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표지이야기 > 표지이야기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7년08월23일 제674호
공정무역은 아직도 배고프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네팔의 작업장들…‘민주적 노동자’ 탄생까지는 갈 길 멀어

▣ 카트만두(네팔)=박수진 기자jin21@hani.co.kr
▣ 사진 여성환경연대

컴컴하고 뜨거웠다. 시멘트 외벽의 허름한 염색 작업장은 33㎡(10평)가 크게 넘지 않아 보였다.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7월27일 오전 10시30분,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시내인 기안쇼어에 위치한 ‘마누시’ 공장에선 네 명의 여성이 큼직한 두 개의 대야에 천 조각을 담갔다 빼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매캐한 염색약품 냄새와 수증기의 더운 열기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가슴이 빡빡하고 아프다”


10년째 마누시에서 염색일을 하는 락스미 푸투와르(24)는 “선풍기가 없어 여름에는 너무 덥고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천장에는 환기를 위한 팬 하나가 천천히 돌고 있다. 락스미는 “연기랑 염색약품 냄새 때문에 집에 돌아갈 때면 가슴이 빡빡하고 아프다”고 말했다. 화학약품에 오염된 물은 그대로 하수구로 흘러들고 있었다. 이곳은 네팔의 대표적인 공정무역 업체로 꼽히는 마누시의 작업장이다.

‘공정무역’(fair trade)이라는 개념이 서구 사회에 등장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가 호황에 접어들기 시작한 1950년대였다. 이어 1980년대 후반, ‘옥스팜’과 ‘텐 사우전드 빌리지’ 같은 시민단체들이 제3세계의 정치적 민주화를 지원하기 위해 공정무역에 뛰어들면서, 그 흐름이 대중화됐다. 1996년 미국의 월간 <라이프>는 ‘어젯밤 당신이 150달러를 주고 샀을지도 모르는 나이키 신발을 만든 사람이 12살 된 파키스탄 어린아이며, 그 아이가 하루에 받는 돈이 고작 2달러에 불과하다’고 고발해 서구인들에게 깊은 충격을 던졌다. <공정한 무역, 가능한 일인가>의 저자 데이비드 랜섬은 “공정무역의 최대 관심사는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기존의 무역은 사람이 없는 무역이지만, 공정무역은 그들의 힘겨운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것이다.”

서구의 관심에 견주면 늦은 감이 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공정무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지금도 두레생협, 아름다운가게 등의 온라인·오프라인 매장과 ‘에코페어트레이드’의 온라인 사이트 등을 찾으면, 공정한 방법을 통해 거래된 커피·직물·설탕 등을 만날 수 있다. 그 흐름이 앞으로 꾸준히 확대될 것이라는 평가도 많다.

우리가 손에 쥔 ‘공정한 제품’들은 공정무역의 이상에 맞게 생산되고, 유통되고, 판매되는 것일까? 그래서 공정무역은 제3세계에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한겨레21>이 여성환경연대와 함께 7월26일부터 8월2일까지 한국의 가장 큰 공정무역 파트너인 네팔을 찾았을 때 품었던 의문의 줄기다.

락스미가 일하는 마누시는 네팔의 대표적인 공정무역 업체로, 공장에서 일하는 30명의 ‘생산자’와 자기 마을에서 물건을 생산하는 300여 개의 지역 생산자 그룹이 만들어낸 수공예품, 펠트 제품, 은 제품 등을 공정무역을 통해 거래한다. 1년 총매출이 2173만루피(우리나라 돈으로 3억2500여만원)로 이 가운데 98%는 CTM·네팔리 바자로·텐 사우전드 빌리지·옥스팜 등 세계의 유명 공정무역 업체를 통해 수출한다. 파드마사나 샤키아 마누시 시장은 네팔 공정무역 연합체 FTG Nepal(Fair Trade Group Nepal)의 대표이기도 하다.


△ 7월29일, 마하구티가 운영하는 여성교육 공동체 ‘아시람’에서 20여 명의 여성이 ‘봉제’ 수업을 받고 있다. 아시람은 2년의 교육기간 동안 옷감짜기, 봉제기술, 간단한 산수 등을 무료로 가르친다.

