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항쟁을 이끈 전봉준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었다. 일본공사가 배후에서 조종한 형식상의 재판에서 재판관이 “너는 피해가 없었다 하는데 무엇 때문에 난을 일으켰느냐?”라고 묻자, 전봉준은 “한 몸의 피해가 있다고 들고일어나는 것이 어찌 남자의 일이라 하겠느냐? 여러 사람이 원망과 한탄을 하기 때문에 백성을 위해 해악을 없애고자 일어섰다”고 대답했다. 썩은 조선왕조와 일본의 침략에 맞섰던 전봉준은 바로 백성의 원한을 풀기 위해 농민군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공익 추구세력이 불순분자인 시대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할 무렵에 고관대작이 아닌 몰락한 양반, 유생이나 중인 하층 출신 지식인 중 일부는 유교적 가르침에 따라 공인(公人)의 덕목을 실천했는데, 의병운동에 투신한 사람이나 망국의 한을 품고 자결한 매천 황현, 가산을 정리해 만주 독립운동을 지원한 이회영, 이동영 가문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전봉준과 이후의 독립운동가들은 유교적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논리가 아닌 만민평등의 새로운 사상에 입각해 민족과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투쟁에 나섰다. 근대적 공인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는 선량한 국민이 되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천황에게 충성하고 오직 가족만 돌보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일부 조선인들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처자를 배불리 먹이기 위해 일제의 밀정이나 경찰, 군인이 되었다. 그런데 근대적 공적 가치를 위해 헌신한 항일운동가들의 다수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며, 살아남은 사람도 구타, 고문, 정신적 고통의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살아난 항일 인사들 상당수가 해방 뒤 국가나 민족의 지도자로 대접받기는커녕, 일제가 남기고 간 그들의 대리자들, 즉 일제하에서 처자식 배불리 먹이려고 일제의 끄나풀 노릇을 서슴지 않던 사람들의 손에 ‘해방된 나라’에서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는 점이다. 사익을 추구한 사람은 지역사회의 ‘유지’, 즉 ‘우익’이 되었고, 공공의 대의에 몸을 던진 사람은 빨갱이 혹은 또다시 불순분자가 되었다. 그리고 사익추구자들은 일본 경찰이 항일 인사들을 감시·색출하려고 만든 명단을 활용했으며, 이후 이들을 주로 전향한 좌익으로 구성된 국민보도연맹으로 묶었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살했다.
경남 김해는 일제 시기부터 농민조합운동과 야학운동이 활발한 곳으로 유명했다. 김해의 김정태·강성갑 등은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에 진력해온 인물이었는데 지역사회에서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강성갑은 진영 한얼학교 설립자로 사재를 털어 교육운동에 헌신했으며, 김정태는 1919년 3·1운동 당시 진영만세의거를 주도해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독립군에게 자금도 제공했다. 그런데 해방 뒤 지역의 일제 끄나풀들은 이들을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특히 강성갑에 대해서는 “진영이 고향도 아니면서 진영에 머물러 교육사업입네 하는 것이 아니꼽다”고 말들을 했다고 한다. 김정태를 향해서도 해방 뒤 그가 3·1절 행사 때 이승만 정부의 행사에 참가하지 않고 김구의 행사에 참가하자 일제 시기 교사를 하다 여학생 추행사건으로 면직된 경력이 있는 강백수는 그를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했고, 결국 그는 전쟁 발발 직후 학살되고 말았다. 전쟁 발발 직후 진영읍의 우익계 비상시국대책위원회 구성원인 이석흠·이병희·김윤석·강백수 등이 ‘사설군법회의’라는 사설단체까지 조직해 학살을 기획·집행했다고 한다. 이석흠·김윤석·강백수 3명은 1950년 7월27일 지서 주임 김병희, 청방단장 하계백과 밀회해 강성갑을 살해할 것을 모의했으며 곧바로 낙동강변에서 카빈으로 그를 살해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미국 선교단체와 유엔한국재건단(UNKRA)이 최초로 문제제기해 미국 언론에까지 보도되었는데, 이승만 정권은 사건이 시끄러워지니 김병희 등을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후 김병희는 사형을, 나머지는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형이 집행된 사람은 김병희뿐이고 나머지는 한 달도 못 돼 석방되었다. 당시 계엄민사부장이던 김종원이 3천만환을 받고 이들을 석방시켜주었다는 소문이 있다. 한편 진영여자중학교 교사였던 김영명은 결혼한 지 6개월밖에 안 된 신혼이었고 미모나 인간성으로 주위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으나 지서 주임 김병희가 오빠 김영봉의 은신처를 캐묻다가 그녀를 성폭행하고 고문치사 뒤 암매장했다. 김영봉, 김영명의 부친 김성윤이 일제 때부터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지역 내 후진을 해외유학까지 보낸 인물이었으나 진영읍내의 각 기관의 ‘유지’들은 이를 시기해 한국전쟁 발발을 계기로 이들을 몰살시키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좌익계열의 추대를 빌미삼아
그 뒤 학살당한 김정태의 아들 김영욱은 4·19 직후 부친의 억울함을 풀고자 유족회 활동을 했다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생존시 부친의 죽음은 “아무 이유도 없는 죽음”이라고 말했고, 도대체 진영의 학살사건은 ‘엉망진창 사건’이라고 술회했다. 일제 때부터 친일했던 사람들이 무고해서 멀쩡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았다는 것이다.
