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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적 좌파의 거두, 황종희

등록 2004-06-18 00:00 수정 2020-05-03 04:23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17세기 명나라 지식인이 역설한 ‘공(公)의 사회’… 그에게서 ‘아시아적 가치’가 빛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1990년대 초·중반 국내외 우파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시아적’ 내지 ‘유교적’ 가치 담론이 유행했다. 구미 우파는 구미 자본에 훌륭한 투자 기회를 제공해주는 동남아·동북아의 개발 독재들을 “문화 전통상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변호하며 ‘유교적 온정주의와 사회 단결 관습’에 기반을 두는 독재 정권·재벌 기업들의 효율성을 찬양했다. 그 논리를 보면 톈안먼 사태로 귀결된 썩은 중국의 관료 집단이나 남한 정계의 영남 패권주의자들이 ‘애민(愛民), 혜민(惠民)의 군자’로, 아시아의 민중은 ‘충실한 백성’으로 서술됐다.

유교를 너무 단순화하지 말라

한편 국내의 ‘아시아 가치’ 옹호자는, 1970~80년대 일본 우파의 ‘일본인론’을 방불케 하는 ‘한국사회론’에 주력을 기울였다. 한국의 ‘유교적 가족주의’ 사회에서는 학연·지연·혈연 위주의 사적인 네트워크가 지배적인 단위인 만큼 차라리 그 ‘패거리’ 사이에서 ‘상생의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향우회·동창회의 성황이나 룸살롱에 2~3차 가는 것이 ‘유교적인’ 우리의 문화이니 학벌·지벌(地閥) 없는 사회는 꿈꾸지 말자는 소리다.

1970년대 관변 학자들의 ‘한국적 민주주의’(유신의 공포정치) 찬양론을 그대로 이은 듯한 이 논리는 명분상으로는 유교의 ‘미덕’을 기리지만 그 내용을 보면 유교를 ‘전근대’의 상징으로 여긴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유교에 대한 왜곡된 이해를 벗어나지 못했다. ‘동양’ 유교의 가족적 윤리 중심주의, 위정자 본위의 온정주의, 예속된 백성에 대한 시혜의 논리와, 서구 근대의 사회 공익 관념과 사회 구성원 사이의 계약적 관계, 공익 본위의 합리적인 관료제도를 대조시킨 막스 베버와 같은 서구 오리엔탈리스트의 ‘유교’ 담론을 받아들이되 ‘가치평가’ 난에다 ‘마이너스’ 대신 ‘플러스’를 썼을 뿐이다.

한국의 극우 언론들이 편애하는 ‘아시아적 가치’ 지향적인 논객들의 상당수가 미국 등지에서 서구 중심적 유교 의식을 체득한 ‘유학파’라는 것도 우연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과연 유교가 관료의 ‘시혜적’ 통치, ‘백성의 충성’의 논리와 수직적 패거리 집단으로 구성된 사회의 패러다임뿐일까? 우리는 ‘유교적 유산’을 상속받은 관계로 ‘공’(公)의 사회를 건설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는가?

필자의 생각으로 ‘아시아 가치론’은 두 가지 치명적인 오류를 안고 있다. 하나는 2천여년 동안 너무나 다양하고 서로 대립했던 많은 사상들을 포함하는 ‘유교’라는 복합적인 담론을, 관학(官學) 성격이 짙은 일부 사상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했다. ‘유교’ 하면 당장 공맹을 거론하는 보수적 선비가 연상되지만, “나의 마음 외에 공맹도 도(道)도 없다!”고 외치며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명나라 말기의 이지(李贄·1527~1602)라는 극단적 개인주의자도, 유머와 패러디의 거장 박지원(朴趾原·1737~1805)이라는 파안대소의 호탕한 호인도 ‘유교’의 범주에 속한다. 둘째는, 보수성이 짙은 왕조 사회의 현실만을 ‘유교’로 인정하여 진보성이 강한 많은 유교 사상가들을 무시한 것이다. 전통 시대의 동아시아도 왕조·관료 중심의 수직적 통치의 관행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이 관행을 벗어나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수많은 진보적 유림들은 우리에게 공정한 사회를 위한 투쟁의 표본을 보여준다.

특히 명나라 말기 진보적 유림들은 가시적으로 환관 등의 궁정 파벌의 비합리적인 ‘사’(私)의 통치를 비판하여 공익적·합리적·사회통합 지향적 정치 시스템을 제창했다. 그 당시의 양심적 지식인이던 동림당(東林黨)은 언로(言路) 개방과 업적주의적 관료 임명, 광업에 대한 국가 독점권 취소 등 국가 통제의 철폐와 민간인 교육 진흥을 요구했다. 그들은 수직적인 ‘위민’(爲民)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어느 정도 넘어서 민(民)이 중요한 몫을 갖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만주족에 의한 명나라의 멸망(1644)으로 동림당의 투쟁은 좌절되고 구태의연한 성리학적 통치가 재현됐지만, 다행히도 살아남은 동림당의 사상가 황종희(黃宗羲·1610~95)에 의해 ‘공’(公)을 위해 몸을 바친 정의파 지식인들의 이념이 집대성됐다. ‘유교적 좌파’의 거두 황종희야말로 유교가 결코 ‘복종과 파벌의 논리’만이 아님을 잘 보여준 사례다.

