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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와 올림픽, 어긋난 인연

등록 2012-07-11 19:06 수정 2020-05-03 04:26

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관중이 들어온 경기는 언제 열렸을까.
정답은 1956년 12월1일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열린 제14회 하계 올림픽 대회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이날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인 멜버른 크리켓그라운드에서 열린 오스트레일리아 대 미국의 야구 시범경기에는 관중 11만4천 명이 몰렸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앵글로색슨계가 주류인 국가로는 미국 다음으로 야구가 발달한 나라다. 하지만 11만4천 명 관중 기록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야구 위상과는 큰 관계가 없다.

퇴출된 종목 중 가장 오랜 정식 종목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언론은 생소한 야구경기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경기가 시작됐을 때 관중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경기가 중반으로 접어들자 구름 관중이 몰리기 시작했다. 관중 다수는 야구경기 뒤 예정된 육상경기를 보러 온 이들이었다.
1956년 세워진 ‘최다 관중 기록’은 야구라는 경기가 올림픽에서 얼마나 푸대접을 받아왔는지 보여준다. 전세계 프로스포츠 리그 가운데 지난해 가장 많은 관중을 유치한 곳은 미국의 메이저리그(7345만 명), 그다음이 일본 프로야구(2168만 명)다. 하지만 야구는 2012년 런던올림픽 정식 종목에 포함돼 있지 않다. 국제야구연맹(IBAF)은 소프트볼과 손잡고 2020년 올림픽 정식 종목 복귀를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전망은 불투명하다.
올림픽을 주관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야구라는 종목을 특별히 싫어해서는 아니다. 야구는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2008년 베이징 대회까지 올림픽 정식 종목 지위를 유지했다. 역대 하계 올림픽에서 한번 퇴출된 뒤 복권되지 못한 종목은 모두 13개다. 13개 종목 가운데 야구가 가장 오랫동안 올림픽 정식 종목의 지위를 누렸다. IOC가 1912년부터 도입한 ‘시범종목’에서 가장 많이 채택된 경기도 야구(6회)다. 고도로 발달한 프로스포츠지만 북중미와 동아시아에 편중된 야구 인구, 세계 야구의 정점 격인 미국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의 야구 세계화에 대한 무관심이 야구를 ‘올림픽의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야구에도 기회는 있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무의미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없었더라면 야구는 지금 올림픽 메달 종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지 모른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야구는 사상 세 번째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됐다. 출전국은 미국밖에 없었지만 독일 베를린 주경기장에서 열린 경기에는 관중 9만 명이 운집했다. 레니 리펜슈탈이 제작한 대회 공식 영상에서 야구 경기 내레이션을 맡은 이는 제3제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애인 에바 브라운이었다.

일본과 손잡은 레슬리 만의 계획

1936년 시범종목 채택을 주도한 이는 메이저리그에서 16시즌을 뛴 레슬리 만이었다. 독일계로 추정되는 만은 야구의 세계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당초 그의 구상은 베를린에서 미국과 일본 대표팀이 맞붙는 것이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은 출전을 거부했지만 만은 미국 대표팀을 두 개로 나눠 경기를 치렀다. 당시 미국 언론의 논조는 “독일 사람들은 야구에 관심이 없다”였다. 외야 플라이에 기립박수를 보내는 독일 관중이 미국 스포츠 기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쳤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만은 1936년 대회에서 야구가 좀더 국제적인 경기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 당시 아시아 유일의 세계 열강이자 19세기 후반부터 야구를 받아들였던 일본이 그의 파트너였다. 일본 도쿄는 1940년 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된 상태였다. 1940년 대회에서 야구는 ‘부토’와 함께 시범종목으로 편입돼 있었다. 만은 미국과 일본 외에 중국, 필리핀, 하와이(당시는 미국 해외 영토), 영국, 독일, 멕시코, 쿠바 등 9개국이 참가하는 토너먼트 대회를 구상했다. 도쿄 대회 이전까지 열렸던 야구 시범경기에선 미국 팀, 또는 미국 팀과 주최국 팀만 출전했다는 점에서 만의 구상은 파격적이었다.
9개국은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총 출전국 수는 49개에 불과했다. 만은 1944년 런던올림픽까지 시범종목으로 야구를 선보인 뒤 1948년 대회부터 정식 종목에 편입시킨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40년과 1944년 올림픽은 열리지 못했다. 베를린올림픽 3년 뒤인 1939년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 선언 때까지 세계는 기나긴 전쟁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1948년 이용된 1940년 열차

야구를 올림픽 종목으로 만들려던 만의 구상도 수포로 돌아갔다. 전쟁 뒤 열린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야구는 시범종목으로도 채택되지 못했다.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선 야구가 아닌 ‘페스탈로’라는 핀란드식 야구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됐다. 1956·1964년 올림픽에서 야구는 시범종목으로 복귀했지만 출전국은 2개국(미국과 대회 개최국)뿐이었다. 야구가 3개국 이상이 출전하는 올림픽 시범종목이 된 건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이 처음이었다. 레슬리 만의 구상으로부터 44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일본은 1940년 올림픽을 앞두고 선수단 수송을 위한 특별 객차를 제작했다. 대륙에서 한반도를 경유해 일본으로 들어오는 국가 대표단을 위한 객차였다. 1940년 도쿄올림픽이 열렸더라면 이 열차에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 야구선수들도 몸을 실었을지 모른다. 이 객차는 해방 뒤인 1948년, 런던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단이 서울에서 부산으로 갈 때 이용됐다.

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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