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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과거가 아니다

등록 2012-08-31 13:53 수정 2020-05-03 04:26

김종인씨의 행보는 문제적이다. 그는 대표적 경제민주화론자다. 그런데 ‘재벌당’으로 불리는 새누리당의 재집권을 돕는다. 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 사회가 바뀌려면 주류 기득권 질서를 대표하는 새누리당이 바뀌어야 한다고. 그래서 박근혜 후보를 돕는다고. 궤변이라는 냉소에서 적확한 진단이라는 칭송까지 평가가 엇갈린다. 어찌됐든 김종인씨는 ‘여당 내 야당’을 자임하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쏟아왔다.
박근혜 의원이 지난 8월20일 새누리당의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지지율 84%, 압도적 지지다. 사상 첫 여성 대통령 후보이자, ‘대통령 아버지’를 둔 첫 후보다. 박 후보의 아버지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일으켜 18년간 장기 집권한 독재자다. 헌법과 법률은 쿠데타를 내란죄로 엄벌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헌법 수호’는 대통령의 책무다(헌법 66조 2항). 그런데 박 후보는 5·16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 평가한다. 역풍이 거세자 박 후보는 이런 말도 했다. “5·16에 대해 혁명이라고 교과서에 나온 적도 있었고, 군사정변이라고 한 교과서도 있고, 쿠데타라 한 교과서도 있다. 정치권에서 (한쪽으로) 몰아가면 국민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그러곤 역사를 과거라 치부하고, 정치를 민생과 대치시켰다. 이런 식이다. “할 일이 산더미 같고 힘든 민생이 놓여 있다. 과거로 자꾸 가려고 하면 한이 없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말이 아니라도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오늘의 어머니이자, 내일의 문을 열 열쇠다.
박 후보의 역사관엔 일제에 “죽음으로써 충성”을 혈서로 맹세한 만주군 장교 출신인 아버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우리 대한민국은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강조했다. 헌법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강조한다. 8·15를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박 후보의 역사관은, 한국의 역사를 1948년 분단 정부 수립 이후로 한정하는 이명박 정부의 뉴라이트 사관과 닮았다.
박 후보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 ‘국민대통합’을 시대정신으로 꼽았다. “경제민주화는 국민 행복의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한국형 복지제도를 확립하겠다”고도 했다. 그 와중에 2007년 대선 당내 경선 때 내놓은 ‘줄·푸·세’(감세·규제철폐·법치) 공약이 경제민주화와 상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법인세 인하, 증세를 전제하지 않은 복지재정 확충 따위를 외친다. 인식과 논리가 수미일관하지 않다.
대선 후보 확정 직후 박 후보는 “참 나쁜 대통령”이라 비난했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묘소를 찾았고, 아버지의 최대 정적이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씨를 방문했다. ‘정치쇼’라는 냉소가 있지만, 박 후보 스스로는 ‘국민대통합’을 위한 행보라 의미 부여했다. 박 후보의 속내가 어떻든, 그 행보 자체는 나쁠 게 없다.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안철수 룸살롱’과 ‘박근혜 콘돔’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다투는 이 갈라진 땅에서, 박 후보의 ‘국민대통합’ 행보가 정치적 반대자들의 마음을 정말로 눅일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된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김종인씨의 바람과 달리, 여러모로 헌법에 어긋나는 역사관을 지닌 박 후보가 ‘국민대통합’과 ‘경제민주화’의 험난한 길을 완주할 의지와 능력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이런 생각이 편견이란 걸 박 후보가 입증해주면 좋으련만. 영화 속 기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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