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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 영원한 현역, 타악 실험중

등록 2003-07-31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size="2" color="663300">‘프리뮤직’ 연주자로 활동하는 그룹사운드계 맏형… 신중현·조용필 등과 활동하며 북 치는 인생 살아 </font>

한국의 음악인들 가운데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한 경우’가 왕왕 있다. 이 글의 주인공, 타악기 연주가인 김대환(1933~)이 그 중 한명이다. 그의 대표작인 (1991)가 일본 시장에서 먼저 선을 보인 뒤 한국에 역수입된 것이 상징적이다(참고로 ‘흑우’는 그의 아호다). 한국의 음반매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거나 한구석에서 먼지만 뽀얗게 쌓여 있겠지만.

그를 ‘프리 재즈 드러머’라고 표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기서 ‘재즈’나 ‘드러머’라는 말은 부적절하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강태환(알토 색소폰·김대환의 외사촌 동생), 최선배(트럼펫)와 함께 프리 재즈밴드 ‘강트리오’로 10년 가까이 활동했지만, 그 뒤에는 재즈와도 드럼과도 결별하고 ‘타악기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리스트가 된 뒤 처음에는 드럼·팀파니·로토톰 등 서양의 타악기를 사용했지만 언젠가부터 북 하나만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채, 장구채, 드럼 스틱 등 여러 개의 채를 동시에 사용하여 다채로운 타악을 만들어낸다. 그 뒤 다소의 변화는 있었지만 ‘최소한의 악기로 최대한의 감흥을 만들어낸다’는 원리는 여전하다.

재즈 연주자에서 타악기 솔리스트로

고희(古稀)를 넘긴 노(老)대가는 젊은 시절에는 무엇을 했을까. 뜻밖에도 그는 ‘재즈 악단’과 ‘그룹사운드’에서 드럼을 연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는 한때는 신중현과, 다른 때는 조용필과 함께 연주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신중현과 조용필이라면 1980년 이전과 이후를 대표하는 20세기 한국 대중음악의 거인 아닌가. 그러니 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충남 태안에서 태어난 김대환은 인천의 한 중학교의 브라스밴드에서 트럼펫을 부는 것으로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선무공작대라는 악극단에서도 잠시 연주하고 공군 군악대에서 호른과 트롬본을 불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의 청년기는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어수선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27살이 되어서야 군에서 제대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꽁지머리에 가죽 잠바를 걸친 차림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그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제대한 직후 미 8군 쇼 무대에서 드럼을 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신중현과 함께 만들었던 클럽 데이트라는 ‘패키지 쇼’는 캄보밴드에서 보컬그룹(록그룹)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역할을 했고 그 뒤 신중현이 처음 만든 록그룹 애드 훠(Add 4)에도 가담한다. 애드 훠의 (엘케엘 레코드 LKL-1014)을 녹음하기 직전 신중현과의 연이 끊어져서 이 기념비적 음반에서는 김대환의 드럼 연주를 들을 수 없다. 그는 다시 미 8군 무대로 돌아가 1964년께 매키(The Macky)라는 쇼단을 이끌다가 1965~66년에는 한국방송 TV 전속악단(송민영 악단)과 문화방송의 전속악단(김호길 악단)에서 북 치는 인생을 계속했다. 1967~68년에는 동남아 순회공연과 월남 위문공연을 다녀오는 등 황망한 생활이 이어졌다. 이렇게 간략히 말하는 것보다 복잡한 삶이었으리라.

