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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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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사악하고 유해한 운동장이여

국내 5개 야구장 석면 검출, 폐타이어 흡입이나 화상 위험에 노출된 인조잔디구장… 안전하게 뛰놀 공간은 사라져만 가네
등록 2011-10-07 16:05 수정 2020-05-03 04:26
지난 9월3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가 발암물질인 석면이 검출된 야구장인 서울 잠실구장, 인천 문학구장, 부산 사직구장에서 시즌 잔여 경기를 계속 하는 것에 반대하며 방진마스크와 방진복을 입은 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지난 9월30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가 발암물질인 석면이 검출된 야구장인 서울 잠실구장, 인천 문학구장, 부산 사직구장에서 시즌 잔여 경기를 계속 하는 것에 반대하며 방진마스크와 방진복을 입은 채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나는 어렸을 때 ‘예쁘다 의상실’의 유리창을 자주 깼다. “나는 패스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는 카뮈의 아포리즘처럼, 내가 찬 공은 ‘예쁘다 의상실’과 좌우의 이발소나 구멍가게의 유리창을 박살냈다. 어떤 때는, 내가 그러지도 않았는데, 가게 주인들이 유리창이 깨지면 어김없이 우리 집으로 왔고 아버지는 ‘이 녀석이 또…’ 하며 유리 값을 물어줬다. 마땅히 뛰어놀 운동장이 없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있었고, 수업이 끝나면 그들이 운동장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만원 관중의 석면 야구장

사정은 중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중학교 체육 시간 때, 선생님은 공 몇 개를 휙 던져주고는 체육실로 되돌아갔고, 때마침 체육 시간을 맞은 대여섯 반의 학생들 백수십 명과 더불어 사육장의 닭처럼 몰려다녔다. 아쉬움을 풀기 위해 수업 뒤에 몇 명을 규합해 공을 차려 하면, 저 일제시대의 김용식 옹을 비조로 하여 메르데카컵의 김진국과 박스컵의 차범근과 훗날 2002 월드컵의 유상철 등을 줄줄이 배출한 이 축구 명문의 선수들이 이미 운동장 전체를 완전히 장악한 다음이었다.

고등학교에서도 공을 차기 어려웠다. ‘셀프 탄핵 시장’이 다니기도 했던, 이 고등학교는 서울 정릉의 산꼭대기를 깎아 건물을 많이 세우고 그 사이에 운동장이랄 것도 없는 공간을 만들어놨는데, 고교·여상·여중(나중에는 외고까지) 등 각급 학교에서 동시에 열 반이 넘는 학생들이 나와서 맨손체조 중심으로 몇 번 팔을 휘젓다 말았다. 그게 체육 시간이었다. 수업 뒤에도 사정은 마찬가지. ‘명문대 진학이 나라에 충성’이라는 훈시에 따라 개미새끼 한 마리도 운동장을 어슬렁거리면 안 되었고, 공부 잘하는 애들은 도서관으로 가고 그 대열에서 이탈한 애들은 집으로 쫓겨났다. 나는 그때부터 광화문과 종로를 배회했다.

이토록 씁쓸한 기억들이지만, 그래도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의 추억은 남아 있다. 초등학교 뒷산의 예비군 훈련장에서 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뽈’을 차던 기억이나 다른 중학교 운동장에 공 차러 갔다가 그 학교 학생들과 살벌한 ‘더비’를 벌였던 기억들! 그러다가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그야말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 되어, 건물도 사람도 공도 어둠에 포박되고 저 멀리서 저마다의 아이들 이름을 외쳐 부르는 소리가 들리던, 그런 기억들은, 애틋하다.

