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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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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기가 끝나고 난 뒤

등록 2013-01-08 15:17 수정 2020-05-03 04:27

2008년 4월 중순, 나는 서울 동대문운동장에 갔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축구장이다. 철거 직전의 축구장이, 거무튀튀한 시멘트와 철골과 오래전에 사용이 중단된 전광판이 거기 있었다. 이미 야구장은 철거된 다음이었다. 야구장에는 포클레인이 몇 대 들어와서 땅을 갈아엎고 있었다. 그쪽의 스탠드는 파괴되었고 출입금지 표지판이 철제 펜스에 박혀 있었다. 축구장이 그다음 순서였다. 그 순서를 위해 축구장의 출입구도 모조리 막혀 있었다.

2008년 4월 기억하려고 찾았던 서울 동대문운동장. 운동장에 들어선 포클레인을 보자 소중한 기억의 한 뭉치를 그대로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정윤수 제공

2008년 4월 기억하려고 찾았던 서울 동대문운동장. 운동장에 들어선 포클레인을 보자 소중한 기억의 한 뭉치를 그대로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정윤수 제공

표지가 사라지면 기억마저 사라지는 법

긴 세월 동안 한국 스포츠 문화의 산실이었던 그곳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자물쇠 걸린 문틈을 비집고 일단 잠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라운드로 통하는 육중한 철문이 또 가로막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축구장을 한 바퀴 돌고 공사 소음이 진동하는 야구장을 한 바퀴 또 돈 다음 맞은편 대형 쇼핑몰로 올라갔다. 그곳의 높은 곳에 식당이 있어서 축구장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축구장에도 이미 포클레인이 들어서 있었다.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적 가치를 떠나 그냥 그 순간에는 소중한 기억의 한 뭉치를 그대로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에드워드 렐프의 말대로, 기억을 저장한 특정한 표지가 사라지고 나면 결국 그 기억마저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박준수 사진작가도 동대문운동장 근처를 배회했다. 그는, 축구에 대한 내 각별한 애정 이상의 무게 있는 시선으로, 동대문야구장의 사라져가는 모습을 담아냈다. 2007년부터 철거 작업이 시작되었고 2008년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그 야구장에 대해, 특히 2007년 가히 문화적 야만에 가까울 정도로 거침없이 밀어버리는 철거를 앞두고 열린 봉황대기 고교야구대회를 박준수 사진작가는 렌즈로 담아냈다.

야구 전문 작가로 활동하는 김은식의 글까지 결합된 책 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이라는 길고도 기이한 이름의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역이 들어서는 그 장소에 대한 가치 있는 기록이자 애틋한 기억이다. 김은식은 “경기가 끝나고 관중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간 늦은 시간, 초저녁부터 밀려들던 어둠을 야구장 담장 밖으로 밀어내던 조명탑에서마저 불이 내려지고, 그래서 푸릇한 밤하늘 속으로 순진하게 큰 덩치의 구조물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윤곽만이 어른거릴 때, 바로 이삼십 분 전까지도 하얗게 불타오르던 격정과 함성과 탄성과 눈물들이 순식간에 몇 해 전의 아득한 시간 속으로 밀려났다가 돌아오는 듯 새록새록 되새겨지곤” 하는 기억을 되새긴다.

명예의 전당, 불멸의 스타…

나는 이런 기억과 기록이 더 많아지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이를테면 1999년 9월9일 창간된 ‘후추닷컴’이 그렇다. 이 인터넷 스포츠 전문 사이트의 ‘명예의 전당’은 말 그대로 한국 스포츠를 빛낸 불멸의 스타를 제대로 기억하고자 했던 공간이다. 당사자도 가물가물한 기억을 완전히 복원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당사자의 마음 깊숙한 곳에 저도 모르게 저장되었던 기억의 편린과 그 기억에 묻어 있는 슬픔까지도 어루만졌던, 그리고 때로는 날카로운 질문으로 ‘애국주의’로 일관된 한국 스포츠의 이면을 통렬히 찌르기도 했던 ‘후추닷컴’의 기사는 10여 년 전의 전문가와 마니아를 놀라게 했었다. 그 지면을 빛냈던 최준서 교수가 펴낸 와 은 단지 불멸의 스타에 대한 오마주를 넘어 한국 프로야구의 진정한 유산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거듭 생각하게 한다.

천정환 교수는 국문학 텍스트를 바탕으로, 근대의 풍경을 다시 읽는 작업을 꾸준히 해온 학자다. 그가 쓴 는 2005년 출간된 을 수정·보완한 것으로 순종 인산과 일장기 말소 사건이라는 사건을 축으로 하여 일제하 조선인들에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했는지를 밝힌 책이다. ‘탈아입구’의 기치를 내걸고 스포츠를 통해 그들 나름의 근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일제의 문화 전략이 어떻게 기형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조응으로 발전한 식민지 조선의 스포츠가 어떻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같은 성취를 거둘 수 있었으며 그러한 성취가 이후 민족주의 전개 과정에서 어떻게 재구성되었는지를 천정환 교수는 잘 살피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해방 이후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통치 시대 이후의 한국 스포츠 문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어퍼컷’을 날려온 정희준 교수의 저서 는 이미 이 분야의 허약한 구조를 탐문하려는 스포츠 마니아들에게 필독서가 된 지 오래다. 스포츠가 국민 ‘통합’이라는 이름의 국민 ‘동원’ 수단이 되어 강력하거나 은밀하게 활용되는 양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진정 스뽀츠를 사랑하거든…’

이제 본론을 말해야겠다. 이제까지 소개한 책의 저자들이 새해 들어 모두 6차례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1월9일부터 매주 수요일 저녁,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인문카페 창비에서 최준서를 시작으로 천정환, 박준수, 정희준 등이 한국 스포츠사를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저마다의 기억을 밀도 있게 나누는 자리를 갖는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대해 새롭게 접근하고 있는 이대택 교수의 시간도 있다. 국민대 스포츠과학연구소가 주최하고 스포츠문화연구소가 주관한다. 천정환 교수의 책 제목을 슬쩍 빌려서 마무리한다면 ‘진정 스뽀츠를 사랑하거든 기억을 공유하라’.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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