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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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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과 지옥 사이에 믹스트존

등록 2012-08-07 17:03 수정 2020-05-03 04:26

7월28일(현지시각)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에 첫 금메달을 안긴 사격 진종오(33·KT)는 싱글벙글했다. 넉넉히 앞서갔지만 무서운 기세로 추격해온 루카 테스코니(이탈리아)에게 마지막 한 발을 남겨놓고 1.3점의 불안한 리드를 지켰다. 진종오의 1번 사대에서 총성이 울렸다. 전광판 과녁에 10.8점이 새겨졌다. 금메달이었다. 진종오는 안도의 숨을 내쉰 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팔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한국 응원석을 향해 승리의 V자를 그려 보였다.

금메달 따고도 난감한 표정인 이유는
한국 기자들은 진종오를 만나려고 어느 한곳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바로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이다. 경기가 끝난 직후 선수와 기자가 낮은 펜스를 사이에 두고 접촉할 수 있는 곳이다. 기자들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선수들 못지않은 치열한 몸싸움을 한다. 마침내 시상식을 마친 진종오가 나타났다. 하지만 나 같은 한국의 신문·통신 기자까지 순서가 오려면 조금 더 인내해야 한다. 믹스트존은 나라별, 매체별로 구역이 나뉘어 있다. 선수는 차례대로 구역을 통과하며 원하는 기자들과 인터뷰를 한다.
진종오는 한국의 방송기자들에게 먼저 ‘붙잡혔다’. 카메라 앞에서 한참 인터뷰한 뒤에야 내가 서 있는 구역으로 다가왔다. 질문이 쏟아졌다. 우선 소감부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요….” 아내가 임신 중인데, 뱃속의 아이에게 한마디해주세요. “태어날 아기에게 아빠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존재였다고 말해줄 수 있어서 좋아요.” 베이징올림픽 금메달과 오늘 금메달 중에 어떤 게 기쁜가요. “베이징올림픽과는 차원이 다른 금메달입니다.”
인터뷰가 긴박하게 진행 중인데 진종오가 느닷없이 통사정을 한다. “저…, 사실은 제가 도핑 때문에 빨리 가봐야 해서요.” 도핑테스트 때문에 음료수를 많이 마셔 화장실이 급한데 인터뷰 때문에 참고 있었다는 얘기다. 한국 기자들은 흔쾌히 양보했다. 하지만 진종오는 몇 발자국 못 가 한 무리의 외신기자들에게 다시 ‘잡혔다’. 금메달, 그것도 올림픽에서 2회 연속 금메달을 땄지만 난감한 표정이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다.

런던올림픽 여자양궁 단체에서 금메달을 딴 최현주, 기보배, 이성진(왼쪽부터) 선수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들은 믹스트존에서 '용감한 형제들'을 따라한 '용감한 자매들' 세리머니를 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런던올림픽 여자양궁 단체에서 금메달을 딴 최현주, 기보배, 이성진(왼쪽부터) 선수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들은 믹스트존에서 '용감한 형제들'을 따라한 '용감한 자매들' 세리머니를 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다음날인 7월29일, 여자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이 나왔다. 역시 1점 차의 극적인 승부였다. 최현주(28·창원시청), 이성진(27·전북도청), 기보배(24·광주광역시청)는 기쁨에 겨워 서로 얼싸안았다. 이런 흥분이 채 가라앉기 전에 인터뷰를 한다면 최고다. 그래서 믹스트존 맨 앞자리를 차지한 언론사는 복이 많다. 그 자리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일정 금액을 주고 사야 한다.

세 선수는 인터뷰를 마친 뒤 카메라 앞에서 연신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리고 두 손바닥을 머리 쪽으로 향하는 인기 개그 프로그램 코너 ‘용감한 녀석들’을 흉내냈다. 기보배는 “금메달을 따면 ‘용감한 녀석들’ 세리머니를 하자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용감한 자매들’은 기자들의 요청에 따라 방송사 카메라 앞에서 연신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믹스트존에서 벗어날 때까지 몇 번이고 그 동작을 반복했다. 그들은 조금씩 지쳐갔고 표정도 조금씩 굳어졌다.

김재범, 매일 11시11분에 기도한 이유는

7월의 마지막 날, 유도장에서 마침내 첫 금메달이 나왔다. 남자유도 81kg급 김재범(27·한국마사회). 그는 땀을 뻘뻘 흘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생생한 인터뷰를 했다. 정적인 종목인 앞선 두 종목(사격·양궁)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런데 김재범의 입에서 나온 소감은 이색적이었다.