그러나 마누시에서 ‘공정무역’의 가치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공장에서 일한 락스미는 “이제 염색 대신 바느질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락스미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동안 락스미가 겪은 변화는 처음에는 한 달에 300루피였던 월급이 올해 2350루피로 오른 것뿐이다. ‘홀치기 염색’을 하기 위해 원단에 실을 묶고 있던 4명의 여성 락스미, 미나, 모누라이, 사르수티는 다른 네팔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일 같은 일을 반복했다.

서구 시장주의에 편입되기 시작

네팔 공정무역 업체들의 작업장은 일반적인 제3세계 노동자들의 일터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네팔에서 23년째 공정무역을 해온 또 다른 업체 마하구티의 재봉 공장에서는 22명의 여성이 바쁜 손놀림으로 재봉틀을 돌리며 고양이 모양의 눈베개(아이필로)를 만들고 있었다. 크리스나 럭스미(24)는 이곳에서 일한 지 올해로 8년째다. 그는 마하구티에서 자신이 일한 만큼 월급을 받는다. 크리스나가 하루에 완성하는 눈베개는 5개 정도. 하나에 25루피니 하루 평균 125루피를 받는다. 그렇게 버는 돈이 한 달에 3천루피(4만5천원) 정도 된다. 그는 자신이 만든 눈베개가 얼마에 팔리는지, 눈베개를 사가는 사람은 누군지 알지 못했다. 동료들이 모여 작업 환경이나 작업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리도 없다고 했다. 공정무역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인 ‘민주적 노동자’와 ‘주체적 생산자’의 모습을 찾긴 힘들었다.

공정무역의 위기는 단순히 노동 조건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파드마사나 샤키아 마누시 사장은 “예전에는 네팔 전통의 천연염색이 주를 이뤘지만, 이제는 화학염색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구 소비자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마누시 매출의 65%는 화학염색을 선호하는 CTM·텐 사우전드 빌리지·옥스팜 등 서구 공정무역 업체들이다. 파드마사나 사장은 “일본 업체인 ‘네팔리 바자로’를 제외한 대부부의 서구 업체들이 물이 쉽게 빠지는 네팔의 전통 염색 기법보다 화학염색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서구 소비시장이 원하는 만큼의 수요를 감당해야 했던 네팔인들의 고육지책이기도 하다.


△ 마하구티는 네팔 고산지대 라스날로 마을 주민들이 만든 종이를 전량 수입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마땅한 판매처를 찾지 못해 수입이 없던 마을에 수입원이 생겼다.(사진/ 마하구티)

공정무역을 둘러싼 여러 논란은 공정무역이 이루려던 가치들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공정무역 제품들이 인기를 얻게 되면서 공정무역은 빠르게 서구 시장주의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공정무역이 보호하려던 네팔적인 것, 인도적인 것 혹은 볼리비아적인 가치들은 빠르게 붕괴되고 있거나, 애초부터 서구인들이 만들어 낸 허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정무역의 성공이 공정무역의 기반을 허무는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지방 덩어리 아이스크림에 녹차 가루를 뿌리면 모두 웰빙 아이스크림으로 돌변하듯, ‘공정무역’이라는 ‘라벨’은 남용되고 있었다. 마하구티의 경우, ‘직접 고용한 노동자’(in-house producer)들이 만든 제품과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90여 개의 ‘생산자 그룹’이 만들어낸 제품 모두를 ‘공정무역’을 통해 거래한다. 마하구티는 직접 고용한 노동자들에게는 의료 수당이나 보너스 지급, 정부 지정 최저임금 보장을 스스로 체크하지만 나머지 90여 개의 생산자그룹에까지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는지는 확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정무역이 지금껏 이룬 성과 전체를 허상이라 말할 순 없다. 공정무역은 국민 1인당 연간 소득이 270달러에 불과한 히말라야 고산지대의 이 작은 나라에서 변화의 싹을 키우고 있었다. 수닐 치트라카 마하구티 대표는 지난 2월 유엔개발계획(UNDP) 프로그램을 통해 네팔 동부 지리 지방의 작은 마을 라스날로에 갔다. 이곳은 카트만두에서 차로 6시간을 간 뒤, 차가 들어갈 수 있는 산길을 따라 다시 4시간을 걸어야 들어갈 수 있는 오지다. 전통적으로 종이를 생산하는 마을이지만, 판매처를 찾지 못해 주민들은 마땅한 수입원이 없었다. 마하구티는 이 마을에서 생산된 종이 10t 전량을 매년 사들이기로 했다. 또 마을 사람들이 다음해까지 먹고살 수 있도록 20만루피를 선지급했다.

