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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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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싸늘하면 호빵이 그리웁구나

등록 2005-11-30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찐빵의 아성을 무너뜨렸던 구멍가게의 샛별도 35년 세월 따라 진화
꽈배기호빵·치즈롤호빵 넘어 가곡 틀어 반죽 숙성시킨 리듬발효호빵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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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윤형 기자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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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1971년에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 박정희-김대중이 치열하게 맞붙었던 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1400년의 긴 잠을 깨고 무령왕릉이 세상에 나왔으며 강남 개발의 광풍 속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경기도 광주 주민들의 폭동이 이어졌다. 젊은이들은 미니스커트와 나팔바지를 즐겨 입었고, 대학생들은 교련 교육 확대에 반대한 대가로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는데, 이듬해 유신은 소리소문 없이 닥쳐와 자유를 바라던 시민들의 멱통을 움켜줬다. 호빵이 처음 시장에 나온 것은 서릿발 칼날지게 매서웠던 그해 가을(10월)의 일이다.

지규설(71) SPC(삼립식품의 모그룹) 고문은 “그때 호빵 개발을 위해 돌아가신 허창성 삼립식품 명예회장께서 큰 고생을 했다”고 말했다. 허 명예회장은 1945년 서울 을지로에서 제과점 상미당의 문을 연 뒤, 50년 동안 빵 만들기 외길을 걸어온 빵의 장인이다. 그는 1949년 연료비를 이전의 10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는 무연탄 가마를 개발해 공장빵 시대의 문을 열었고, 1964년 크림빵을 대히트시키며 한국 빵 산업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작가 홍하상씨가 지난해 쓴 <개성상인>을 보면 “초기에 그(허 명예회장)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빵집 주인이었지만, 1964년 삼립빵을 만들면서 이른바 빵 대량생산의 시초를 열었다”고 적고 있다. 경기도 안산 삼립식품 공장에 들어서면 2003년 숨을 거둔 그의 흉상을 볼 수 있다.

1964년 크림빵의 성공 이후 허 명예회장은 일본으로 건너간다. 후속 신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때 일본은 도쿄올림픽(1964)의 성공적인 개최로 비약적인 경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자연히 먹을거리도 많았다. 당시 일본 빵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은 것은 가게에서 따뜻하게 데워 팔던 찐빵이었다. 허 명예회장은 1969년 귀국하자마자 직속 연구팀을 꾸린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제빵 업체들은 거리의 작은 분식집에서 직접 만들어 팔던 ‘손’찐빵의 아성을 무너뜨리지 못했다. 공장 빵은 데워 먹는 게 불가능한데다, 비닐로 포장돼 인공적인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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찜통이 난제… 산속에 들어가 연구하다

허 명예회장은 태스크포스 팀을 이끌고 산속으로 들어갔다. 1년 동안 군대 보안초소 같은 철통 경비 속에서 신제품 개발이 이뤄졌다. 그가 개발하려 했던 것은 ‘대량생산된 찐빵을 소비자들에게 따뜻하게 덥혀 팔 수 있는 (독자적인) 기술’이었다.

이는 찐빵뿐 아니라 찐빵을 소매점에서 데워주는 찜통의 개발을 의미했다. 장종원(52) 삼립식품 생산과장은 “호빵 개발 과정은 회사 안에서 아직까지 전설로 회자된다”고 말했다. “선배들에게 그때 밤잠 설치면서 고생 많이 했다는 얘길 들었죠. 오븐에서도 쪄보고, 가마솥에서도 화로에서도 쪄보고 별짓을 다 했다고 합니다. 찜통 개발은 더 어려웠습니다. 빵을 다시 덥혔을 때 처음 찜통에서 나온 것과 같은 식감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거든요.” 생명은 수분 유지였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찜통은 수분이 쉽게 날아가지 못하도록 문이 없는 원통형 모양으로 제작됐다. 호빵을 꺼내려면 일단 밖의 문을 열고, 원통을 위로 들어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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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이 히트시킨 광고의 역사 35년

