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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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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구호가 잘되면 더 밀려온다?

‘난민 교육 금지’ 정책으로 교육받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집에서 지내는 난민들
등록 2014-05-09 02:47 수정 2020-05-02 19:27
방글라데시 미등록 로힝야 난민캠프. 당국의 비협조로 한 비정부기구(NGO)만이 제한적으로 구호활동을 펴고 있으며, 식량 구호는 전혀 없다. 대부분의 주거지는 대나무와 짚을 엉성하게 엮은 수준으로 매우 촘촘히 붙어 있고 그중 몇몇은 ‘주저앉은’ 모양새다. 그동안 기자가 접해본 수많은 난민캠프 중 가장 열악한 환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방글라데시 미등록 로힝야 난민캠프. 당국의 비협조로 한 비정부기구(NGO)만이 제한적으로 구호활동을 펴고 있으며, 식량 구호는 전혀 없다. 대부분의 주거지는 대나무와 짚을 엉성하게 엮은 수준으로 매우 촘촘히 붙어 있고 그중 몇몇은 ‘주저앉은’ 모양새다. 그동안 기자가 접해본 수많은 난민캠프 중 가장 열악한 환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기는 어떤 캠프에도 들어오지 않는다. 주거자재·식량 등 구호물자를 받을 수 있는 등록 난민 3만 명은 쿠투팔롱 등록 캠프와 나야파라 등록 캠프 두 곳에 나뉘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유엔난민기구(UNHCR)를 통해 보름에 한 번 쌀·달(남아시아 식단 필수 품목인 콩죽)·설탕·소금·밀가루를 받는다. 월 1회 한 가정당 식용유 1ℓ를 배분받는다. 5살 때 부모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해 쿠투팔롱 캠프에서 22년간 살아온 난민 무하마드 라피크(27·가명)는 “커리나 반찬류 등 먹거리가 부족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난민캠프 내 어린이 10명으로부터 한 달에 20타카의 수업료를 받으며 매일 밤 2시간씩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캠프에서 영어와 버마어를 가르쳐 부수입을 얻고 있다.

올해 들어서야 중등 허가… ‘잃어버린 세대’

“가르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수업을 하다가 경찰이 뜨면 망보던 부모들이 ‘떴다!’를 외치고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 역시 도망치기 바빴다.”

쿠투팔롱 등록 캠프에서 ‘몰래교사’ 노릇을 하다가 지금은 말레이시아에 사는 사덱이 쓴웃음을 지으며 회상한다. 그때란 1994년이다. 20년 가까이 지난 오늘,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야파라 등록 캠프에 사는 안와르(19·가명)는 2년 전 캠프 안에 ‘도서방’을 만들다가 CIC(Camp-in-Charge)라 불리는 캠프서기(방글라데시인) 요청으로 출동한 경찰에 붙잡혔다. 방 안에 있던 학생들도 모두 연행되었다. 연행 중 구타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학생도 생겨났다.

“나는 그저 방글라데시 책, 버마 책 등을 모아 방에 비치하고 아이들이 와서 읽기를 바랐을 뿐인데….”

방글라데시 정부의 ‘난민 교육 금지’는 1996년 초등 과정을 허용하면서 무효가 되었다. 그러나 중등 과정을 허용하기까지는 17년 이상이 걸렸다. 쿠투팔롱 등록 캠프는 2013년, 나야파라 캠프는 올해 들어서야 중등 과정 허가가 났다. 나야파라 캠프에서 교사로 일하는 난민 마수드 라흐만(35·가명)은 30여 년 난민 역사가 교육 없이 흘러 ‘잃어버린 세대’가 됐다며 안타까워했다.

