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에서 물건을 담고 있는데 한 남자가 불쑥 앞으로 다가왔다. 자신은 ‘운반·조립 전문가’라며 200위안(약 3만5천원)만 내면 운반에서 조립까지 신속하게 처리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조립용 책상을 꺼내서 카트에 담을 때부터 나를 ‘표적 삼아’ 노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택시로 싣고 갈 부피가 아니었기에 그의 제안이 내심 반갑기는 했다. 예전 같으면 이케아 앞에 봉고차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손님이 나오면 우르르 몰려와서 경쟁적으로 흥정하곤 했는데,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인지 단속 때문인지 통 보이질 않는다.
봉고차에 물건을 싣고 가는 길에 입담 좋은 그 남자는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헤이룽장성에서 온 류씨라고 소개한다. 명함을 한 장 건네면서 무거운 물건이나 간단한 이삿짐 운반, 물건 조립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자신에게 연락하라고 했다. ‘바람처럼’ 달려가서 ‘신속 정확하게’ 일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가격도 ‘친구 가격’으로 해주겠다면서 말이다. 그는 고향 헤이룽장성의 국유기업에 다니다가 퇴직연령보다 훨씬 더 이른 나이인 오십 무렵에 회사와 상의해서 ‘내부 퇴직’(기본급만 받는 조건으로 미리 퇴직하는 제도)을 하고 베이징에 와서 ‘늙은 다공족(임시직 노동자)’ 생활을 한다고 했다. 수익성 없는 공장에서 매달 1천위안도 안 되는 기본급만 받고 허송세월하느니 베이징에 와서 ‘몸 쓰는 일’을 하는 게 훨씬 더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에 오기 전 잠깐 허베이성 스자좡의 공사장에서 일했는데 일이 너무 힘들어서 때려치우고 고향 사람 소개로 중고 봉고차 하나를 헐값에 사서 물건 운반이나 출장 수리, 조립 같은 ‘서비스업’을 하고 있단다. 2020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일이 없어져서 고향으로 돌아가 거의 1년 동안 고향집 ‘흙만 파먹고’ 살다가 연말에 다시 베이징으로 와서 돈벌이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렇게 드문드문 돈을 벌었다간 곧 굶어죽을 것 같다며 베이징에는 파먹을 흙도 없다고 뭐가 웃긴지 혼자 껄껄 웃었다.
그는 눈앞에 닥친 가장 큰 문제는 주거비용이라고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케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성중촌(城中村·도시 속 촌락)에서 한 달에 500위안(약 8만5천원) 정도면 작은 방 하나를 월세로 살 수 있었는데, 2017년부터 곳곳의 성중촌이 연달아 철거되면서 더는 발붙이고 살 곳이 없단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1년 전부터 고향 사람 7명과 함께 원룸 아파트를 공동으로 빌려서 살았는데, 각자 내야 하는 비용도 성중촌의 일인실보다 훨씬 비싸고 주거 질도 더 나빴다. 베이징은 온통 시골 사람 등쳐먹는 ‘도둑놈들의 세상’이라고 욕하던 그는 또 뭐가 웃긴지 껄껄 웃었다.
20여 년 전, 베이징에 처음 와서 온종일 집을 구하러 다닐 때 나도 비슷한 설움을 느꼈다. 전봇대에 붙은 ‘원룸 세입자 구함’ 광고지 수십 개를 들고 동네를 이 잡듯이 다녔지만 원하는 가격대의 방을 구할 수 없었다. 베이징은 ‘소문대로’ 월세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러다 해거름이 되어 아파트 창문에서 하나둘 불빛이 켜지자 갑자기 서러움이 왈칵 밀려왔다. 저 불빛 속에 내가 살 작은 방 한 칸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다.
1995년 저장촌 ‘청소 작업’ 진행어렵사리 구한 낡은 아파트 주변에는 성중촌이 즐비하게 있었다. 성중촌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땅에 벽돌이나 슬레이트로 집을 지어서 작은 촌락을 형성한 곳이다. 주로 도시 빈민과 농촌에서 도시로 돈 벌러 온 농민공이 거주한다. 집주인은 대부분 원주민인데, 그들은 토지가 수용돼 철거가 결정되면 일정한 보상금을 받을 수 있다.
