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건강과 환경을 위한 엄마들의 힘찬 첫걸음… ‘다음을 지키는 사람들’의 안티패스트운동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이제 5월입니다. 가정의 달인 5월이면 학교는 먹다 남은 밥과 전쟁을 벌입니다. 시시때때로 들이치는 어머님들의 사랑으로 교내에는 각종 음료수와 피자, 햄버거가 난무하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영양교사인 이정은씨의 말이다. 이씨는 “5월이면 패스트푸드의 단점을 알리는 가정통신문을 보내지만, 어머님들의 관심은 그저 아이들이 즐거워하고 맛있게 먹는 것이지 그 이외의 결과는 관심 밖인 같습니다. 저희 학교 아이들의 급식에 대한 희망사항은 패스트푸드와 육류를 많이 해달라, 야채를 줄이자 등인데, 학부모들도 그냥 아이들이 잘 먹는 것을 해달라고 합니다”고 안타까워했다.
살 안 찐다고? 세트메뉴의 함정!
4월23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패스트푸드점. 아이들을 데리고 온 엄마가 있다. 엄마는 자식이 감자튀김을 케첩에 찍어먹고 앙증스럽게 햄버거를 베어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동네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패스트푸드를 그만 먹자’고 외치는 엄마들도 있다. ‘다음을 지키는 사람들’(다지사·ecoi.eco.or.kr)은 4월20일 오전 서울 국가인권회 배움터에서 ‘안티패스트푸드운동’ 출범식을 했다. 다음 세대를 책임질 부모로서 아이들과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패스트푸드를 끊자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다지사 엄마들보다 더 빠르게 움직인 곳이 있다. 그동안 ‘비만의 주범’이란 비판을 받아오던 패스트푸드 업체들이다.
한국맥도널드는 4월12일 햄버거, 감자튀김 등 자사 제품의 열량과 영양성분을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맥도널드는 햄버거와 감자튀김 등의 열량이 한국 사람들이 즐겨먹는 돌냄비 국수, 비빔밥 등과 비교할 때 별 차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맥도널드의 ‘빅맥’(590㎉)과 감자튀김(450㎉)의 열량은 돌냄비 국수 1인분(565㎉), 떡국 1인분(568㎉), 비빔밥 1인분(500㎉), 볶음밥(617㎉), 떡볶이(482㎉) 등의 열량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맥도널드의 불고기 버거(433㎉)는 대표적 군것질거리인 떡볶이(482㎉)보다 낮다고 밝혔다.
KFC나 버거킹 등 다른 패스트푸드 업체들도 제품 열량을 밝혔다. 예를 들어 KFC의 치킨불고기버거는 448㎉, 버거킹의 와퍼는 680㎉이다. 이 제품의 칼로리는 김초밥 1인분의 열량 500㎉보다 낮다.
패스트푸드 업체들의 주장의 뼈대는 ‘패스트푸드를 먹는다고 무조건 살찌는 게 아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다지사는 “패스트푸드 정보가 일부라도 공개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하지만 업체들이 공개한 정보는 미흡함을 넘어 소비자들을 우롱한 것이나 다름없다. 업체들은 햄버거와 감자튀김의 열량을 하나하나 비교했지만, 소비자들은 햄버거나 감자튀김 하나만 먹지 않는다. 대부분 햄버거 하나, 감자튀김 하나, 콜라 하나 등 세트메뉴를 택한다. 소비자가 즐겨찾는 한 세트메뉴를 합쳐서 계산하면 총 열량은 1190㎉, 지방은 56g에 이른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소비자보호원이 서울 지역 초등학교 5·6학년 500명을 대상으로 벌인 ‘패스트푸드조사’에서도 패스트푸드점을 이용할 때 ‘햄버거+감자튀김+음료’ 세 가지를 먹는다는 대답이 35%였다. 소비자보호원은 햄버거, 감자튀김, 음료 세트의 열량은 650~1065㎉로 열량 일일권장량의 53%, 지방은 일일 섭취기준량의 최고 82%까지 먹게 된다고 설명했다.
미국식 식습관, 장수촌을 파괴하다
비만과 패스트푸드의 연관성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3월31일치 는 일본 오키나와 오라소에시에서는 ‘전 시민 3kg 빼기 운동’를 벌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오키나와현(縣)은 일본에서도 장수촌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데 현재 오키나와 남성의 평균수명은 일본 47개 현 가운데 26위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평균키는 155cm로 일본에서 두 번째로 작지만, 평균 몸무게는 61kg으로 가장 많이 나간다.