1년 동안의 노심초사 끝에 1970년 12월2일에 제품 개발이 끝났다. 제품의 이름은 따뜻한 찐빵을 호호 불며 먹는다는 의미로 ‘호빵’으로 붙여졌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크기는 지름 10cm에 무게 108g. 이 크기는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시판은 이듬해 10월에 시작됐다. 그해 삼립식품이 내놓은 잡지 광고를 보면, 새 제품에 대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삼립식품에서는 삼립호∼빵을 새로히 개발했읍니다. (중략) 본 제품은 특수 열처리와 천연 원료로 제조되었기 때문에 잡수실 때 3분 동안 데우시거나 따끈하게 쪄서 드시면 그 맛이 한결 좋아지며 독특한 맛을 느끼실 수 있읍니다.”

호빵은 대박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빵값은 5원이었지만, 호빵의 가격은 이보다 4배나 비싼 20원이었다. 그런데도 빵 판매원들은 서로 호빵을 받아가려고 공장 앞에 길게 줄을 섰다. 택시 기본요금은 90원, 쌀 한가마는 1만원, 파고다 담배 한 갑은 50원이던 시절이었다. “성수기에는 물건이 없어서 하루 18시간씩 일해야 했습니다. 가리봉동 시절 호빵 라인은 정말 정신없이 돌아갔죠.” 지 고문이 말했다. 호빵을 덥히는 찜기의 에너지 공급원은 당연히 연탄이었는데, 초반에는 소매점에서 연탄 불을 자주 꺼트려 회사의 애를 먹였다고 한다. 호빵의 최대 출고 기록은 하루 160만 개다.