한편 경기 남양주에서도 반이승만 노선을 걷는 우익계 독립운동가들을 군경이 살해했다. 남양주 진건·진접 에는 1919년 3월31일 진접면 부평리 광릉천 일대에서 3·1운동 시위가 벌어졌는데, 당시 시위를 주도한 사람은 김성숙·강완수·이순재·김석로·현일성(현상규) 등 봉선사 승려들이었으며 그들은 문건을 제작해 배포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감옥살이를 했다고 기록돼 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봉선사 운허 스님(이학수)이 광동학교를 설립했으며 이 학교에서 김구 선생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한국전쟁 직전 이 지역은 봉선사를 중심으로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며 진보적으로 사회참여를 하려는 분위기가 높았으며, 봉선사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현상규와 그의 처 백추파는 피신하지 않고 있다가 1950년 10월15일께 진접지서에 끌려가게 되었다. 서울 전매소에서 일하던 그들의 아들 현인섭도 이 소식을 듣고 남양주로 들어오다가 잡혀 진접지서에 갇혔다. 이들은 국군이 수복한 뒤 1950년 10월21일(음력 9월11일)께 인민군 치하에 살아남아서 그들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진접면사무소 뒷산에서 살해되었다.
해방 뒤 스스로 대중 앞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더라도 중립적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던 사람들은 지역사회에서 신망이 있었기에 좌익 계열 사람들이 이들을 지역의 지도자로 추대하려 했고, 그것이 빌미가 되어 학살당한 사례도 있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여수여중 교장이던 송욱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제 시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적도 있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난 직후 여수시에 남아 있다가 좌익계 교사들이 지지 연설을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물러간 직후 진입한 토벌군은 그를 반란군의 수괴로 몰아 학살했다. 반란군 치하에서 살아남았고 그들에게 추대되었다는 이유였는데, 사실 그것은 이승만 쪽이나 현지 토벌군의 실수로 보기 어려웠다.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당시 눈에 거슬리는 존재였던 김구의 배후 음모설을 계속 퍼트렸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이승만 세력에게 남북협상을 추구한 김구는 사실상 빨갱이와 같은 존재였다.
‘친일 콤플렉스’가 낳은 잔인한 보복
해방 뒤 반이승만 노선을 걸었던 항일 경력자들이 빨갱이로 몰린 것은 마산시에서 공식적으로는 전향한 좌익을 감시·통제하려 만든 국민보도연맹 가입 범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경남 마산시 지부는 1949년 12월7일 지부 결성 이후 1950년 1월5~20일을 ‘가맹주간’으로 설정해 가맹 대상자를 지정했는데 그중에는 △ 미소공위 마산시민축하대회에 시민으로서 대열에 참가한 자 △ 모스크바삼상회의를 지지한 자 △ 10월 폭동에 의식·무의식으로 가담한 자 △ 민전 산하 사회단체에 물자 및 금품 제공 조달 협력자 등이 포함돼 있다. 이는 사실상 1946년 이후 이승만 한민당 계열 극우단체의 활동을 제외한 미군정의 보리공출 반대 등 공공집회 및 민족주의·좌익·중도좌익 주도의 집회에 참가했거나 단체에 가입했거나 그러한 활동을 사적으로 지원한 사람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사인(私人)으로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활동, 특히 공적인 사회활동을 한 거의 모든 사람을 포괄한 것이었다. 물론 당시 미소공위나 모스크바삼상회의를 지지한 사람의 대다수는 좌익 계열이었지만, 통일정부 수립을 원한 다수의 우익계 항일운동가들도 이승만식 단독정부 수립은 전혀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이 범위에 속해 보도연맹에 가입당한 사람들은 이후 대부분 피살당했는데, 이렇게 보면 보도연맹 피학살자 중에는 미군정에 반대하고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 광범위한 지역 지도자들이 포함되었다는 말이 된다.
진영이나 남양주 지역처럼 좌익과 전혀 무관한 우익계 독립운동가들이 이들을 시기하던 지역 내의 ‘유지’, 주로 친일 경력을 가진 사람들의 모함에 의해 전쟁 통에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한 사례는 전국 방방곡곡에 무수히 많다. 이 우익계 항일운동가들은 해방 뒤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재기용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하려 하자 그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고, 바로 그러한 입장 때문에 그들은 좌익으로 몰렸다. 미군정에 의해 재기용된 친일 경찰이나 관리들은 과거 그들의 행적을 알고 있을뿐더러 그들에게 고통받았던 이들이 자기 눈앞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큰 위협이었다. 전국 모든 지역에서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모두가 “똑똑해서 주위 사람들이 시기를 했다”라고 말한다. 똑똑했다는 말은 일제 때나 해방 뒤 지역사회의 지도자급이었다는 말과 같다. ‘시기’는 사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유지들의 친일 콤플렉스를 말하는 것이고, 그 콤플렉스 때문에 그것을 공격하는 사람에게 잔인하게 보복을 가한 것이다. 수년 전 작고한 노촌 이구영 선생처럼 해방 뒤 경찰에 구속된 옛 독립운동가들은 일제 말에 자신을 고문했던 경찰들에게 또다시 고문당하는 어이없는 일을 많이 겪었다.
제거됐어야 할 ‘위험인물’
결국 한국전쟁 전후 빨갱이로 몰려 죽은 사람들 중에는 다수의 항일운동가가 포함돼 있었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들은 친일 경찰이나 친일 인사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죽임을 당했다. 친일 경력자로 채워진 이승만 정권과 그 하수인들에게 독립운동 경력을 가진 사람들은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들은 제거됐어야 할 ‘위험인물’이었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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