숨가쁘게 보도된 대로, 관중 600만 시대를 달려가는 프로야구가 ‘석면 공포’에 휩싸였다. 환경보건시민센터가 소중한 일을 해냈다. 환경부도 뒤늦게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환경부는 국내 5개 야구장 관계기관에 사용 중지를 요청했다. 어느 구장보다도 관중의 운집과 열기가 뜨거운 잠실·사직·문학구장과 경기도 수원과 구리의 야구장 등 5개 야구장이 그 대상이다. 그러나 한국야구위원회(KBO)는 ‘경기장 사용 중단은 곧 리그 중단’이라며 그라운드에 쉼없이 물을 뿌리며 시즌을 강행하고 있다.

석면 공포는 프로선수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전국 8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도 석면이 검출되었다. 이들 학교에서는 운동장을 비닐로 덮고 학생들의 사용이나 보행을 통제하고 있다. 경기도 과천의 한 고등학교 운동장도 폐쇄된 상태다. 보도에 따르면 이 고등학교는 지난해 말 5억원을 들여 사문석이라는 광석 알갱이로 운동장을 포장했는데,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조사 결과 석면이 검출되었다. 잠실·사직·문학 등의 내야에 깔린 동일한 광석 알갱이다. 사직과 문학은 포스트 시즌까지 치러야 하는 구장이다.

인조잔디구장도 발암물질 검출 논란

문제는 석면만이 아니다. 최근 몇 해 사이에 각급 학교와 시민체육공원에 사용되고 있는 인조잔디도 그 유해성 문제가 끝없이 제기돼왔다. 2005년에 나는 신문선 해설위원과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그 무렵 경향 각지에서 인조잔디 공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신문선 위원은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최근 경기도 여주군에서는 인조잔디에서 발암물질인 환경호르몬(PAHS)이 과다 검출돼 논란이 일고 있다. 군내 각 체육공원에 시설한 인조잔디가 환경호르몬 검출 위험이 높은 저가 제품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저가의 인조잔디는 햇볕에 약해 환경호르몬이 과다하게 검출될 수 있다. 일부 인조잔디에서는 충격완화제로 폐타이어 알갱이를 쓰기도 한다. 독자들 중에 인조잔디에 공 차러 갔다가 좁쌀만 한 까만 알갱이가 튀어오르는 걸 본 이가 있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문제의 그것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06년부터 인조잔디에서 학생들이 화상을 입을 것을 우려해 스프링클러 설치를 필수로 규정했지만, 그것을 제대로 지키는 곳도 드물다. 인조잔디의 충격은 허리와 무릎에 그대로 전해지고 슬라이딩할 때는 찰과상과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다.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에 비해 인조잔디 운동장은 시공비는 물론 관리 비용도 적지 않다. 대략 3억5천만~5억5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설치하지만 5년 정도 사용하고 나면 전면적인 개·보수를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일부 학교에서는 정해진 체육 수업이나 행사를 제외하고는 학생들이 이용할 수 없도록 통제한다. 맘 놓고 공 찰 데가 사라지는 중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조차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서울의 인구과밀 지역이나 수도권의 아파트 난개발 지역에는 운동장 없는 학교, 운동장 없이 주변에 간단히 체육 수업을 할 수 있는 대체 공간을 겨우 확보한 학교, 운동장이 있긴 한데 너무 협소해서 ‘사실상 운동장’이라고 불러야 하는 학교 등이 늘고 있다. 2007년 4월 국무회의를 통과한 ‘고등학교 이하 각급학교 설립·운영 규정’ 개정안에 따라 도심지의 경우 기준 면적의 3분의 1 범위 안에서 학교를 지을 수 있게 되어 이후 운동장 없는 학교가 점점 늘어난 것이다.

사라진 운동장의 추억

석면 공포가 엄습하는 운동장, 폐타이어 흡입이나 화상 위험에 노출된 운동장, 유지·관리를 위해 수업 이외에는 출입 금지되는 운동장, 심지어 그런 공간조차 점점 사라지고 마는 대도시의 교육 현실. 이런 상황이라면, 내 어린 시절 유리창을 박살내던 동네 골목이나 흙먼지 뒤집어쓰며 뛰던 운동장의 추억이란, 오히려 고귀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가, 슬프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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