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들이 노조 꾸리고 신문 만드는 노인 주권시대의 풍경들
본 궤도 오르려면 NGO간 연대하며 리더십과 재원 확보해야
▣ 이혜온 인턴기자 eon2222@hanmail.net
“2019년 7월22일, 한겨레 DMB 뉴스입니다. 65살 이상 인구 비중이 14.4%를 넘어 한국이 본격적인 고령 사회에 진입했습니다. 오늘 저녁 7시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서는 ‘고령사회 진입 기념 경로 한마당’이 열리기로 했지만, 60대 이상 노인 500여명이 행사를 저지한 채 촛불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들은 ‘경로잔치 대신 일자리를’ ‘1인1연금 현실화하라’ ‘노인 복지 예산 2% 확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정부의 노인정책을 비판했습니다. 경로 한마당에 참석하려고 공원을 찾은 노인들도 시위에 동참하면서 경찰이 과격 시위에 대비하기도 했습니다.”
울산 경비노조에 민주노총도 당황하다
14년 뒤에는 이런 뉴스가 현실화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노인들을 복지정책의 ‘수혜 대상’으로 생각하지만, 이미 노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나서고 있다.
지난 6월 울산에서는 평균 연령 65살인 경비원들로 구성된 ‘경비노조’가 출범했다. 경비직은 배달·주차관리·건물환경 관리·아동도우미 등과 함께 노인 취업의 대표 종목이자 최고 인기 직종으로 꼽힌다. 그렇지만 이들의 노동 조건은 비정규직 가운데서도 가장 열악한 상황이다. 시교육청 산하 학교 경비로 일하는 이들은 토요일 오후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44시간 연속 근무를 비롯해 한달 평균 539시간을 일하면서도 법정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는다. 학교가 경비업체에 용역을 주고, 경비업체는 또 인력파견업체에 재용역을 주는, 3단계 간접고용 구조가 노동 조건을 악화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면서 모인 30여명의 노인들이 식당에 모여 노조를 만들기로 뜻을 모은 이래, 2주일 만에 60명이 조직됐다. 처음에는 울산 민주노총에서도 “괜히 노조 만들었다가 잘못되면 더 힘드시다. 괜찮으시겠느냐”면서 당황했다고 한다. 심의광(66) 위원장은 노조 사무실을 찾아 “나이가 많다고 그냥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거듭 주장해 민주노총 활동가들을 감동시켰다. 노조 결성 이후 파업투표 가결, 시위 등을 진행한 노인 조합원들은 8월 중순 교육청과의 추가 협상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노인의 시각으로 노인에게 필요한 신문을 만들자’고 나선 이들도 있다. 지난 7월1일 일산에서는 <실버타임즈> 46호가 발행됐다. 2000년 11월 ‘전국 노인의 대변자로서, 노인사회 참여 길잡이로서, 그 역할과 기능을 다한다’는 기치로 창간된 지 벌써 5년째다. <실버타임즈>는 여느 노인신문들과는 달리 노인들이 직접 기획·제작한 신문이다. 일산노인종합복지관에서 만나 신문 창간의 뜻을 모은 이들은 전직 소설가·성우·교사 출신 60~70대 노인 11명. 이들은 고양시에 신문 창간을 건의했고, 시에서는 1만부의 발간 비용을 지원했다. <실버타임즈>는 전국 대학의 사회복지학과, 복지관, 지자체 등에 배포된다. 한달에 한번 8면으로 발행되는 이 신문은 복지 문제를 비롯해 시사 현안, 만평, 생활정보, 인터뷰 등으로 채워진다. 편집국장 이순원(67)씨는 “노인을 사회 부적응자 정도로 간주하는 다른 매체들은 노인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면서 “노인만의 신문을 만들겠다는 뜻으로 신문 발간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중요한 인터뷰 내용을 실수로 지워버려 당황하기도 하고, ‘왕년의 인기배우’ 엄앵란씨 인터뷰를 할 때에는 가슴이 떨리기도 하고, 마감 전주에는 밤샘작업을 하기도 하는 그는 영락없는 기자다. 그는 “무보수 활동이 힘들 때도 있지만, ‘노인 얘기를 해주는 신문을 보니 반갑고 용기가 난다’는 주변의 반응을 접할 때 신문 만들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정치권은 선거 때만 노인 공경 하나"
이종숙(57)씨는 38명의 노인기자단이 꾸려가는 인터넷 신문 ‘실버넷뉴스’(silvernews.or.kr) 기자다. 이씨는 기자가 되기까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다. 6개월에 걸친 실기교육을 이수하고 3번에 걸쳐 수습 기사를 낸 끝에 기자가 된 이씨는 ‘노인들이 KTX 기차 도착역 안내 알아보기 쉽지 않다’ ‘실버취업박람회의 문제점’ 등의 기사를 썼다. 이씨는 “노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젊은 기자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부분도 보인다”며 “앞으로 불우 노인들의 기사를 더 많이 쓰고 싶다”고 말했다.
