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불결함과 난폭함의 상징에서 자유와 세련미의 상징으로… 남성성 강조하는 확실한 유행코드로 부상</font>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수염 기르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다모>에서 김민준이 수염을 기르고 나오면서 수염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불새>의 에릭,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소지섭이 수염을 기르면서 더욱 거세졌다. 에릭은 수염을 통해 아이돌 스타의 이미지를 벗었고, 소지섭도 꽃미남 배우에서 터프가이로 재탄생했다. 이처럼 수염은 꽃미남을 터프가이로 바꾸는 일등공신이었다. 오죽하면 “남자 배우, 뜨려면 지저분해져라”는 기사까지 나왔겠는가? 최근에는 정우성과 이정재도 광고에 수염을 기르고 등장했다. ‘더듬이춤’으로 인기를 누렸던 개그맨 리마리오도 짙은 콧수염과 턱수염으로 남자다운 느끼함을 과시했다. 해외 스타 중에도 수염으로 스타일을 살린 사람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 평범한 꽃미남이었던 데이비드 베컴은 수염을 기르면서 튀는 스타일리스트로 거듭났다. 브래드 피트도 수염이 잘 어울리는 대표적인 스타다. 과거 “지저분하고 빈티난다”는 이미지가 강했던 수염이 우리 사회에서도 확실한 유행코드로 떠올랐다. 굳이 홍익대 앞이나 압구정동이 아니어도 거리 어디에서나 수염족들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명절이 와도 사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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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 열풍이 불면서 온라인 동호회도 생겨났다. 다음 카페에는 ‘콧사모’ ‘수염매니아’ 등 10개가 넘는 수염 동호회가 개설돼 있다. 다른 포털사이트에도 수염 동호회 한두개쯤은 있게 마련이다. 수염 동호회는 수염족들의 친목을 도모하고, 수염에 대한 실용적인 정보를 알려준다. 동호회에 가입하면 수염을 잘 기르는 법에 대한 노하우도 배울 수 있다. 동호회 게시판에는 수염족이 겪게 되는 고충을 호소하는 글도 빠지지 않는다. 아직 수염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경조사 때면 수염족들의 고민은 심각해진다. 그래서 게시판에는 명절 때가 되면 “수염을 굳건히 지켜라” “차라리 큰집에 가지 마라”는 ‘지침’이 올라오기도 한다. 동호회 회원 중에는 여성도 적지 않다. 싸이월드의 수염 동호회, ‘디지-털’(디지게 멋진 털을 사랑하는 사람들·digi-tal.cyworld.com)의 회원 절반은 여성이다. 수염 난 남자를 좋아하거나 수염을 길렀던 남자친구를 잊지 못해 사이트를 찾는 회원들이다. 이처럼 남성뿐 아니라 여성들의 수염에 대한 호감도 높아지고 있다.
‘디지털’ 운영자인 한영석(30)씨는 턱수염과 콧수염을 멋있게 길렀다. 수염을 기른 지 벌써 3년째. 일본에 어학연수를 떠날 때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수염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그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본 일본 중년 아저씨의 수염에 매혹됐다. 그는 “나이 지긋한 중년 신사의 콧수염이 햇빛에 반짝이던 모습이 너무나 멋있었다”고 돌이켰다. 그때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해 지금은 수염에 ‘목숨 거는’ 사람이 됐다. 한씨가 자신에게 맞는 수염 스타일을 찾기 위해 실험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4mm 길이의 턱수염과 콧수염이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수염족들은 자신에게 맞는 수염 스타일을 찾기 위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 한씨는 매일 아침 수염을 다듬기 위해 1시간 동안 공을 들인다. 일단 수염 이발기로 가지런히 밀어주고, 필요 없는 털은 면도기로 깎아내고, 삐져나온 털은 가위로 다듬는다. 그는 “수염을 잘 기르려면 시간이 든다”며 “부지런하지 않으면 기를 수 없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헤어스타일에도 신경쓰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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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처음에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도 받았다. 아버지는 “차라리 머리를 길러라”고 만류했다. 탐탁지 않게 여기는 친구들도 있었다. 수염은 사업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씨는 지난 4월 김포에 아이스크림 체인점을 냈는데, 본사에서 “서비스업이니 수염을 깎아라”고 요구했다. 한씨는 “수염을 깎을 이유가 없다”며 버텼다. 아예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도 수염 동호회 회원을 썼다. 회사의 우려와 달리 반응은 반대였다. 남자 손님 중에는 슬쩍 수염을 어떻게 기르느냐고 묻기도 했다. 한씨는 “수염은 남자들만의 특권”이라며 “남자들에게는 수염을 기르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수염을 기르고 난 뒤 내가 더 남자다워지고 강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물론 아직 편견도 남아 있다. 어떤 손님은 “가게 직원들이 동남아 사람들인 줄 알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씨는 평생 수염을 기를 각오다. 나이가 들면 수염 스타일도 바꿀 생각이다. 그는 “머리가 희끗해지면 일본의 중년 신사처럼 콧수염만 기르고 싶다”고 말했다.