처음 구한 베이징 아파트 주인도 원래는 근처 성중촌에 살다가 개발보상금을 받고 철거민을 위해 지은 정착주택(安置房)으로 이사한 이였다. 그는 베이징 원주민이어서 보상금도 받고 정착주택도 분양받았지만, 그곳에 세들어 살던 외지 농민공은 철거가 결정되면 그냥 대책 없이 나와야 한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베이징 곳곳에 성중촌이 많아서 농민공과 도시 빈민이 살 곳을 찾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말이 촌락이지 성중촌 내부에는 식당과 이발소를 비롯해 인력소개소, 각종 상점, 피시방과 당구장 같은 오락시설, 심지어 병원 구실을 하는 보건소 등 웬만한 편의 시설은 다 있었다. 소도시 같은 곳이었다.
당시 베이징 성중촌은 저장촌, 신장촌, 허난촌 등 동향민 집단 촌락이 많이 형성돼 있었다. 저장촌은 1980년대 초반 이후 베이징에서 가장 큰 규모를 형성하던 동향촌이었다. 대부분 저장성 원저우 출신 사람들이 베이징 남쪽 무시위안 일대에 집단 촌락을 형성해 살면서 복장 도소매업에 종사했다. 거주 인구만 10만 명이 넘어서 웬만한 대형 아파트 단지 규모를 능가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저장촌을 중심으로 각종 범죄사건이 일어나고 빈민굴화하는 조짐이 보이자, 1995년 베이징시 정부는 저장촌에 대한 대대적인 ‘청소 작업’을 진행했다. 촌락은 강제 철거됐고, 주민은 뿔뿔이 주변 외곽으로 흩어졌다.
베이징시는 저장촌 정리 작업을 계기로, 1995년 8월 정식으로 공안국 산하에 외래인구관리처를 만들어 농민공 등 외지에서 온 유동인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다. 저장촌 규모를 줄여 외지 인구와 베이징 원주민 거주 비율을 일대일로 조정하고, 기존에 있던 70% 정도의 외래인구를 베이징 밖으로 ‘축출’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전후해 베이징 내 다른 성중촌도 하나둘 철거됐고, 그 땅에는 새 아파트와 주상복합건물이 속속 들어섰다. 베이징 부동산 개발 붐이 일던 시기였다.
개발업자에게 베이징은 19세기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처럼 노다지를 캐는 ‘황금의 땅’이었다. 마찬가지로 농민공에게도 베이징은 기회와 꿈의 땅이었다. 하지만 개발업자가 자신의 황금주머니를 늘릴수록 농민공들의 기회와 꿈은 작아졌고, 처음 이 도시에 발붙이고 살 수 있게 해준 ‘디딤터’인 그들의 거주지도 사라져갔다.
“충칭시에는 류궁리(六公里)라는 성중촌이 있다. 왕젠 일가의 공장 겸 숙소가 있는 곳도 류궁리다. 39살 왕젠은 고향에서 2년 동안 목공으로 일해서 모은 700위안을 들고 이곳에 왔다. 그는 작은 방 하나를 얻어 버려진 나무와 철을 주워서 중식 목욕통을 만들어 팔았다. 1년 뒤 돈을 모은 왕젠은 작업실을 넓혔고 고향에 있는 아내와 아들, 며느리와 어린 손주까지 데리고 왔다. 그들이 사는 공간은 좁고 밀집돼 최소한의 프라이버시조차 지킬 수 없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서 적당한 생계 방식을 찾기만 한다면 가족과 자손은 성공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농촌에선 아무리 노력해봤자 배나 곯지 않을 정도밖에 얻을 수 없다’고 왕젠은 말했다.”
