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해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가 가장 뜨겁게 타올랐던 시간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16강전 우루과이와의 90분이었다. 그 경기는 어쩌면 한국 축구 역사에 다시 오기 어려운 필생의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 16강 라운드에서 한국은 우루과이를 꺾을 경우 가나-미국전 승자와 8강전을 치르게 돼 있었다. 해외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도 4강 신화를 재현할 수 있는, 월드컵에서의 대진이라기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 2010년 월드컵 16강에서의 박지성</font></font>
선수의 절반 이상이 해외파였던 한국은 더 이상 축구의 변방이 아니었다. 경기 내내 잔뜩 얼어 있다가 경기가 끝난 뒤에야 그렇게까지 강한 상대는 아니었음을 알고 아쉬워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그 경기에서 한국은 지금 슈퍼스타가 된 수아레스(리버풀)에게 선제골과 결승골을 내주며 2-1로 패했지만 후반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쉼없이 전진하고 돌격하며 불꽃처럼 타올랐다. 한국 축구가 원정 월드컵에서 상대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며 두들겨패는 것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순간이었다.
후반전 중반, 마침내 한국이 점유율 70%를 찍어버리던 순간은 전율이었다. 결국 원정 월드컵 8강이라는 한국 축구의 꿈은 멈춰야 했지만, 비 내리는 경기장에 드러누워 울던 선수들을 하나하나 다독이며 빗물 속에 눈물을 숨기고 있던, 이 모든 진격을 지휘한 박지성의 모습에 한국인들의 가슴은 뜨거워졌다. (그리고 수아레스는 박지성과 유니폼을 교환하기 위해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그때 함께 축구를 보던 누군가는 말했다. “울지 마라. 4년만 기다리자. 감독 홍명보, 주장 박지성의 시대가 온다.” 그리고 3년 뒤, 거짓말처럼 국가대표 감독 홍명보의 시대가 왔다. 그러나 그것이 박지성의 마지막 월드컵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지난 8월25일,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의 박지성은 팀이 1-0으로 뒤지고 있던 후반에 교체 투입돼 종료 5분 전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렸다. 페널티박스에서 상대 수비수 2명 사이에 끼어 중심이 무너져 쓰러지는 가운데서도 끝까지 틈을 찾아내 성공시킨, 어쩌면 가장 ‘박지성스러운’ 골이었다. 8년 만에 복귀한 팀에서 넣은 첫 골이지만, 박지성은 8년 동안 이 팀에서 뛰어온 고참 선수인 듯 별다른 세리머니도 없이 골문으로 들어가 공을 들고 중앙선으로 달리며 동료들에게 아직 경기가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이 짧은 순간은 박지성이라는 남자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퀸스파크 레인저스(QPR)에서의 참혹했던 1년간, 한국인들마저 이제 선수로서의 박지성에 대한 기대를 접어가던 즈음, 그 모든 모욕을 이겨내고 박지성은 여전히 박지성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다.
지난 8월27일, 홍명보 감독 취임 이후 세 번째 국가대표 명단이 발표됐다. 관심이 집중됐던 박주영과 기성용 등의 이름이 없다는 게 화제였지만 여전히 나는 박지성의 이름이 거론될 수 없다는 게 아쉽다. 더 이상 국가대표 명단에 ‘2002년의 아이들’은 없다. 한국 축구의 거대한 한 세대가 지나간 것이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기점으로, 한국 축구는 새로운 세대를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도 박지성에게 대표팀 복귀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국가대표 은퇴 선언을 하던 박지성의 단호한 표정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한 번도 허튼 말을 한 적이 없다. 한국의 축구 관계자 그 누구도 최소한 박지성에게만은 아무것도 요구하면 안 된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 혼자만의 로망은 아닐진대…</font></font>그러나 현재 홍명보는 한국 축구의 뇌이며, 박지성의 심장은 여전히 두 개다. 그리고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이 둘이 지금 현존하는 감독과 선수라는 사실이다. 최근 한국 축구의 부진 원인은 어쩌면 딱 하나다. 박지성이 없다는 것이다. 박지성과 홍명보는 단 한 번도 선수와 감독으로 만난 적이 없다. 이들이 2002년 이후의 한국 축구를 선수와 감독으로서 함께 마무리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포기하기 힘든 스펙터클이다. 한국 축구가 가진 두 명의 ‘상남자’가 함께 브라질행 비행기에 오르는 건 나만의 꿈은 아닐 것이다. 감독 홍명보, 주장 박지성의 국가대표를 보는 것은 한국 축구의 뜨거웠던 한 세대를 떠나보내야 하는 축구팬들의 마지막 로망이다. 실현만 된다면, 월드컵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는 감동할 준비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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