“예수님은 저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한 일입니다. 제 힘으로 한 게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이 하신 겁니다.” 그의 소감이 이어졌다. “그리고요, 대한유도회 김정해 총장님, 한국마사회 전 직원, 대표팀 정훈 감독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진짜 이건 말로 표현이 안 되네요.”

아뿔싸, 특정 종교를 거론하고 회장님·사장님을 찾는 소감은 기자들이 기사화하기엔 부담스러운 유형의 발언이다. 김재범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너무나 1등이 하고 싶어” 알람을 맞춰놓고 매일 오전 11시11분에 기도를 한다. 올림픽을 앞두고는 훈련 시간 때문에 오전 10시4분(1004·천사)으로 기도 시간을 당겼다. 태릉선수촌 ‘지옥훈련’을 두고 그는 ‘천국훈련’이라고 했다. 그의 이런 믿음이 금메달을 일구는 동력이 됐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언론에서 이런 소감을 적극적으로 쓸 경우 오해의 소지가 생긴다. 그래서 언론은 김재범의 ‘부상 투혼’을 더욱 강조했다.

펜싱에서 나란히 동메달을 일군 최병철(31·화성시청)과 정진선(28·화성시청)은 믹스트존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최병철은 연신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내면서도 거침없는 발언으로 때로는 가슴 뭉클하게, 때로는 폭소를 터뜨리게 했다. 그는 ‘1초 사건’ 때문에 억울하게 메달을 놓친 신아람(26·계룡시청)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는 질문에 “아람아, 네가 이겼어!”라고 외쳤고, 후배들에게는 “내가 (메달을) 땄으면 다 딸 것”이라고 자신을 낮추며 후배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국제 무대에서 펜싱의 보이지 않는 편파 판정에 대해서는 “그나마 가장 피해를 안 보는 종목이 (신아람 선수가 출전한) 에페인데, 그걸 또 그렇게…, 대단한 애들이다”라고 말해 시원한 폭소가 터지게 했다. ‘여자친구 있느냐’는 질문에는 “없다. 하지만 동메달 땄다고 이걸 빌미로 구혼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해 믹스트존을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7월31일 최병철에 이어 8월1일 동메달을 딴 정진선 역시 “병철이 형이랑 같은 숙소에 있는데, 동메달을 딴 뒤 큰소리를 치며 들어오더라”고 ‘일러바쳐’ 큰 웃음을 줬다. ‘최병철의 동메달을 봤느냐’는 질문에 재미있는 표정으로 강하게 고개를 흔들며 “안 봤어요”라고 말하자 다시 폭소가 터졌다. 그는 “언론이 좋긴 좋다. 동메달을 딴 뒤 친구들한테 여기저기서 전화가 오는데, 본 적도 없는 녀석도 친구라고 전화가 오더라”고 말해 믹스트존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동메달 따고서야 털어놓은 남현희의 심정

믹스트존에는 절망과 눈물도 담겨 있다. 금메달 기대주가 노메달에 그친 뒤 믹스트존을 지나갈 때는 기자들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인다. 유도 왕기춘(24·포항시청)과 펜싱 남현희(31·성남시청)는 패닉 상태였다. 왕기춘은 다친 팔의 통증보다 마음의 통증이 훨씬 더 심해 보였다. 그는 7월31일 경기를 마친 뒤 아무 말 없이 믹스트존을 지나갔다. ‘한마디만 해달라’는 요청에 간신히 고개를 약간 저었을 뿐이다. 대회 첫날이던 7월28일, 준결승과 3∼4위전에서 잇따라 믿기지 않는 역전패를 당하고 메달을 놓친 남현희 역시 말을 걸기가 미안할 정도의 멍한 표정으로 믹스트존을 빠져나갔다.

남현희는 8월2일 여자 플뢰레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딴 뒤 “펑펑 울었다”고 했다. 그는 믹스트존에서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개인전을 마치고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단체전에 같이 나갈 동료에게 누가 될까봐 내 장비를 챙기며 혼자 펑펑 울었다”고 했다.

런던올림픽이 이제 반환점을 돌았다. 땀과 눈물, 환희와 웃음이 뒤섞인 믹스트존에서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런던(영국)=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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