호빵의 35년 역사는 호빵이 히트시킨 광고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5년 10월1일 제일기획이 제작한 흑백TV 광고를 보면 눈 내리는 스튜디오에서 5명의 남녀가 호빵 찜기 5개를 놓고 “호호호 호호빵, 따스한 삼립빵, 호호호호 즐거워라”며 노래를 부른다. 이후 지금까지 광고계에서 명CM송으로 회자되는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면, 따스하던 삼립호빵 몹시도 그리웁구나”란 가수 김도향씨의 노래가 등장했다. 이 노래는 1978년 2월 동아방송 대상과 문화방송 광고대상에서 특별상인 노래 광고상을 받았고, 호빵의 대중화에도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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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권불십년이라고 했던가. 경제가 발전하고 사람들의 입맛이 고급화되면서 80년대 이후 호빵 매출은 정체돼왔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제과점에서 직접 구워 파는 고급 빵과 ‘롯데리아’로 대표되는 햄버거, 피자 등의 패스트푸드였다.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삼립은 1993년 광고에 청춘스타 최수종씨를 등장시켜 당시 23살로 호빵과 동갑이던 그의 부인 하희라씨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변신을 꾀한다. ‘올드’하고 시대에 뒤처진 듯한 느낌의 호빵 이미지를 세련된 것으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스물세 살. 주위의 사랑을 듬뿍 받았죠. 동그랗고 하얀 얼굴도 좋았지만, 따끈따끈한 속마음에 완전히 반했습니다”는 광고 카피가 다소 유치한 듯하지만 어찌됐든 호빵은 한 해 전에 견줘 매출을 70%나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그로부터 2년 뒤에 따뜻한 호빵을 그리워하듯 상념에 잠긴 백곰과 펭귄을 출연시킨 광고도 대박을 터뜨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변하고, 그에 따라 호빵도 변해왔다. 한때 동네 구멍가게나 슈퍼마켓에서 70%가 팔리던 호빵은 이제 할인점의 5개들이 포장이 가장 인기다. 할인점 구입이 60%이고, 편의점에서도 10%가량 팔린다. 요즘엔 웬만한 구멍가게에선 호빵 찜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빠르게 변해가는 사람들의 입맛을 잡기 위해 호빵은 진화를 거듭해왔지만, 나이든 30~40대에겐 그 변화가 어지럽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가곡 틀면 반죽이 부드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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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2일 <한겨레21>이 찾은 경기 안산 삽립식품 공장에서는 웰빙 트렌드에 맞게 반죽에 호밀이 많이 들어간 ‘호밀호빵’이 라인을 타고 쏟아지고 있었다. 호빵의 진화는 ‘호밀호빵’ ‘녹차호빵’ ‘단호박호빵’ ‘고구마호빵’ 등을 넘어 ‘피자호빵’ ‘햄치즈호빵’을 선보이는 데 이르렀다. 그러나 ‘꽈배기호빵’이나 ‘치즈롤호빵’에 이르면 이것을 더 이상 호빵이라고 불러야 할지 곤혹스러워진다. 1999년 한 호빵 제조회사에서는 호빵 반죽을 숙성시킬 때 가곡·클래식 음악을 틀면서 만든 ‘리듬발효호빵’을 내놓기도 했다. 음악은 전문가들의 논평을 참고해 ‘분노와 욕구불만을 해소한다’는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긴장과 흥분을 가라앉힌다’는 바흐의 <g>, ‘공해와 오염으로부터 상쾌함을 준다’는 비발디의 <사계>를 골랐다고 한다. 업체 쪽에선 그렇게 만든 호빵이 냄새가 더 향긋하고 부드럽다는 의견을 냈지만, 정말 그런지 확인할 도리는 없다.
처음 호빵이 나왔을 때 가격은 20원이었고, 지금 소매점에서 낱개로 사먹으려면 500원이다. 속에 피자나 고기 등의 고급 재료가 들어간 호빵을 먹으려면 무려(!) 1천원을 내야 한다. 호빵이 50원에서 100원으로 올랐을 때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 가격 변화 추이를 물었더니 회사 쪽에서는 “옛날 기록이라 확인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아마 1983년이 아니었나 싶다. 지난해 샤니·삼립식품·기린·서울 호빵 등 업계 빅 4의 호빵 매출액은 470억원, 총 판매량은 4천만개였다. 호빵이 피자·햄버거·스파게티보다 인기 있는 식품이라고 부르기는 힘들겠지만, 여전히 한국 사람들은 지난해 겨울 잊지 않고 호빵 한 개씩을 먹었다.
아마도 호빵이 민주주의를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빵은 유신 독재를 타도하지도 않았고, 광주의 억울한 죽음에 저항하지도 않았으며, 1987년 뜨겁던 여름과 함께하지도 않았다. 1970년 정부는 그해를 ‘부정 식품 근절의 해’로 정했다. 사회에는 표백제가 가득 든 알사탕, 군화로 만든 고기, 폐유가 든 참기름, 비소와 모래가 들어간 두부, 아교를 넣은 비스킷, 하이타이를 넣은 맥주가 떠돌았다. 그 시절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따뜻한 빵이 나왔다는 것은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대통령 직선제보다 큰 위안이 됐을 것이다. 호빵 나이 올해로 서른다섯. 찬바람이 싸늘하게 두 뺨을 스치는데, 따스하던 삼립호빵이 몹시도 그리웁다.

<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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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간식임을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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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6633cc">[인터뷰/ 삼립식품 장종윤 생산과장]</font>

대형마트에서는 제값 받고 팔 수 없어 마진 점점 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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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윤(52) 삼립식품 생산과장은 1979년 3월12일 회사에 입사했다. 처음 빵 공장에 들어섰을 때 그는 26살의 청년이었다. 그 뒤 26년 동안 현장에서 빵을 만들어온 그는 이제 삼립식품 호빵 생산라인의 총책임자다. 그는 “평생 좋은 빵을 만들어 사람들의 허기를 달랬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font color="008080"> 처음 호빵이 나왔을 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데.</font>

=그때는 입사하기 전이다. 선배들에게서 소비자들의 선호가 엄청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입사할 때는 서울 가리봉동에 공장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서로 빵을 받아가려고 싸움도 자주 벌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자루로 긁어담을 만큼 돈을 많이 벌었다. 그때는 화장실이 공장 밖에 있었는데, 화장실에 갈 때면 호빵을 두 개씩 들고 나와 나갈 때 하나 먹고 들어올 때 하나 먹고 하던 기억이 난다.
<font color="008080"> 호빵 말고도 히트 상품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font>

