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세기 유럽, 동판화로 제작된 채색 풍자화는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제임스 길레이 같은 풍자화가의 판화는 풍자만화의 원형이 되었다. 한 칸의 풍자만화로 시작한 근대만화는 ‘칸과 말풍선’이라는 두 놀라운 요소가 접목되며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식으로 완성된다. 칸은 만화의 온전한 발명품에 가깝다. 풍자화는 물론 중세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나 태피스트리, 고려의 사경변상화 같은 경우 한 화면을 여러 칸으로 쪼개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한 화면(페이지)의 칸을 분할한 이는 ‘서구 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로돌프 퇴퍼다. 퇴퍼는 1827년 재미있는 연작 그림 이야기를 만들어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줬고, 1831년 이 만화를 본 괴테의 권유로 출판을 결심해 1833년 (Histoire de M. Jabot)를 출판했다. 한 칸에서 두 칸, 세 칸, 네 칸으로 칸이 늘어나며 만화는 압축된 풍자와 계몽을 넘어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칸과 함께 만화에 적극 도입돼 캐릭터를 살리고, 극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 만화의 요소는 말풍선이다. 말풍선의 초보적 형태는 만화가 아니라 18세기 이전 중세의 종교화에 자주 등장했다. 독일 화가 베른하르트 슈트리겔의 (Saint Anne and Angel)를 보면, 천사의 입에서 나온 두루마리가 보인다. 중세 종교화에서 특정한 상황을 표현하려고 도입한 말 두루마리는 18~19세기 풍자만화에 풍선이나 방울 형태로 변형돼 사용되며 만화의 중요 요소가 되었다.
말풍선이 칸 안으로 들어가 만화의 중요 요소가 되자 놀라운 마술이 벌어졌다. 칸 바깥에서 머물러 있던 글을 칸 안으로 묶어준 것이다. 칸 안에 있는 인물의 대사가 따옴표 인용에서 탈출해 캐릭터에게 붙어버렸다. 독자는 말풍선과 꼬리의 위치를 보며 말풍선 안에 든 대사를 캐릭터의 소리로 듣는다. 문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사를 듣게 된다. 말풍선 하나로 인해, 만화의 문자는 시각요소에서 청각요소로 전환된다.
여기서 하나 더 놀라운 기적이 펼쳐진다. 사람이 아니더라도, 말풍선을 붙이면 말을 한다. 동물도 말을 하고, 심지어 사물도 생명을 얻는다. 마치 코에 생기를 불어넣듯, 말풍선을 붙여주면 칸 안의 모든 존재가 생명을 얻는다. 말풍선은 글과 그림을 통합하고, 시각을 청각으로 바꾼 뒤, 마침내 죽은 사물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창조의 기적을 행한다.
말풍선의 도입은 만화 연출에 혁명을 가져왔다. 말풍선 크기가 한정돼 있기 때문에 들어가는 대사의 분량도 줄어들어야 한다. 글의 함축이 일어났다. 초기 만화는 대개 그림보다 글이 길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 단행본으로 평가받는 김용환의 (1946)를 보면 한 쪽에 네 칸 그림이 있고, 그 옆에 길게 글이 있다. 이후 1950~60년대 박광현, 박기당 등의 만화도 글과 그림이 분리된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 강철수의 만 보더라도 그림보다는 글이 이야기를 끌어갔다. 그림을 지워놓더라도 이야기가 이해됐다. 그러나 요즘 만화는 그림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 마치 영화의 미장센처럼, 페이지를 구성하는 미장파주가 만화 연출의 힘이다. 한 페이지에 칸을 어떻게 구성할까, 한 칸 안에 인물을 어떻게 자리잡을까 같은 연출이 현대만화에서는 완성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데즈카 오사무가 영화적 연출을 도입하며 발전한 까닭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된 근본적 힘은 바로 말풍선에 있다.
말풍선의 기본 모양은 보통형, 구름형, 폭발형의 세 가지로 나눈다. 보통형은 일반적 대사, 구름형은 독백, 그리고 폭발형은 큰 소리를 암시한다. 다시 보통형은 네모칸과 타원형으로 구분되는데, 서구의 만화는 네모칸을, 동양 만화는 타원형을 선호한다. 서구 만화가 네모칸을 선호하는 까닭은 말풍선 안에 담는 대사의 양이 많아서다. 많은 독자들이 일본 만화 연출이 다이내믹하다고 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말풍선 모양 때문이기도 하다. 세로쓰기를 하는 일본은 말풍선이 세로로 길다. 그래서 세로로 긴 칸을 활용하기 쉽다. 세로로 긴 칸은 가로로 긴 칸보다 더 다이내믹하다. 말풍선은 만화의 많은 부분을 규정한다.
박인하 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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