“난민캠프 안 교육이 허용됐다면 지금쯤 교육받은 로힝야 세대가 형성돼 있을 텐데. 그 시간을 다 놓쳐버렸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난민 인정을 받아 구호물품을 받고 초등교육이 가능한 등록 캠프의 상황이다. 미등록 캠프와 로힝야 슬럼가로 눈을 돌려보자. 그 열악함은 도저히 묘사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쿠투팔롱·레다 등 두 개의 미등록 캠프에 대략 7만~8만 명의 난민이 산다. 캠프에 속하지 않는 훨씬 많은 이들은 콕스바자르에서 멀지 않은 쇼미티파라, 파하라톨리, 그리고 배를 타야 닿을 수 있는 모헤시칼리 내 고립된 슬럼가 등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다. 슬럼가에는 아예 아무런 지원이 없고, 미등록 캠프를 대상으로 구호활동을 벌이는 비정부기구(NGO)는 국경없는의사회(MSF), 무슬림에이드(Muslim Aid) 그리고 기아반대행동(ACF) 세 곳이다. 이곳 난민들이 받는 구호는 식수·주거자재·의료 세 가지에 영양실조 방지 프로그램이 가미된다. 법적으로 노동이 금지돼 있으니 먹거리를 구하기가 막막하지만 식량 구호는 ‘쌀 한 톨’ 없다. 2012년 7월 방글라데시 정부는 이 제한적 구호마저 중단하라고 통보했다. 그 한 달 전인 6월 아라칸주에서 발생한 반로힝야 학살로 난민 대탈출이 예상된 직후였다. ‘(난민 구호가 잘되면) 더 많은 난민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는 게 정부의 논리다. 당시 방글라데시 정부는 밀려드는 난민을 막고자 나프강 국경도 폐쇄했고, 국경수비대(BGF)는 보트피플로 도착한 이들마저 강으로 떠밀었다.

나날이 까다로워지는 대난민 정책이 암시하듯 난민캠프에 대한 외부인의 출입은 2012년 아라칸주 학살을 계기로 거의 불가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등록 캠프는 ‘허가증’으로 출입을 통제했다. 미등록 캠프에는 방문객을 주시하는 밀고자가 득실거렸다. 특히 미등록 캠프에서는 ‘로컬 멤버’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고는 오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런 가운데 은 지난 3월 미등록 캠프 한 곳을 뇌물 공여 없이 난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구호가 허용됐다 할 만한 상황 아냐”

캠프로 향하는 길 검문소는 다행히 느슨했다. 오전 11시께 들어선 캠프 안은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야 할 만큼 인파가 넘쳤다. 자잘한 채소 좌판과 이발소, 휴대전화 가게 등이 있었지만 학교도, 갈 곳도, 할 일도 없었다. 애나 어른이나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NGO의 도움으로 최근 보강을 했다는 몇 채의 주거지도 열악했다. 그렇지 않은 집들은 대나무와 짚이 엉성하게 엮여 있을 뿐이다. 이런 오두막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다. 그중 몇몇은 문자 그대로 ‘쓰러져간다’. 그동안 기자가 접해본 여러 난민캠프들 중 최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여성이 기자를 의사로 착각했다. 손이 굽은 자매를 데리고 나와 보이자, 여기저기 아픈 아이를 데리고 나와 보이려는 엄마들이 길을 막아섰다. 꼽추로 태어난데다 몇 해 전 사고까지 만나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4살 소년 소메야딴은 치타공 병원에서 5만타카를 내야 수술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구호를 허용했다고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하는 게 충분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이상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미등록 캠프를 지원하는 한 NGO 직원의 볼멘소리다. “그럼에도 유엔의 지원을 받는 등록 캠프와 식량 지원 없는 미등록 캠프를 비교해봤을 때 후자의 영양 상태가 전자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건 기적 같은 일이다.”

릭샤, 고기잡이배… 온갖 저임금 시장

그 ‘기적’의 비밀은 뭘까. 미등록 캠프에서 활동하는 한 NGO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등록 난민 가정의 평균수입은 월 5천타카고 지출은 1만타카 정도다. 수입의 일부는 보트피플로 떠나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일하는 가족들이 송금해준다. 등록 캠프에 친척이 있는 경우에는 구호 식량과 물자를 나눠 쓰기도 한다. 영양 상태가 ‘하향 평준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릭샤(세바퀴자전거 모양의 인력 교통수단) 운전이나 고기잡이배 승선, 건설일, 농사일 등 치타공·콕스바자르·테크나프 일대의 저임금 시장이 로힝야 난민들의 불법 노동으로 가득 메워져 있다. 콕스바자르 타운의 릭샤 운전자들은 대부분 로힝야 난민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10년 1월3일 방글라데시 당국이 콕스바자르에서 로힝야 단속에 들어갔을 때도 가장 먼저 단속 대상이 된 게 바로 이 릭샤 운전사들이었다.