스타들이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수염에 대한 인식은 몇년 사이에 많이 바뀌었다. “지저분하고 빈티나 보인다”는 인식은 줄어들었고, 특별한 직업을 가진 사람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도 바뀌고 있다. 평범한 직장인 중에서도 수염을 기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다니는 장일준(30)씨도 수염을 기르고 있다. 그는 “원래 평범한 인상인데 수염을 기르고 난 뒤부터 강한 이미지를 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수염을 기른다고 회사에서 핀잔 주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장씨는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덤덤했다”고 말했다. 가족도 처음에는 “지저분해 보인다”고 말했지만, 요즘에는 “없는 것보다 낫다”고 이야기한다. 원래 수염숱이 많지 않고 듬성듬성한 편이었지만, 시간을 두고 기르다 보니 어느새 수염이 자리를 잡았다. 수염족 중에는 듬성듬성한 수염을 만회하기 위해, 아이브로펜슬로 수염 라인을 짙게 칠하는 사람도 있다. 최근에는 수염 관리를 위해 미용가위를 찾는 남성도 늘고 있다.
수염은 단순히 수염에 그치지 않는다. 스타일의 변화라는 후폭풍을 몰고 온다. 장씨는 “원래 6대4 가르마 스타일이었는데, 수염을 기르면서 헤어스타일에도 신경쓰게 됐다”고 말했다. 한때 장씨는 영화 <올드 보이>의 최민식 헤어스타일로 파마를 한 적도 있다. 수염을 기르면서 옷도 예전보다 과감하게 입게 됐다. 수염은 외모의 결점을 가려주고 스타일의 개성을 키워준다. 건축설계사인 김현종(28)씨는 때이른 탈모로 고민이 많았다. 머리가 자꾸 빠지자 아예 머리를 빡빡 밀어버렸다. 대신 수염을 길렀다. 김씨는 “사람들이 머리 대신 수염을 먼저 기억하게 돼 외모에 자신감이 생기게 됐다”고 말했다.
매끈한 턱은 획일성의 상징
몇년 전만 해도 외국인들은 묻곤 했다. 한국에는 왜 수염 기른 사람이 없느냐고. 모두 수염을 기르지 않는 것은 모두 무채색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이처럼 수염 없는 매끈한 턱은 ‘획일성’의 상징이었다. 한국에서 수염은 전근대의 상징이었다. 급격한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수염은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됐다. 수염을 기른 사람들은 뭔가 이상한 사람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수염은 불결함과 난폭함의 상징이 아니다. 스타일의 코드가 됐다. 수염은 이제 자유와 세련미를 상징한다. 기성세대에 대한 세련된 저항이자 남다른 개성의 표현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수염의 유행은 한국이 근대를 넘어서 포스트모던한 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징후로 해석되기도 한다.
최근 수염의 유행은 스타일의 남성화와 관련이 있다. 수염은 누가 뭐래도 남성성의 상징이다. <털: 수염과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본 체모의 문화사>(다니엘라 마이어, 클라우스 마이어 공저)는 수염을 힘과 성적 욕망, 섹시함의 코드로 꼽고 있다. 짧은 머리에 짧은 수염, 딱 붙는 티셔츠는 남성의 트렌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사회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수염 열풍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수염족들은 아직도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할 때가 있다. 디지털 동호회의 한영석씨는 “일본만 해도 수염을 기르건 말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며 “아예 수염에는 관심이 없는 사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table width="480" cellspacing="0" cellpadding="0" border="0"><tr><td colspan="5"></td></tr><tr><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bgcolor="F6f6f6" width="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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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을 놓고 진보와 보수를 가르다</font>
한달 가까이 기른 수염을 며칠 전 깎았다. 여동생 결혼식을 위한 양가 상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개길까’ 생각도 했지만, 막상 일이 닥치니 깎게 되었다. 상대 집안 어른들이 내 인상을 안 좋게 보는 것은 (사실이니까) 괜찮지만, 나 때문에 동생 이미지까지 안 좋아지는 건 심히 걱정됐다. 가족 중 어느 누구도 깎으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괜한 자기검열에 며칠을 고민했다. 버티고 버티다가 상견례 출발 5분 전, 수염을 면도기로 밀었다. 길어서 잘 깎이지도 않았다. 어느새 수염을 깎은 내 모습이 약간 낯설었다.