2000년에 이미 65살 이상 인구 비율이 7%를 넘은 우리 사회에서 노인들의 주체적 권리 찾기는 이제 걸음마 단계다. ‘할아버지 노조’와 ‘노인 기자’는 여전히 ‘이색 사례’일 뿐이다. 노인 취업이 꾸준히 늘고 있지만, 생색내기에 그치는 측면이 많다. 서울시 취업알선센터에 따르면 취업 교육을 마친 노인 가운데 절반 정도만이 일자리를 구하는 데 성공한다. 그나마 70살 이상은 취업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노인들은 적은 임금을 받더라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고맙게 생각하는 경향이 높다. 노인권익 단체들의 활동도 여전히 부족하다. 현재 전국 규모의 노인단체로는 △대한노인회 △21세기 실버포럼 △노년유권자연맹 △노인의 전화 △한국은퇴자협회 등이 있지만, 본격적인 노인권익 운동을 벌이는 단체는 드물다.
“선거 때만 노인들을 공경한다”는 비난을 사고 있는 정치권 역시 노인들의 일상적 권리찾기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당규에 따라 지난 5월 노인위원회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뽑고 8월 말 이후에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선진규 위원장은 “65살 이상 기간당원이 2만여명이며 8월 말 이후 노인정책 개발에 주력하겠다”고 밝혔지만, 정작 노인 당원들은 불만이 많다. 스스로를 ‘열성당원’이라고 소개한 정정섭(69)씨는 “중앙위원회에서 위원장을 선출하는 바람에 아래로부터 분출되는 노인 당원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힘든 구조가 됐다”면서 “노인 당원의 참여를 위해서는 직접 발로 뛰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꼬집었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노인위원회의 필요성에 대해 원칙적인 공감을 보였지만,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다. 최은희 정책연구원은 “민주노동당은 상대적으로 노인 기반이 약해 위원회를 꾸리지 못하고 있다”면서 “현재로서는 정책 연구 중심”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개별 입법 차원에서 노인복지청 신설안 등 법 개정 계획만 내놓고 있다.
미국은 3600만명이 은퇴자협회 회원
강병만 ‘노인의 전화’ 사무국장은 노인권익 운동이 본 궤도에 오르지 못한 것과 관련해 “돌출 행동을 하면 정을 맞았던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현 노인 세대의 소극성 때문”이라며 “노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노인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은퇴자협회 주명룡 회장도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미국은 3600만명이 은퇴자협회 회원이다. 미국에 비해 우리 노인층은 참여 교육을 받은 적이 거의 없는 세대라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현재 40대 후반이 고령 인구로 편입되는 10~15년 뒤에는 노인층이 가장 강력한 파워집단이 될 것이다.” 조추용 교수(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사회복지학과)는 “노인권익 운동을 이끄는 노인 NGO 사이의 연대활동, 재원 확보, 강력한 지도자그룹의 확보 등이 노인권익 운동의 숙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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