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태클과 몸싸움이 난무하는 축구장이지만 때로는 웃음 띤 얼굴로 즐겁게 공을 차는 풍경도 벌어진다. ‘친선경기’가 그것이다. 나는 물론 그런 경기마저 건성으로 뛰어서는 안 된다는 쪽이지만, 막상 그라운드에서 친선을 도모하는 선수들로서는 혼자 욕심을 부리며 뛰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2002년 9월에는 사뭇 분위기가 달아오르기는 했다. 그때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렸다. 전광판에는 ‘남측 대 북측’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라운드는 초등학교 운동회 같은 분위기였다. ‘남측’ 선수들은 각별한 골 세리머니 문구도 준비했다. 이동국의 ‘남북통일’, 이천수의 ‘우리는 하나’, 이영표의 ‘Jesus loves North Korea’가 그것이다. 만일 순서대로 되었더라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영표 선수의 문구는 사후에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경기는 순조롭게 끝났고, 남쪽 최태욱과 북쪽 리경인은 유니폼 상의는 물론 축구화까지 나눠 신었다. 그런 친선대회라면 아름답다.
2002, 아름다운 친선의 추억
2007년 7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만델라를 위한 90분’이라는 친선경기도 아름다웠다. 펠레가 시축한 그라운드 위를 사무엘 에투, 조지 웨아, 뤼트 굴리트, 크리스티앙 카랑뵈, 파크리트 음보마, 이반 사모라노, 한국의 김주성 등이 맘껏 누볐다. 산수들의 유니폼에는 ‘46664’라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넬슨 만델라의 수인번호다.
최근 몇 해 동안 세계 명문 클럽이 해마다 여름이면 찾아와 친선경기를 펼친다. 그들로서는 비수기에 제3세계를 돌면서 수익도 올리고 새 시즌의 팀 리빌딩을 준비하는 계기가 된다. 첼시나 FC 바르셀로나 같은 은하계 극강의 명문 클럽이 내한할 정도니 우리의 축구 소비 ‘시장’도 만만치 않은 셈이다.
2010년 8월4일, K리그 올스타와 가진 친선경기 때 FC 바르셀로나는 애초의 계약 사항과 달리 주요 선수를 배제했다. 프로모터 회사의 강력한 항의에 따라 간신히 리오넬 메시가 출전했지만 모두들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다. ‘북한’에 온 줄 아는 선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순간에 그들은 능력자임을 입증했다. 당시 주제프 과르디올라 감독은 3억원에 달하는 위약금을 물더라도 “운동장에 습기가 많고 날씨가 무더워 메시의 부상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전반전에만 잠깐 기용했다. 그럼에도 메시는 15분을 가볍게 뛰면서 두 골을 넣었다. 2007년에 방한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웨인 루니, 라이언 긱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은 잉글랜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여 환호를 받기도 했다.
올여름에도 몇몇 팀이 내한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중 확정된 소식은 퀸스파크레인저스 FC(QPR)다. 경남 FC 구단과 맞붙는다. QPR이 온다는 것은 아델 타랍, 스테판 음비아, 파비우 다시우바, 훌리우 세자르 같은 선수들도 온다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은 박지성(32)과 윤석영(23), 그리고 해리 레드냅 감독이다. 이 세 사람을 포함한 여러 선수들은 2부리그 강등이 확정된 난파선 QPR의 수세적 경영 방침에 따라 새 시즌이 되면 QPR의 로커룸에서 짐을 싸들고 딴 곳으로 떠날 수도 있다. 벌써부터 박지성 선수의 이적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레드냅 감독과 우리의 두 선수가 팀에 잔류한다 해도 나로서는 이 세 사람이 ‘친선’이라는 이름으로 내한해 경기를 치르는 것이 씁쓸하다. 내가 보기에 그들의 관계는 이미 일그러진 상태다.
12-13시즌 개막 초기만 해도 QPR의 팀 분위기는 원만했다. 강등 당하리라고 예측하는 전문가도 없었다. 박지성을 비롯해 세자르, 조세 보싱와, 에스테반 그라네로 등에 의해 QPR는 중위권으로 평가됐다. 그런데 팀워크는 모래알이었고 마크 휴스의 경질에 따라 급히 QPR로 온 레드냅 감독은 이 모래알들을 허공에 산산이 흩뿌려버렸다. 전임자 휴스가 중용한 박지성과 그라네로는 벤치를 지켰고 새 감독 레드랩이 좋아한 로이 레미와 크리스토퍼 삼바가 기용됐지만 접착력 없는 팀이 되었다. 타랍은 언제나 혼자서 코너 플래그까지 질주했다. 지난 3월 초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서 치른 전지훈련 중에는 감독과 선수들 모두 휴가지의 건달들처럼 지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밤마다 나이트클럽에 몰려갔고, 레드냅 감독은 통제권을 상실했다.
박지성 벤치 앉힌 그들이 무슨 염치로
그런 팀이 내한해 ‘친선’경기를 한다는 얘기다. 그들끼리의 ‘친선’이 우선 급한데도 말이다. 레드냅 감독은 박지성의 주장 완장을 빼앗았고 내내 벤치에 앉혔으며 때로는 승리를 굳히기 위해 막판 3분여를 남기고 교체 투입해 지연작전을 쓰는 용도로만 썼다. 그런 감독과 선수가 내한 친선경기를 한다는 것이다. 윤석영은 또 어떤가. 전남 드래곤즈의 간판선수이며 런던올림픽의 스타였지만, 런던으로 날아간 이후 그의 이름은 전혀 들려오지 않고 있다. 레드냅 감독은 윤석영을 빅리그 경기에서 단 한 차례도, 교체 멤버로도 기용하지 않았다. 대기 명단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윤석영은 이 친선경기가 QPR 데뷔전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감독과 선수가 내한 친선경기를 한다고 하니, 그것이 과연 ‘친선’이며 축구란 말인가.
세 사람 모두, 혹은 적어도 두 사람 정도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QPR를 떠날 가능성이 높다. 세상에나, 이런 ‘친선’경기는 하늘 아래 다시 없을 것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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