올 초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보기 싫은 ‘부위’에 난 수염만 깎고 그냥 기르는 방식이었다. 방치된 수염은 일주일이 지나니 부담스러워졌다. 수염을 다듬는 ‘조치’가 필요했다. 솔직히 귀찮았다. 마땅히 정보도 없었다. 다행히 짧은 수염이 유행이었다. 일주일쯤 되면 미련 없이 깎았다. 나의 게으름을 눈치챈 듯 여자후배가 물었다. “선배, 수염 기르는 거예요, 안 깎는 거예요?” 기르는 것이라 우기고 싶었지만, 안 깎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다가 4월 초 타이 방콕으로 휴가를 떠났다. 수염을 깎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길러버렸다. 수염은 유통기한을 넘겨 2주 넘게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예전에는 나를 보고 “중국 사람이냐?”고 물어보던 타이 사람들이 수염을 기르니까 “일본 사람이냐”고 물었다. 마음대로 ‘스타일이 있어 보인다’로 해석했다. 회사로 돌아와서도 반응이 좋았다. 내친 김에 한달 가까이 길러버렸다.
수염을 기르는 데 일년이 걸렸다. 사실 지난해 초부터 수염이 기르고 싶었다. 그런데 수염 “그까이꺼” 하나 기르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주위 ‘넘’들의 반응이 두려웠다. 난데없이 튀기는 죽기보다 싫었지만, 평범하게 늙어가는 것도 죽음이긴 마찬가지였다. 트렌드는 분명했다. 얇은 뿔테 안경에 까끌까끌한 수염, 약간 헐렁한 청바지. 거리에서, 클럽에서 ‘새끈해’ 보이는 남자들에게서 내가 뽑아낸 코드였다. 어느 날 <아메리칸 뷰티>를 보다가 대사 한마디가 마음을 울렸다. “평범한 것만큼 슬픈 것은 없어요.”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느 날 시작했다. 물론 안 깎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수염을 기르면서 회사 들어가기가 민망했다. 주변에서 열화와 같은 반응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냉정한 반응이 두려워, 야멸친 코멘트를 ‘날릴’ 것 같은 사람이 보이면 슬쩍 피해가거나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기도 했다.
역시 안 하던 짓 하면 시련을 겪게 마련이다. “어, 선배~ 수염 길러요?” 오랜만에 보는 후배들은 반드시 물었다. 물론 왜 기르냐는 뜻이다.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 무마용 대답이 필요했다. “터프하지 않냐?” 일부러 오버하며 말했지만, 절반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개그가 통하지 않았다. 하드코어 개그로 더욱 세게 밀어붙였다. “야, 섹시하지 않냐?” 잘못 사용된 하드코어 개그는 썰렁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그만이다. 사람들은 웃지도 않고 어이없다는 표정만 지었다. 속으로 ‘쩝∼ 잘못했어’라고 용서를 비는 순간, “선배, 안 어울려요”라는 말이 귀청을 때렸다. 수염에 대한 최악의 코멘트는 “임꺽정이냐?”였다. 한달 가까이 수염을 길렀을 때다.
문제는 수염에 대한 찬반이 50대50으로 양분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현상을 두고 다른 분석을 하기도 하고, 같은 사람이 다른 말을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검은 수염 때문에 넓은 이마가 더 환해 보여”라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이마가 훤한 사람한테 수염이 잘 어울리는구나”라는 솔깃한 칭찬을 했다. 정말 헷갈린다. 네버엔딩 일희일비는 계속된다. 한입으로 두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의 ‘헤어디자이너 김 선생님’이다. 이 ‘언니’는 머리를 깎으러 가자 “어? 수염 기르세요? 멋있어요!”라고 하더니, 한달 뒤에는 “어? 수염 기르세요? …” 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언니의 진심은 무엇인가? 소심한 성격에 따져묻지도 못하고 그저 궁금증에 상처만 받았다.
나에게 수염은 심지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으로 떠올랐다. 칭찬 한마디가, 격려 한말씀이 목마른 나에게 ‘좋은’ 말씀을 해주시면 그분은 무조건 ‘리버럴’이다. 하지만 ‘꼴값을 떨어라’는 떫은 표정으로 지나가거나 “면도기 없어?”라는 썰렁한 멘트를 날리는 분들은 감성의 보수로 재단된다. 물론 감성의 좌우는 이념의 좌우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가혹한 멘트를 날리고 가는 일부 좌파들은 ‘꼰대 좌파’로 찍힌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머리의 진보보다 가슴의 리버럴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혹은 스타일이 리버럴하지 않으면 진보도 해먹기 힘든 시대라고 믿기 때문이다. 누가 뭐래도 ‘마이 웨이’를 갈 생각이다. 귀에 쟁쟁한 말들을 지워버리고, ‘남자 되기’ 프로젝트를 밀어붙일 각오다. 오늘도 거울 앞에서 다짐한다. “터프한걸, 섹시한데 뭘!” ‘자뻑’은 계속된다.
</font></td><td width="10" bgcolor="F6f6f6"></td><td width="2" background="http://img.hani.co.kr/section-image/02/bg_dotline_h.gif"></td></tr><tr><td colspan="5"></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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