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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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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라. 관에 누워 귀국하는 수가 있다”

잉글랜드 감독 카펠로 경질로 드러난 ‘축구장의 화약고’ 인종차별 문제 흑인 선수 가족이
관람 포기할 만큼 위험한 폴란드, 우크라이나 유로 2012
등록 2012-06-06 13:57 수정 2020-05-03 04:26

이탈리아 리그에서는 유벤투스를, 스페인 리그에서는 레알 마드리드를, 그리고 도버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에 가서는 축구 종가의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전격 경질됐다. 인종차별 옹호가 원인이었다. 노련한 카펠로 감독이, 산전수전 다 겪은 카펠로 감독이, 백인이든 흑인이든 그 어떤 색깔의 선수들이라도 자신의 분명한 철학으로 조합해 공중전까지 치러온 그야말로 백전노장이 어쩌다 유럽 축구의 뜨거운 감자인 인종차별 논란에 휩싸여 ‘유로 2012’를 코앞에 두고 경질당한 것일까.

사회문제로 선수 제재는 옳지 않다?
지난 5월9일, 데이비드 번스타인 잉글랜드축구협회 회장은 “카펠로 감독이 사의를 표명했으며 이는 올바른 결정”이라고 밝혔다. 문제의 발단은 존 테리였다. 테리는 지난해 10월 퀸스파크레인저스와의 정규리그 도중 상대 수비수 앤턴 퍼디낸드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혐의로 기소됐고, 검사는 차별 발언을 했다는 증거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카펠로는 테리를 지켜주고 싶었다. 로커룸에서는 자신이 감독이지만 막상 심판의 휘슬이 울리면 그라운드 안에서 팀을 통솔하는 또 하나의 감독인 테리가 인종차별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자, 카펠로는 “주장 자리를 박탈하겠다는 협회의 방침은 잘못이며 재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유죄를 속단하는 것 또한 잘못된 일”이라고, 고향 이탈리아의 언론에 밝혔다. 잉글랜드의 여론은 들끓었고, 번스타인 회장은 감독 경질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후임으로는 로이 호지슨이 결정됐는데, 그는 잉글랜드 리그는 물론 스웨덴·이탈리아·덴마크 등의 리그와 스위스·핀란드·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의 대표팀 감독을 맡아온 전형적인 ‘저니맨’이다. 호지슨은 “내 목표는 2012가 아니라 2014년”이라는 식으로 나름대로 ‘피박’을 면하려는 발언을 하고 있으니, 축구 종가 체면이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카펠로 감독의 이어지는 발언이다. 그는 “사회문제를 축구장에 적용해 선수를 제재하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곱씹어볼 대목이 많다. 우선, 과연 그런가? 이렇게 다시 물어볼 만하다. 축구장 바깥의 수많은 문제를 그라운드 안에서 ‘실천’하거나 ‘적용’하거나 ‘해석’해버리면 축구장은 곧장 난장판이 될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는 카펠로 감독의 발언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자신이 보기에 테리는 잉글랜드 축구의 캡틴이며 선수일 뿐, 경기장 바깥의 인종차별 논쟁이 특정 선수를 징계하는 방식으로 증폭되는 것은 과잉된 대응일 수도 있다.

강대국 억압의 탈출구이긴 하지만
그러나 만약 팔레스타인 대표팀이 국제대회에 출전해 미국 선수들과 한판 겨룬다고 할 때, 과연 축구장 바깥의 공기를 완전히 차단하고 역사적 현실의 ‘진공상태’를 만든 채 경기를 하거나 또 그것을 볼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독일 대 폴란드, 그루지야 대 러시아, 한국 대 일본 등의 축구는 경기 이상의 경기가 될 수밖에 없다.
카펠로는 좀더 높은 차원에서 문제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이 사건은 테리 한 명에 국한된 게 아니라 유럽 축구 전체의 좌표를 재설정하는 중대한 문제다. 유로 2012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일반인보다 꽤 안전한 상태에서 관람할 수도 있는 유명 선수들의 가족들마저 공동 개최국인 폴란드와 우크라이나행 티켓을 사양하고 있는 실정이다. 잉글랜드 대표팀의 시오 월컷(아스널)과 졸리언 레스콧(맨체스터 시티)의 가족들은 현지 관람을 포기한 상태다. 둘 다 흑인의 피가 흐르는 선수다. 영국 외교부는 무려 130쪽에 달하는 현지 방문 지침서를 마련했다. 이런 정황에서 축구장 바깥의 사회적 의제를 특정 선수에게 집중시키는 것에 반대한다는 카펠로의 발언은, 그가 비록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유럽 축구계를 멍들게 하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닌가 의심되는 것이다.
유럽 축구장에서 인종차별 문제는 도화선에 불이 붙기만 하면 난장판이 되는 화약고다. 물론 폴란드나 우크라이나의 문제적 상황을 서유럽의 미디어가 전달하는 대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극우 파시스트들의 발호와 난장판이 되고 있는 그곳의 그라운드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다양한 시선이 필요하다. 두 나라의 인종차별은 이중 차별의 속성을 갖고 있다. 강대국이나 사회적 억압의 탈출구로 인종차별이 선택되는 것이다. 이 지면에서 한두 번은 더 다뤄보겠다.

악동 발로텔리의 이유 있는 반항
그렇기는 해도 우크라이나 리그에서 뛰는 아프리카 선수들은 헬멧이 필요한 상황이다. 매 경기 목숨을 걸고 출전한다. 어릴 때부터 이탈리아의 극심한 인종차별에 시달리며 성장해 대표팀에 오른, 올 시즌 맨체스터 시티 우승의 주역 마리오 발로텔리는 대회를 2주 앞둔 시점에서 와 인터뷰하며 “만약 길거리에서 누군가 나에게 바나나를 던진다면, 나는 그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겠다“고 밝혔다.
이 정도의 발언은 약과다. 대회 한 달여를 앞둔 상황에서 자국 사령탑이 전격 경질당한 잉글랜드에서는 인종차별이 중차대한 문제다. 잉글랜드의 간판 수비수 솔 캠벨은 자국의 열혈 축구팬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누구든지, 인종차별의 가해자든 피해자든,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으니 “조심하라. 관에 누워 귀국하는 수가 있다”. 지금 유럽의 축구장은 위험하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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