=1964년에 나온 크림빵이 대표적이다. 비스킷을 만드는 절단기로 만들었는데, 생산라인을 24시간 풀 가동해도 공급이 부족했다고 한다. 1974년에는 길거리 호떡을 대량생산한 ‘호이호이’가 선을 보였다. 1975년에 70개들이 1만2천 상자가 나갔다. 1976년에 나온 ‘보름달’ 빵과 1992년 상품인 ‘누네띠네’도 손꼽히는 히트 상품이다. 돌아가신 명예회장님이 빵에 정통한 분이었다. 새 상품은 대부분 그분의 아이디어였다.
<font color="008080"> 호빵에 대한 소비자들의 소비 형태가 변하고 있다.</font>

=생산 현장에서도 그런 변화를 느낀다. 처음에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낱개로 많이 나갔지만, 지금은 할인점 등 대형마트에서 포장 상품으로 많이 나간다. 구멍가게에 설치하던 찜기도 많이 줄었다. 대형마트로는 제값을 받고 물건을 팔 수 없어서 회사의 마진이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또 호빵을 대체할 만한 간식이 늘어나 성장세가 다소 주춤해졌다.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려고 애쓰고 있다. 우리 회사 사람들 다 마찬가지겠지만 전 국민의 간식인 호빵을 만든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도 여기서 일을 하면서 결혼했고, 집을 샀고, 아이들 대학까지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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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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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4" color="#216B9C">
한 시간이면 빵빵해져요</font>

9월 중순부터 이듬해 4월까지 생산라인 가동… 28℃가 가장 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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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제조 과정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먼저 배합기에서 빵에 들어가는 밀가루 등의 재료를 한데 뒤섞는다. 호빵의 보드라운 속살의 비밀인 반죽이 배합기를 빠져나올 때 온도는 22℃. 완성된 반죽은 둥글게 호빵의 모양을 잡고 빵 안에 단팥·야채 등 속 내용물을 집어넣는 성형기로 옮겨진다. 성형기 한 대가 1분에 뽑아낼 수 있는 호빵은 40개. 성형기 한 대를 하루 종일 돌리면 5만7600개의 호빵이 나오는 셈이다. 호빵 생산라인에 설치된 성형기는 모두 20대인데, <한겨레21>이 공장을 찾은 11월22일에는 16개의 기계가 작동 중이었다. 성형기를 갓 빠져나온 호빵은 잘 익은 찹쌀떡처럼 생겼다.
성형기를 빠져나와 둥글게 모양이 잡힌 호빵은 12개(가로 4개, 세로 3개)가 한 묶음이 돼 발효실에 들어간다. 이때 호빵을 먹을 때 떼어내야 하는 종이를 밑에 깐다. 발효실 내부온도는 38℃, 습도는 65%. 호빵은 이곳에서 45분 동안 숙성 과정을 거친다. 발효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찹쌀떡 모양이었던 호빵은 벌써부터 먹음직스럽게 살짝 부풀어 있다. 성수기를 맞아 발효기 7대는 쉼없이 호빵을 토해내고 있다.
발효기를 통과한 호빵은 지체 없이 호빵을 익히는 찜기로 향하는데, 익히는 시간은 단팥 호빵의 경우 99℃ 온도에서 12분, 야채나 피자 호빵은 그보다 1분 많은 13분이다. 이후 빵은 90분 동안 냉각 과정을 거쳐 포장된다. 빵을 온도계로 찔러봤을 때 28℃가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호빵 생산 라인이 돌아가는 것은 9월 중순에서부터 이듬해 4월까지다. 회사 관계자는 “처음 허창성 명예회장이 호빵을 개발했던 그 방법대로 지금도 빵을 만든다”고 말했다. 반죽에서 완제품이 생산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1시간 남짓이다. 찜기에서 갓 빠져나온 호빵을 하나 손에 집었더니 따뜻한 빵의 느낌이 손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맛은? 직접 드셔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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