수닐은 “네팔인들, 특히 여성들은 일자리가 굉장히 부족하다.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그들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하구티가 고용한 노동자들에게는 1년에 한 번 보너스가 나가기 때문에 1년에 13달치 월급을 지급하고, 의료수당도 지급한다”며 “네팔에서는 웬만한 기업들 중 의료수당을 제공하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동네에 여섯 집마다 NGO가 있다?

유니셰프와 유네스코가 2004년 공동으로 조사한 네팔 어린이들의 교육 상황을 보면, 전체 여자 아이들의 70%, 남자 아이들의 60%가 초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때문에 일본의 공정무역 단체 네팔리 바자로는 공정무역으로 발생한 수입의 일정 부분을 네팔 차 공정무역 대표 업체 ‘KTE’의 차를 생산하는 마을에서 아동교육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2001년 시작된 이 장학 프로그램으로 학교에 간 아이들은 지난해까지 모두 172명이다. 또 마하구티는 매년 수익의 40%를 ‘아시람’이라 부르는 여성 교육 공동체의 운영 비용으로 사용한다. 아시람은 적절한 교육 기회를 갖지 못한 여성들에게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무료로 제공하며, 옷감짜기, 봉제 기술, 간단한 산수 등을 가르친다. 공정무역의 구체적인 성과들이다. 서구에서 개발되고 발전한 ‘공정무역’이 내세운 가치인 ‘일하는 사람들의 자기 발전’이나 ‘생산자들의 민주적 조직’같은 담론의 기준에선 아쉬울지 몰라도 말이다.


△ 아시람에서는 아이들이 있는 여성도 마음 놓고 올 수 있도록 아이들 교육도 무료로 지원한다.

어느 사회나 그렇듯,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때론 냉혹하고 현실적이다. 공정무역의 최대 수혜자는 네팔의 노동자들이 아닌, 공정무역 업체들이다. 마하구티·마누시 같은 공정무역 업체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비영리·비정부 기구”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영리기구라고 하기엔 이들 조직은 사장-노동자 사이의 위계질서가 확연했고, 그에 따라 일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을 ‘고용된 이’라고 생각했다. 마누시가 밝힌 직원들의 급여는 의료수당 100루피, 교통비 750루피 등을 포함해 3150루피부터 5천루피지만, 사장인 파드마사나 샤키아의 월 급여는 2만1600루피였다.

그 자연스런 결과겠지만 네팔 대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직장은 정부 관료나 NGO(비정부기관·시민단체) 활동가가 되는 길이다. 무역업을 하는 아짓 아차리아(27·고아원 운영)도 “네팔에서는 동네에 여섯 집마다 NGO가 있다고 할 정도로 NGO들이 많이 있는데, 일단 NGO를 설립하고 나면 다들 차도 바꾸고 금방 부자가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UNDP 등 외국 원조 자금이 모두 NGO를 통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업체들의 물건을 주로 운반하는 한 화물 운송업체 사장은 “모든 공정무역 업체가 마냥 투명하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공정무역 업체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사장은 “얼마 전 공정무역업체와 거래하는 한 회사에서 노동자가 월급을 더 달라고 말했다가 해고된 사례가 있는데, 이 사정이 미국 공정무역 단체에 알려져 이들의 도움으로 노동자들의 이름으로 새로운 회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라며 “한국에서 공정무역을 하는 업체가 네팔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참고할 만한 좋은 사례가 된다”라고 말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지난 6월 공정무역 가게를 열고 네팔에 물건을 사러 왔다는 릴리(28)는 “네팔의 공정무역이 완벽하게 깨끗한 것 같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네팔의 공정무역은 마누시·마하구티 등 14개 단체가 등록된 ‘FTG Nepal’(Fair Trade Group Nepal)을 통한 공정무역과, FTG Nepal에 등록하지는 않았지만 네팔리 바자로나 옥스팜 등 다른 공정무역 업체들이 직접 개발한 지역 생산자 그룹들이 하는 공정무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는 “FTG Nepal이 거의 모든 네팔의 공정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것 같고, 나름대로 기업화돼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존 자유무역과 견줘볼 때 최고(best)는 아니지만 최선(better)이라고 보는 거죠.”