캐나다 언론인이자 작가인 더그 손더스가 쓴 <어라이벌 시티>(Arrival City, 2012년 중국에서 번역출판)의 시작은 중국 충칭시에 있는 성중촌 류궁리에 대한 이야기다. 손더스는 류궁리에 사는 농민공이 도시에서 분투하며 계급 사다리를 하나씩 밟고 올라가는 과정을 취재하고 관찰하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려준다. 외부인이나 도시인이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빈민굴에 불과하고 주류 계층 진입에 실패한 사람들의 집단거주지처럼 보이지만, 성중촌은 농민공과 도시 빈민에게는 세상의 중심을 향해 첫발을 내디디게 해주는 삶의 디딤터(落脚城市)가 된다고 말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저렴한 생존비용으로 공동체가 제공하는 여러 생존 비법을 배우면서 차츰 새로운 계급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80년대 이후 한국 역시 많은 농촌 인구가 서울로 이주했다. 중국 농민공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서울에서 처음 정착하는 곳은 ‘달동네’였다. 1990년대 중반 최고 인기 드라마였던 <서울의 달>을 기억해보라. ‘가슴에 제비를 품고 다니는’ 양아치(홍식)와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춘섭), 그리고 그곳에 살던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시 옥수동 같은 달동네가 없었다면,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했을까.
2017년 9월27일 중국 국무원은 ‘베이징시 총체규획(2016~2035년)’안을 발표했다. 이 규획에 따르면 2020년까지 베이징시는 인구를 2300만 명 수준으로 통제하겠다고 했다. 참고로, 2019년 베이징시 인구는 약 2150만 명이다. 2020년 이후에도 계속 ‘상주인구’를 2300만 명 정도로 통제할 것이라고 했다. 베이징시는 이미 2015년부터 ‘대도시병’에 걸린 베이징의 고통을 완화해야 한다는 이른바 ‘수도소해’(首都疏解) 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외래인구 과다 유입으로 수도의 핵심 기능이 마비되고 공기오염과 자원낭비 등이 심해 과부하가 걸린 베이징을 고통에서 구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조치는 ‘필요 없는’ 인구를 베이징 밖으로 축출한 것이다. 베이징 내 핵심 6개 지역에 인구 축출 할당량도 정해졌다. 그 결과 ‘불필요한’ 100만 명 이상이 축출됐다. 중국 정부는 이들을 ‘디돤런커우’(低端人口·농민공 등과 같은 도시빈민층)라고 불렀다. 그다음 베이징시는 수도의 핵심 기능을 정치와 문화 중심 도시, 국제 교류와 과학기술 창신 중심 도시로 압축했다. 이 네 가지 핵심 기능과 부합하지 않는 기관이나 사업체도 향후 5년 내에 베이징 중심에서 철수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네 가지 기능에 부합 않는 ‘디돤런커우’2017년 디돤런커우를 축출하는 작업이 시작되면서 그들이 살던 수많은 성중촌도 대부분 철거됐거나 철거될 예정이다. 더 나아가 ‘베이징은 더는 모험가들의 낙원이 아니다’라며 ‘전문성과 특수한 장점, 능력, 안정적 수입이 없는 사람’은 베이징을 떠나라고 한다.
이케아 앞에서 봉고차로 물건 운송과 조립을 하며 살아가는 류씨도 조만간 베이징을 떠나야 할 것이다. 네 조건 중 하나도 맞지 않고, 무엇보다 더는 이 도시에 거주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성중촌은 도시로 들어가는 문턱이자 디딤돌이었지만 이제 그 공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다. 베이징시 계획은 2021년 베이징시에 남아 있는 모든 성중촌을 완전히 철거할 예정이란다. 그들이 모두 떠나간 베이징 하늘에는 어떤 해와 달이 뜨고 질까. ‘전문성과 특수한 장점, 능력, 안정적 수입을 가진’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도시에는 “못 쓰게 된 나사를 폐기하는 ‘은혜로운 분’의 능숙하고 무거운 손이 있고 ‘보안요원’의 숙련된 눈이 있을지니…”(예브게니 자먀찐, <우리들> 중). 잘난 당신들이여 잘 먹고 잘 사시게나.
베이징(중국)=글·사진 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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