환관 정치에 대한 언론 투쟁

황종희가 후대 인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된 이유는 그의 사상에도 있지만 그가 지(知)와 행(行)을 따로 보지 않았던 지사였기 때문이다. 동림파 지도자 가운데 한명이었던 부친 황존소(黃尊素·1584~1626)가 천계제(天啓帝·재위 1620~27) 시대의 간신배 원흉이었던 환관 위충현(魏忠賢·?~1627)을 탄핵하다 환관들의 무고로 고문을 당하다 죽은 관계로, 황종희에게는 권신(權臣) 파벌의 공포정치와의 싸움은 ‘효도의 실천’이기도 했다. 진보적 지식인 단체이던 ‘복사’(復社·1629년 조직)에 들어가서 환관 정치에 대한 언론 투쟁을 벌인 그는 한편으로 몇년 만에 중국의 일체 정사(正史)와 명나라의 실록을 다 독파하여 치열한 역사 공부 끝에 명나라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깨달았다.

명나라가 망한 뒤 의용군의 무장 구국 투쟁도 하고 일본에 가서 반청(反淸) 운동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지만, 명나라의 재기가 불가능함을 알고는 1649년부터 고향에서 독서와 집필, 후진 양성에 몰두했다. 요즘 일부 우파 논객들이 친일파의 부역 행각을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이라 변호하지만, 황종희처럼 불가피한 조건인 변발(?髮)을 행하고도 청나라에의 일체의 협력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유교적인 원칙론과 현실의 진정한 절충이 아닌가? 당국의 회유와 협박을 무시하면서도 그 저술로 당대 최고 유림으로서 명성을 얻은 황종희는, 독립적이며 출세에 무관심한 지식인이 얼마나 생산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 죽도록 한 역사 공부의 결과로 얻은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의 명저 (明夷待訪錄·1663)의 말대로, 군주의 전제 통치가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고 통치자의 사익을 천하의 공익처럼 만들어버렸다. 결국 통치자들이 천하를 자손들에게까지 넘기고 끝없이 이용할 사유 재산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군주가 (정치의) 주체가 되고 천하(의 피지배민들은) 객체가 되었다”. 만인의 개인적 이해를 조절하여 그들 사이의 공통분모인 공익을 지켜주어야 할 사회 통치 체제가 소수 지배자의 권력 영구화와 착취의 도구로 변질됐기에, 군주를 ‘아버지’로 여겨야 할 평민들이 군주를 미워하는 것이 통례가 되고 말았다. 모두의 욕망을 골고루 챙겨야 할 국가가 극소수 기득권층의 욕망에만 복무하기에, 외적이 쳐들어가자마자 국가가 썩은 나무처럼 쓰러지고 만다. 국가의 공적 성격의 부족은 바로 황종희가 깨달은 고국 명나라 멸망의 원인이었다.

그러면 ‘공’(公)의 국가는 어떤 것인가? 이 국가에서는 관료들이 군주 아닌 천하인민을 위하고 섬기는 공복이 돼야 하고, 법은 만인이 두려워하는 억압의 도구가 아닌 만인의 이해관계와 공론에 입각한 ‘공’(公)의 지킴이가 돼야 된다. 국정은 한 통치자의 독단이 아닌 내각의 집단 결정으로 처리해야 된다. 서울의 태학에서 황제가, 그리고 군현의 학교에서 지방 행정 관료가 각각 한달에 한두번 씩 원로 학자의 강연을 듣고 의회 격인 ‘학교의 공의(公議)’를 정치의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관료 등용은 과거 시험뿐만 아니라 기술적 지식과 행정 실적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가난뱅이들도 관(官)으로부터 생업에 필요한 토지와 배울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상업 진흥을 위해서 국가가 지폐와 동전을 발행하는 등 중상주의적 성격의 여러 조치들이 취해진다.

황종희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

물론 이 제시하는 ‘공(公)의 사회’는 진보적 의미의 ‘이상사회’는 아니다. ‘세론’(世論)을 대변할 ‘학관’(學官)들이나 상업부흥책에 덕을 입을 부민(富民)들은 황종희 자신과 가까웠던 17세기 중국 지방 엘리트였는데, 의 왕조·관료 횡포 비판의 목적 중의 하나는 이들 ‘중산층’의 이해관계의 표방이었다. 그러나 고국 멸망이라는 쓰라린 교훈을 맛본 황종희는 만인의 욕구가 자유롭게 대변·충족되는 ‘공(公)의 사회’를 진심으로 갈구하게 되었다. 만인을 위한 합리적인 사회가 돼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참된 ‘유교적 가치’인 이 진리를 오늘날 남한의 기득권자들은 왜 이해 못하는가? 그의 뜻을 따른다면 대다수를 위한 기본적인 복지망이 없는 사회는 결코 안정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한 이치가 아닐까.

[참고문헌]
1. 오금승, “황종희의 교육개혁론”- , 제16집, 1974, 95~130쪽
2. 조영록, “에 보이는 직분론- 송대 이래 위분관의 변천상에서 본”
- , 제10집, 1976, 1~30쪽
3. , 홍익출판사, 1999, 232쪽
4. , 김덕균 옮김, 한길사, 2000, 326쪽
5. , 이규성, 이화여대출판부, 1994, 358쪽
6. , 시어도어 드 바리 지음, 표정훈 옮김, 이산, 1998, 150~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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