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초인의 정의는 언제나 옳은가

초인적 존재의 ‘정의’ 실현 담은 애거사 크리스티의 <커튼>
‘정의’의 이름으로 확신에 차서 벌인 일에 오류는 없었을까
등록 2012-04-18 10:23 수정 2020-05-03 04:26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존재를 기대하는 심리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인생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을 한순간에 해결해줄 수 있는 초인의 출현은 분명 저항하기 힘든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절대자의 존재를 믿는 종교가 문명의 발상과 함께 생겨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류와 분명한 차이가 나는 초인의 특징은 어떤 것일까. 영화 의 주인공처럼 엄청난 괴력을 소유하고 하늘을 나는 존재일까. 혹은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만화에서처럼 물리법칙을 무력화할 수 있는 초능력자들일까.

초인의 특징, 남다른 통찰력

실제로 우리 마음속 깊이 꿈꾸는 초인은 그런 모습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좀더 깊이 이해하고 상상하기 힘든 차원의 사고를 하는 존재가 아닐까. 신인류의 출현과 종말을 그린 소설 의 작가 올라프 스태플든은 초인의 특징을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고의 깊이와 넓이라고 한다. 초인을 기대하는 이유가 우리를 둘러싼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서 편하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보는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탐정은 비록 인류와 다른 존재는 아니더라도 경이로운 추리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우리의 고민을 풀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셜록 홈스나 에르퀼 푸아로가 해결하는 사건을 생각해보라.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두뇌 회전을 보이지 않는가. 때로는 그 기대가 지나쳐서 보통 사람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수단을 써서라도 문제를 바로잡아주기를 원하게 된다. 추리소설 역사상 가장 사랑받은 주인공의 한 사람, 푸아로를 창조한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녀의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는 내용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에서 외딴섬에 모여든 남녀를 차례로 살해하는 범인은 전직 판사인 로렌스 워그레이브다. 판사 시절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도 증거가 없어서 무죄판결을 받거나 아예 기소조차 되지 않는 경우를 보고 분노하던 그는 직접 형벌을 집행하기로 결심한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얘기를 나누며 ‘자신이 죽게 한 생명에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는, 냉담하고 무감각한’ 살인자를 찾아다닌다. 마침내 10명을 모으자, 비밀리에 구입한 섬으로 초대를 한다. 그리고 한 사람씩 처단한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반전을 도입해 출간 당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는 . 이 소설에서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탐정 푸아로다. 로저 애크로이드라는 대지주가 살해당하자 주위 사람들이 의심을 받는다. 푸아로는 고전적인 추리 기법, 즉 범인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을 지워나가는 ‘소거법’을 이용해 한 명씩 억울한 사람의 혐의를 풀어준다. 그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나간 사람은 마을의 의사이자 소설의 화자인 셰퍼드 박사다. 말하자면 그는 셜록 홈스의 모험을 기록한 왓슨 박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내려는 푸아로에게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추리를 마친 푸아로는 셰퍼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범인은) 다름 아닌… 셰퍼드 선생입니다!”

»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그녀의 생전 모습과 추리소설 <커튼>. 한겨레 자료

»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에는 등장인물이 나름의 ‘정의’를 실현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그녀의 생전 모습과 추리소설 <커튼>. 한겨레 자료

셜록 홈스가 범인인 셈인

홈스가 왓슨 박사를 가리키며 범인이라고 소리치는 격이니 어찌 독자들이 경악하지 않았겠는가. 은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새로운 트릭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애거사 크리스티의 대표작이 된다. 그런데 푸아로는 셰퍼드를 사법 당국에 넘기지 않는다. 다만 이런 말을 한다. “(다음날 아침이면 모든 사실이 알려지겠지만) 당신의 착한 누이를 위해 기꺼이 다른 탈출구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수면제 과용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지요. 내 말 아시겠습니까?” 그날 밤 셰퍼드는 수면제인 베로날을 먹고 자살한다.

푸아로 최후의 사건인 은 한술 더 뜬다. 나이가 들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된 푸아로는 오랜 친구인 헤이스팅스를 스타일스 저택으로 초대한다. 반갑게 인사를 하는 헤이스팅스에게 푸아로는 5건의 살인사건이 나오는 신문 기사 스크랩을 보여준다. 겉으로는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고 범인이 누군지도 분명해 보이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푸아로는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X라는 인물이 있고, 그는 현재 스타일스 저택에 머물고 있다고 털어놓는다. 다만 증거가 없어서 누군지 가르쳐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푸아로가 범인으로 지목한 X는 묘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의 불화를 간교하게 부추겨서 살인을 저지르게 하는 것이다. 직접 범행을 하지는 않기 때문에 증거가 있을 수 없다. 결국 푸아로는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된다. X를 불러서 그의 범행을 샅샅이 말한 뒤, 부인하지 않는 것을 보고 X를 살해한다. 그 직후 푸아로도 자살을 한다. 의 범인이 왓슨 박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에서는 셜록 홈스가 범인으로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다.

을 읽고 반전에 감탄하는 사람은 많아도 푸아로를 심하게 비난하는 평은 찾기 어렵다. 교묘하게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해 살인을 저지르는 악인을 처단한 것을 그렇게까지 나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로서는 도저히 알아채기 어려운 단서를 놓치지 않고 진실을 찾아내는 푸아로가 지목한 범인이 아닌가. 더구나 범인을 죽인 뒤 자살함으로써 스스로의 행동에도 책임을 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이 출간된 지 60여 년이 지난 1998년, 프랑스의 대학교수 피에르 바야르는 라는 흥미로운 책을 쓴다. 그는 은 물론 애거사 크리스티 작품 전부와 그녀의 회고록을 철저히 분석해 애크로이드를 살해한 사람이 셰퍼드 박사가 아닐 수 있다는 결론을 설득력 있게 이끌어 낸다. 푸아로가 틀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진범은 누구인가? 바야르는 셰퍼드의 누이인 캐롤라인이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푸아로로부터 범인으로 지목받은 셰퍼드는 진범을 알고 있었지만, ‘착한 누이를 위해’ 자살을 선택한 것이다. 만약 바야르의 추리가 맞는다면 푸아로는 엉뚱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평범한 우리가 하는 일의 위태로움

바야르의 결론이 옳은지 혹은 푸아로의 추리가 맞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초인적으로 보이는 존재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평범한 존재인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는지 섬뜩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에 차서 벌였고 지금까지도 정당한 귀결로 여기는 많은 일들, 과연 그중에 오류가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역사에서 ‘정의’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많은 일들 중에 얼마나 많은 범죄가 있었을까. 초인이 존재한다 한들 그 질문에 쉽게 답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변호사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