는 오키나와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원인을 미국식 식습관을 꼽았다. 오키나와 전통음식은 채소류를 많이 쓰고 지방을 거의 쓰지 않는다. 이런 식습관을 유지하는 오키나와 노인들은 오래 살지만, 젊은층은 비만에 시달리고 있다.
오키나와는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에 점령당해 1970년대 일본에 반환됐고, 현재에도 미 해병대가 주둔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오키나와는 일찌감치 쇼핑몰, 패스트푸드 같은 미국 문화가 들어왔다. 오키나와는 인구 1만명당 8.19꼴로 햄버거가게가 있는데 이 숫자는 일본에서 제일 높다. 는 “평균수명의 하락과 비만의 증가가 일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지사는 더 중요한 것은 ‘열량’이 아니고 그것이 먹을 만한 ‘음식’인지 여부라고 주장했다. “열량은 지방뿐만 아니라 다른 영양소에서도 얻을 수 있고, 일일 영양소의 권장섭취량은 탄수화물 65%, 단백질 20%, 지방 15% 안팎이다. 그런데 열량 590㎉ 햄버거 가운데 지방 성분은 52%(306㎉)로 매우 높다. 한식이 대부분의 열량을 탄수화물에서 얻는 것에 비해 햄버거는 지방 성분이 높은데다 콜레스테롤 수치를 높이는 포화지방 성분이 많아 비만과 영양 불균형을 초래한다. 패스트푸드가 재료의 채취에서 식탁에 오르기까지 전 과정을 환경친화적이고 건강 중심으로 전환하지 않고 열량만을 공개하는 것은 소비자를 호도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소비자보호원은 패스트푸드의 총 열량 중 지방 섭취로부터 오는 열량이 차지하는 비율은 햄버거세트는 28~35%, 치킨세트는 25~39%로 조사대상 품목 모두 일반적으로 권장되는 지방 에너지 구성비인 20%를 넘었다고 밝혔다.
4월 초순 다지사는 패스트푸드의 이용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경기 지역 초·중등학생 202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박명숙 다지사 운영위원은 “초등학생의 72%가 주로 가족과 함께 생일잔치 등 특별한 날에 패스트푸드점에 간다고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가족과 함께 패스트푸드를 먹는 습관이 생기기 때문에 부모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특별한 날엔 패스트푸드점을 가야 하나요?
‘주로 누구와 함께 패스트푸드를 먹느냐’는 질문에 대해 1096명(55.4%)의 학생들이 가족과 먹는다고 대답했다. 이 질문에 대해 초등학생의 72%가 가족과 같이 먹고, 22%가 ‘친구와 함께 먹는다’고 응답했다. 중학생은 ‘가족과 함께 먹는다’가 47%, ‘친구와 함께 먹는다’는 46%였다.
박명숙 운영위원은 68%(1359명)의 학생이 ‘맛있어서’ 패스트푸드를 먹는다고 대답한 것에 주목했다. 지난해 소비자보호원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3%가 ‘맛이 좋아서’ 패스트푸드를 먹는다고 대답했다.
설문조사에서 75%가 ‘패스트푸드를 먹으면 뚱뚱해진다’고 응답하고, 82%의 학생들이 ‘패스트푸드를 먹으면 환경이 나빠진다’고 응답했다. 그런데도 43%(873명)가 한달에 한두번은 패스트푸드를 먹는다고 나타났다.
박명숙 운영위원은 “패스트푸드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을 학생들이 알면서도 먹는 것은 패스트푸드에 입맛이 길들여져 ‘맛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다. 부모로부터 패스트푸드를 먹지 말라는 말을 자주 듣는 아이는 17%에 불과했다. 아이들이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은 가족 외식이나 아이 생일잔치를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하는 부모의 책임이 매우 크다. 아이들보다 부모의 인식전환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다지사는 시민들이 막연하게 알고 있는 패스트푸드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안티패스트푸드’ 인터넷 카페(cafe.daum.net/antifastfood)를 만들었다.
다지사는 안티패스트푸드 운동으로 △패스트푸드 정보공개 운동 △성분표시 제도화를 위한 법률개정 운동 △패스트푸드 광고규제 운동 △유해성을 알리는 거리 캠페인 등을 준비하고 있다.
