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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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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과 중국, 공존의 코드가 있다

등록 2004-05-06 00:00 수정 2020-05-02 04:23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교과서가 안 가르쳐주는 회족의 ‘평남국’ 역사… 갈등 있었지만 유럽에 비하면 놀라운 톨레랑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요즘 동아시아 담론이라는 말이 도처에서 인기를 얻게 됐다. 좌파에게 동아시아 공동체는 이 지역에서 미국 패권의 축출 가능성을 의미하고, 우파는 일제 식의 권위주의를 ‘동아시아적 가치’로 포장하는 등 동아시아 담론의 가시적 유행은 동상이몽의 현실을 감추고 있다.

이슬람과 유교적인 가치들의 융합

그런데 좌파든 우파든 동아시아를 논하는 자세에서 공통점이 있다. 가령 사상사에서 주류 이데올로기라 할 만한 유불선(儒佛仙) 등은 언급되지만 비주류로 여겨온 다양한 신앙·철학들은 공론에서 거의 배제된다. 유불선 안에서도 통치자들에게 불편한 요소에 속하는 부분은 빠진다. 불교만 해도 중국 지배자의 인정을 받아 한국·일본에서까지 뿌리를 내린 천태종과 선종을 알지만, 이타의 실천과 부의 재분배를 주장해 730년에 금지된 삼계교(三階敎)와 같은 민중적 비주류 불교 계단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음에도 잘 언급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공인된 ‘동아시아 사상’의 범주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신앙은, 아예 ‘동아시아적인 것’으로 취급조차 못 받고 있다. 그들은 과연 2천만명의 중국 주민들과 수만명의 한국·일본인들이 믿고 있는 이슬람을 ‘동아시아 문화’에 포함시키는가? 이같은 배제가 왜 안타까운가? 에 나오는 전설 속의 처용의 원형이 신라 말기에 경주에 드나들었던 이슬람 상인이었다는 학설이 보여주듯 이슬람 문화와 한국의 역사적 관계는 오래된 것이다. 지역 전체로 이야기하자면 중원이야말로 이슬람 신도와 비(非)이슬람인들이 천년 이상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공존해온 곳이다.

이 글의 주제인 운남(雲南)에서의 회족(回族: 중국인 이슬람 신도)의 기의(起義)와 평남국(平南國)의 짧은 존속과 반청(反淸) 투쟁(1856~1873)이 말해주듯 그들의 공존에도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전까지 이슬람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구미 사회에 비하면, 이슬람에 대한 동아시아의 관용은 놀라울 만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과 유교적인 가치들을 융합시키려는 중국 회족들의 노력도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종교·문화적 톨레랑스의 발달에 기여한 것이다.

회족·평남국의 역사를 보면 이슬람을 폄하해온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알 수 있다. “개원(開元:713-741) 초에 대식국(大食國:이슬람 국가의 총칭, 여기서 옴미아드 왕조를 뜻하는 듯함)의 사절이 내조하여 말과 보배로운 허리띠를 바쳤다. 그런데 황제를 알현할 때 그 사절이 절을 하지 않았다. 헌사(憲司-검찰)가 이를 문죄하려 하자 중서령(中書令) 장열(張說:667~730)이 ‘대식의 풍속이 우리와 다른데 대의(大義)에 따라 멀리에서 온 사람에게 벌을 줄 수 없다’ 했으며 주상께서 이에 따랐다. 그 본국에서는 오직 천신(天神-알라신)에게만 절할 뿐, 왕을 알현해도 머리를 바닥에 닿아 인사하는 법이 없다(…)”(, 권198: 서쪽 오랑캐의 열전).

이 간단한 기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당나라의 톨레랑스는 이질적이었던 중동과 동아시아의 만남을 평화와 상호 이해쪽으로 이끌었다. 항구 도시들에 모여 사는 수십만명의 이슬람 상민(商民)들이 자치를 누리기도 하고, 중국 문명에 익숙해진 이슬람권 출신 2~3세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기도 했다. 이슬람 상인들의 비단 수출이 당나라의 국고를 살찌우기도 하고, 아랍인을 통해서 중국 제지(製紙) 기술이 중동과 유럽에 흘러들어가기도 했다. 황소의 난 때 외국 상인들이 살육되는(879년) 불미스러운 일들도 있었지만 당나라 시절의 이슬람 약재, 건축, 음악, 무용 등이 동아시아로 유입된 것은 세계 문화 교류사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아랍어 사용 · 이슬람 신앙도 자유로워

송나라 시절에는 광주 등지에서 이슬람 상인들이 화려한 모스크(중국어로 ‘청진사’·淸眞寺)들을 건립하고 연안 지대 관세청(이른바 시박사·市舶司)의 관료나 고을 원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 뒤에 ‘색목인’(色目人, 주로 중동 출신의 외국인)들이 정복자 몽골인들을 보필하는 특권층으로 부상된 원나라 시절은 중국에서 이슬람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명나라로 넘어갈 때 ‘색목인’의 특권이 사라졌지만 저명한 남해 원정의 주인공인 정화(鄭和, 1371~1435?, 본명 사이드 하지)라는 운남 출신의 이슬람교도의 중용이 보여주듯, 그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물론 공적인 영역에서 중국 성씨를 사용하고 과거 공부를 하는 등 일반 공민의 생활 방식을 따라야 했지만 사적인 영역에서 아랍어 사용·이슬람 신앙 등은 자유로웠다. 원시 유교와 이슬람 철학을 융합하여 이슬람의 사리아(sharia-율법, 윤리)와 삼강오륜이 하나임을 증명한 왕대여(王垈與, 1570~1660)의 책이 교과서로 사용돼 중동·중국 사상이 같이 가르쳐 지었던 명청(明淸) 경당(經堂-이슬람 학교)의 모습을, 모하메드를 ‘사기꾼’이라 불렀던 당시의 유럽에서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이슬람과 ‘화쟁’의 분위기를 조성한 동아시아는 유럽보다 선진적인 면모를 보였다.