‘대중’음악보다는 ‘프리’음악에 어울려

김대환은 1970년 신중현의 새 그룹인 퀘션스에 다시 가담한다. 이에 대해 “박인수와 의기투합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박인수는 퀘션스의 보컬리스트이자 를 부른 ‘솔 가수’다. 이때는 이른바 ‘사이키델릭 사운드’의 전성기였고, 서울 시민회관에서 ‘경연대회’나 ‘리싸이틀’이라는 이름 아래 그룹사운드의 공연이 성행할 때다. 이때 퀘션스의 공연 실황을 담은 음반 <in-a-kadda-da-vida>(킹/유니버어살 KLH-24)를 들으면 김대환의 자유분방한 드럼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신중현과의 연은 퀘션스를 끝으로 다시 한번 끝났지만 그는 최이철(사랑과평화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을 발굴하여 아이들(Idol)이라는 그룹을 조직, 음반 제작을 주선해주었고((대지/성음 DG 가 30, 1971), 1970년 말에는 최이철, 조용필과 함께 김트리오를 결성한다. 김트리오 시절에 대해 조용필과 최이철은 “기타와 베이스를 앞뒤로 맨 채 번갈아가면서 연주했는데 엄청 무거웠다”고 공통적으로 증언한다. 이 시절 ‘기타리스트 조용필’의 면모는 (아세아 ALS-0004)에서 들을 수 있다. 이 음반에서는 조용필의 기타 연주뿐만 아니라 김대환의 드럼 연주, 그리고 세션으로 참여한 강태환의 색소폰 연주도 들을 수 있다.

이런 일련의 활동을 통해 김대환은 그룹사운드계의 대형(大兄) 같은 지위를 얻었다. 1971년 3월에 결성된 그룹사운드협회(정확히 말하면 ‘한국연예협회 그룹사운드 분과’)의 초대 회장을 맡아서 ‘록음악은 퇴폐 풍조’라는 세간의 인식에 맞서 그룹사운드 연주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번거로운 일을 맡기도 했다. 그해 5월 ‘선데이서울컵 그룹사운드 경연대회’에서 조용필이 가수왕 상을 수상하는 데도 김대환이 음양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는 것이 관련자들의 증언이다.
그렇지만 김트리오의 해체와 더불어 조용필과의 인연도, 그리고 록 드러머 김대환의 경력도 끝났다. 김트리오가 해체된 이유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음악적 실험이 끝나지는 않았고, 이때 이후의 그의 경력에 대해서는 앞서 소개한 바 있다.
뒷얘기지만 신중현도, 조용필도 “김대환 선배는 드럼을 잘 못 쳤다. 흥분을 잘 하는 성격이라서 템포가 빨라졌다”고 말한다. 김대환과 인터뷰했을 때 ‘이걸 본인에게 어떻게 물어볼까…’ 하고 고심했는데, 물어보기도 전에 본인이 “내가 드럼을 못 쳐서 후배들이 불만이 많았을 것”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아마 그때는 ‘대중’음악보다 ‘프리’한 음악에 어울린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으리라….

세계 순회공연 500회… 미세글씨의 대가

1980년대 중반부터 김대환의 ‘프리뮤직’은 일본을 비롯한 세계시장에 알려져서 이제까지 500여회의 순회공연을 다녔고, 1999년 10월에는 도쿄 신주쿠에서 김대환 음악생활 50주년 기념 콘서트를 가졌다. 연주활동 외에도 그는 쌀 한톨에 283자를 새겨넣는 이른바 ‘백미실물세서’(白米實物細書)를 1985년에 완성하여 1990년 기네스북에 오르는 등 세서(細書) 혹은 세각(細刻)의 달인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1989년부터는 한 후원자의 도움으로 서울 인사동에 연습실 겸 전시실을 차렸고, 최근 이사한 홍지동에 있는 자신의 집도 작업실과 전시실로 꾸미고 있다. 또한 중앙대학교 국악대학에 출강하면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이따금 공연과 전시회를 하고 있다. 아직도 꽁지머리에 가죽잠바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P.S. 김대환의 가장 최근의 ‘녹음된 음원’은 기타리스트 김광석의 음반 (4CDs)의 두 트랙에서 들을 수 있다.

신현준 | 대중음악평론가</in-a-kadda-da-v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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