정보공개 운동은 열량처럼 제조업자가 알리고 싶어하는 정보만 공개하는 게 아니라 햄버거에 들어가는 고기는 어느 나라의 무슨 고기의 어느 부위로 만드는지, 양상치는 수입한 것인지 국산인지, 감자를 튀긴 기름은 수입산인지 등 햄버거, 치킨, 피자 등 품목별로 소비자가 궁금해하는 내용을 기업에 공개질의서를 보내 답변을 듣고 이를 인터넷에 공개하는 운동이다.
성분표시 제도화는 과자나 아이스크림 같은 가공식품처럼 패스트푸드도 식품의 유형, 원산지, 첨가물 내용을 공개하라는 것이다. 다지사는 “현행법상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는 도시락류에 포함되어 성분표시의 의무가 없다. 하지만 패스트푸드는 제조공정과 원료가 기계화·획일화되어 있다. 패스트푸드 매장에서는 다 만들어진 제품을 조립만 하므로 가공식품과 같이 패스트푸드 포장지나 매장 등에 주원료와 식품첨가물의 표기를 법률로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린이 방송시간대엔 광고 금지해야”
다지사의 설문조사 결과 ‘텔레비전에서 패스트푸드 광고가 나오면 75%의 학생이 ‘먹고 싶다’고 대답했다. 다지사는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즐겨보는 시간대에는 패스트푸드 광고를 금지하거나 광고가 나간 뒤 ‘패스트푸드를 많이 먹으면 뚱뚱해지거나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공익광고를 내보내야 한다. 스웨덴에서는 어린이 방송시간대에 패스트푸드 광고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다지사는 안티패스트푸드 운동 출범식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 아이들의 건강과 환경을 지키기 위해 엄마들이 내딛는, 작지만 묵직한 첫걸음’을 뗐다.
“차라리 아이들을 굶겨라” |
다지사는 2000년 를 발간하여 화제가 됐다. 먹을거리 오염을 고발한 도발적 제목의 이 책은 전문가들의 딱딱한 이야기나 어려운 이론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체득한 고민과 경험을 담았다.
다지사는 4월20일 안티패스트푸드 운동 출범식을 하면서 출판 기념식을 같이 했다. 이 책은 ‘그럼 다지사 엄마들은 무얼 먹고 살아요’란 숱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먹을거리 오염을 고발한 를 읽은 많은 사람들은 ‘이것저것 빼면 정말 먹을 게 없다. 정말 아이를 굶겨야 하느냐’ ‘식습관을 바꾸고는 싶은데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는 이 고민에 대해 다지사 회원 21명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도움말을 담은 책이다.
다지사 엄마들은 책에서 △밥이 보약이다 △식단에서 가공식품과 고기류 줄이기 △제철 음식과 채소 많이 먹이기 △밀가루 음식 줄이기 △간식 줄이기 △아기에게 분유 대신 모유 먹이기 등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 생일상을 차릴 때 패스트푸드로 채울 게 아니라, 힘들더라도 직접 만든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려주자고 제안한다. 그 예로 고구마 맛탕, 맵지 않은 궁중식 떡볶이, 떡꼬치, 누룽지 스낵, 감자 샐러드 케이크 같은 음식 만드는 방법이 실려 있다.
‘비만으로 가는 지름길’인 패스트푸드를 아이로부터 떼어낸 경험도 들려준다. 먼저 부모와 아이가 우리 몸을 해치는 음식과 도움을 주는 음식에 대해 공부하고 충분히 이야기를 해야 한다. 단순히 내 한 몸 건강하기 위해 패스트푸드를 먹지 않는 게 아니라 생태계와 우리 삶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알려준다. 끝내 햄버거를 못 잊는 아이들을 위해 우리밀 햄버거 빵과 다진 소고기, 신선한 야채 등으로 ‘엄마표 햄버거’를 만들거나 감자나 고구마, 밤 등로 맛탕 햄버거 ‘대체재’를 만드는 방법도 일러준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지사 엄마들은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게 생태계를 살리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라는 회의에 빠지기도 하고, ‘유기농이 좋기는 하지만 돈 많은 사람들만 사 먹는 게 아니냐’‘라면 삶는 법부터 배우는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이런 식품은 좋고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아닐까’ 같은 고민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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