물론 중국 조정에서는 단결력이 강한 회족의 모반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성리학적 관료들에게 회인들은 야만과 문명의 경계를 넘나드는 ‘회색 분자’였다. 그러나 성리학적인 독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다른 타자와 평화로운 공존을 유지한 것은 배타주의가 가장 심했던 당대 유럽 출신들이 배울 점이었다.

그러나 이 공존의 메커니즘은 19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복합화되는 사회에 부패한 정치가 역행(逆行)하고, 성리학적 관료들에게 새 시대의 모순을 해결할 능력이 부재했다. 1775년에서 1850년 사이에 인구가 2배나(약 천만명까지) 늘어나고 광업이 성행한 운남에서는 한족(漢族) 토호와 유착된 지역 관료들이, 상권을 둘러싼 회족 상인과 한족 신상(紳商) 사이의 갈등에 ‘정직한 중개인’으로 나서지 못했다. 내우외환에 잠긴 조정이 운남을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이들 관료는 한족의 민병대에 기대어, 회족에 대한 한족 지배층의 폭력을 방치하거나 부추겼다.

회족이 희생됐던 여러 학살의 결정판은 약 4천명의 무고한 이슬람교도들이 살육을 당한 1856년의 ‘곤명(昆明) 학살 사건’이었다. 그전까지 학살당할 때마다 효과도 없이 진정서만 내곤 했던 회족의 명망가들은, 이제 들고일어나지 않으면 전멸당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천재로 소문난 두문수(杜文秀, 1823~1872)라는 회족의 거두가 대리(大理)에서 기의하여 운남성의 상당 부분을, 거의 20년이나 통치할 평남국(平南國)의 건국을 알렸다. 중국에서 최초로 이슬람 국가가 세워진 것이었다.

아랍어로 작성된 평남국의 공문서에서 두문수는 ‘술탄 술라이만’(Sultan Suleiman)을 자칭하고 반청 전쟁을 ‘이교도와의 신성한 항쟁’으로 서술할 만큼 이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회족의 문화적 융통성과 톨레랑스는 평남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부분의 공문서들을 아랍어와 한문으로 동시에 작성하고 두문수 자신을 ‘술탄’으로 부르는 동시에 중국적인 ‘총통병마대원수’의 타이틀도 가졌고, 관료로 회족뿐만 아니라 한인과 이(彛)족 등의 소수자들도 등용했다.

왜 두문수는 명나라의 군복을 입었나

한족의 민심을 잡으려 했던 두문수는, 남(南)중국인들의 뿌리 깊은 반청 감정을 이용하려고 청이 멸망시킨 명나라에 대한 충성까지 표시했다. 명나라의 군복을 입고 ‘한회일심’(漢回一心)을 내건 두문수에게 많은 중국인 반란자들이 모인 것은 놀라운 일이었을까? 이슬람교도의 ‘반란 정권’이 중국인에게 큰 매력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과 중국 문화에 공존의 코드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1872~73년간의 태평 천국의 패배 이후에 일시적으로 위기를 만회한 청은 평남국을 궤멸시키고 지도층을 살육했다. 이슬람 주도의 ‘한회(漢回) 공동체 만들기’라는 실험은 패배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두문수의 기의는 큰 의미를 지녔다. 한족 등의 여러 민족들과 공존하면서도 그 신앙과 풍습을 그대로 지키는 회족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평남국 이야기는, 지금 중국 전역에 흩어진 운남 계통의 회족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는 역할을 한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가 ‘평남국 사건’을 ‘소수 민족 반란’으로 폄하하고 있지만, 독특한 요리와 음악, 무용, 문학으로 중국과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를 다양하게 만든 회족은 ‘평남국 사건’을 계기로 역사 무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중앙과 주변의 차별을 극복하고 동아시아 문화의 여러 요소들을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평남국 건국을 계기로 형성된 회족의 융합적인 정체성에 주목해볼 만할 것이다.

[참고 사이트]

1) 회족 전공자 Dru Gladney교수의 중국 내 이슬람 여러 운동 관련 논문:
http://www2.hawaii.edu/~dru/salafiyya.htm
2) 회족 문화에 대한 간략한 설명 (중국어):
http://www.guoxue.com/study/mingzhustudy/allmz/mz_11112.htm
3) 중국에서의 이슬람 문화에 대한 자세한 안내 (중국어):
http://www.cnctrip.com/culture/islam/
4) 중국 이슬람 자료, 토론 (중국어):
http://www.islamcn.net/
5) 이슬람 호교 (護敎)적 입장에서 쓰인 중국에서의 이슬람 약사:
http://www.geocities.com/khyber007/china.html
6) 두문수와 그의 기의에 대한 역사적 설명 (일본어):
http://www.mekong.ne.jp/directory/history/tuwenxiu.htm
7) 두문수 기념관 (중국어): us911.netor.com/m/memorial.asp?BID=29948
8) 두문수 묘 사진: http://www.yncte.com/ynly/qysp/dl/dlly11.htm
http://www.dl.yn.cninfo.net/info/dlyou/cecq/nsren-11.htm
9) 회족 복식 사진:
http://www.hhdaily.com/mzfq/hzjj.asp
10) 전통 복식을 입고 있는 회족 출신의 여성 운동 선수 사진:
http://www.nx.xinhuanet.com/myh7/2003-09/12/content_93689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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