최고가 아니지만 최선

강희영 여성환경연대 기획홍보실장은 몇 해 전 공정무역을 통해 필리핀 민다나우 지방 아이들이 만든 팔찌를 만났던 일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팔찌 크기나 모양이 하나도 같은 게 없더라고요. 그 팔찌들을 만든 아이들이 제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물건들을 제값을 주고 산다, 그런 게 공정무역의 가치인 거죠.” 그것은 맥도널드의 햄버거나 최고급 페라가모 핸드백이 도달할 수 없는 상품을 통한 생산자와 소비자의 연대 맺기의 즐거움일지도 모른다. 이미영 여성환경연대 사무처장은 “그 연대를 위해 한국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또 네팔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많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공정무역을 지지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기꺼이 “예”라고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것은 사람 사이의 연대가 단순한 상행위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보람 있는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터치네이처’가 일군 작은 변화

싱글맘에 고용 우선권, 전통 종이를 포장지로


‘터치네이처’에 들어서자마자 아이들이 옹알대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구 바로 옆, 녹색 벽지의 작은 방에서 대여섯 살 먹은 꼬마부터 한두 살배기까지 12명의 아이들이 아기새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터치네이처는 농장에서 직접 키운 유기농 허브를 이용해 손으로 만든 비누, 아로마 오일 등을 판매하는 공정무역 업체다. FTG Nepal 회원단체는 아니지만 프랑스, 스위스 등 유럽의 공정무역 업체와 주로 거래한다.

터치네이처의 특이점은 ‘싱글맘 우선권’이다. 조세핀 탄 터치네이처 사장(사진)은 “직원을 뽑을 때 싱글맘이면 우선권을 준다”라고 말했다. 현재 직원 100명 중 60명이 남편이나 가족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이다. 탁아시설은 물론이고 싱글맘의 경우 아이들 학비도 100% 지원한다.

탄 사장은 사실 싱가포르 사람이다. 싱가포르에서 사업을 하던 그는 1996년 봉사활동차 네팔에 왔다. 싱글맘들이 바느질을 배우는 학교에 자금을 지원하러 왔다가, 이들이 만든 수공예품을 친구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돕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무역을 통해 네팔 여성들의 삶을 새롭게 만들어보고 싶었다.” 이듬해인 1997년 아예 네팔로 건너와 수공예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레인보우 크래프트’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수공예품 회사는 이미 많은데다 중국, 베트남산 제품에 밀려 판매가 원활하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유기농 비누다. 부엌이 있고, 여성들이 조금만 교육을 받으면 만들 수 있는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상한 터치네이처는 2001년 35명의 직원에서 출발해 지금은 100명이 일하는 기업으로 커졌다. 성장세도 꾸준한 편이다.

직원이 늘어난 게 꼭 매출 덕만은 아니다. 탄 사장은 가능하면 많은 일자리를 만들려고 한다. 외부에 맡긴 포장 업무도 지난해부터 직접 하고 있다. 2층 포장실에서 여성 9명이 비누 닦기, 랩 싸기, 테이프·스티커 붙이기 등의 작업을 나눠서 한다. “9~10명 수준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우스울 수도 있지만, 이렇게 일을 해서 매달 2천~3천루피를 벌면 삶이 한결 나아진다.” 내친김에 선물용 포장 용기도 직접 만든다.

네팔은 예로부터 종이 산업이 유명하다. 마을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종이를 만들고 있지만 이 종이를 이용하거나 팔 곳이 마땅치 않았다. “네팔에서 유명한 락타 종이를 이용해 포장 상자를 직접 만드는 거죠.” ‘공정무역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일궈낸 변화의 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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