니 드문드문 트루릴리전의 고유 디자인을 흉내낸 디자인의 청바지가 눈에 띈다. 두타 맞은쪽에 생긴 노점상 사이에선 프리미엄진 짝퉁 바지가 7만원대 미만으로 판매 중이다. 허드슨진과 페이지 프리미엄 데님을 수입하는 CKD 리빙의 박원규 팀장은 “공식 유통수입사들이 걱정하는 건 짝퉁 디자인보다 직거래를 하는 해외 구매 대행 사이트”라고 말했다. 스스로 입을 용도로 옷을 사오는 자가 소비자와 달리 정식 수입사는 통관 때 의류에 붙는 13%의 세금과 부가세를 내야 한다. 구매 대행 사이트는 자가 소비 형식으로 직거래를 하기 때문에 세금을 피할 수 있어, 판매가는 그만큼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노점 중심으로 짝퉁 상품들도 넘쳐

남성성을 드러내는 거친 작업복이었고 청춘의 상징이었던 청바지는 더 이상 편하고 만만한 옷이 아니었다. 찢어지고 색이 바랜 빈티지 청바지의 유행 속에서 브랜드의 가치로 자신을 평가받으려는 이들이 오리지널 브랜드를 판매하는 백화점으로, 또는 짝퉁을 판매하는 시장으로 몰려가고 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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