방글라데시 미등록 로힝야 캠프에 사는 한 어린이가 굽은 손가락을 보이고 있다. 흔한 설사병에서부터 이 아이처럼 원인을 잘 알 수 없는 질병과 증세까지 구호활동이 제한된 캠프 난민들의 건강 상태는 열악했다(왼쪽). 같은 캠프에 사는 4살 소년 소메야딴은 꼽추로 태어나 사고까지 만난 뒤 늘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NGO가 운영하는 캠프 내 병원에서 기본적인 의료 지원만 가능할 뿐 질병 ‘치료’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방글라데시 미등록 로힝야 캠프에 사는 한 어린이가 굽은 손가락을 보이고 있다. 흔한 설사병에서부터 이 아이처럼 원인을 잘 알 수 없는 질병과 증세까지 구호활동이 제한된 캠프 난민들의 건강 상태는 열악했다(왼쪽). 같은 캠프에 사는 4살 소년 소메야딴은 꼽추로 태어나 사고까지 만난 뒤 늘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NGO가 운영하는 캠프 내 병원에서 기본적인 의료 지원만 가능할 뿐 질병 ‘치료’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이들은 아침 7시30분, 쿠투팔롱 미등록 캠프에서 차비 16타카를 내고 지프차에 단체로 올라 8시45분께 콕스바자르에 도착한다. 하루 종일 릭샤를 몰아 번 수입은 500타카 정도. 이 중 렌트비 150타카를 제하면 300타카가 남는다. 저녁 8시30분 다시 지프를 타고 콕스바자르를 출발해 깜깜한 쿠투팔롱 캠프에 이르는 시각은 대략 9시45분에서 10시 사이다. 고기잡이도, 건설노동자도 각기 조직화된 형태로 콕스바자르와 캠프를 오고 간다. 우기 때면 이런 돈벌이조차 쉽지 않다. 그리고 일부 난민은 보트로 도착하자마자 아예 치타공으로 직행하기도 한단다.

“콕스바자르나 테크나프는 종종 단속이 떠서 강제 송환되거나 감옥에 가지만, 치타공 시내로 가면 단속도 덜하고, 외모만 봐서는 현지인과 구분이 안 된다. 적잖은 난민들이 나프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치타공으로 직진하는 건 그 때문이다.” 치타공 봉제공장에서 17년간 일했다는 무하마드 샤피경(45·가명)의 직간접 경험담이다.

“이 일대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내가 로힝야 난민임을 밝히는 순간 절대 일을 구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압둘 알람(46·가명)은 지난 2월25일 콕스바자르 공군기지 앞 검문소에서 ‘일단 멈춤’했지만 무사히 통과했단다. 벵갈리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기에 가능했다.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기보다는 벵갈리어 능력으로 현지인과 로힝야를 구분하는 검문소 관행은 압둘 같은 이에게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로힝야임을 숨긴 채 살고 있는 압둘이 콕스바자르에 놀러오는 방글라데시 여행자 가이드를 할 수 있는 것도 유창한 벵갈리어 덕분이다.

압둘이 신분증을 만들지 않는 이유

“1997년 강제 송환 때다. 송환 거부로 감옥에 갔고 거기서 벵갈리어를 배웠다. 당시 유엔과 방글라데시 정부는 ‘자발적 귀환’이라고 불렀지만, 강제였다.”

압둘은 1만타카 정도 뇌물이면 만들 수 있는 방글라데시 신분증을 만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저쪽 땅이 민주화되고 로힝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카·콕스바자르·테크나프(방글라데시)·쿠알라룸푸르(말레이시아)=글·사진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 취재지원 리영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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