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태릉선수촌에서 눈이 맞았다. 둘 다 잘해야 본전인 ‘고독한’ 골키퍼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서였다. 당시 선수들은 토요일 아침마다 선수촌 인근 불암산에서 크로스컨트리 훈련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둘 다 부상 중이었다. 훈련을 거를 순 없었고, 걸어서 산에 올랐다. 둘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데이트가 따로 없었다. 그러다 그만 정이 들고 말았다.
핸드볼 전 국가대표 골키퍼 강일구(36·인천도시개발공사)-오영란(40·인천시체육회) 커플 사연이다. 강일구는 “새벽까지 전화기를 붙들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통화한 적도 많았다”고 했다. 2002년 5월, 둘은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아빠가 됐다.
릴레이하듯 이어받은 닮은꼴 사랑
8년 뒤 태릉선수촌에서 또 하나의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 2010년 2월 결혼한 박찬영(29·두산)-이민희(32·은퇴) 커플 또한 연상연하에 둘 다 핸드볼 국가대표 골키퍼였다. 둘의 사랑은 2001년 3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동아시아대회에서 시작됐다. 박찬영은 한국체대에 막 입학한 막내였고, 이민희는 실업 4년차였다. 대표팀 숙소에서 박찬영은 형들 심부름으로 MP3 충전기를 빌리러 다녔다. 마침 이민희한테 충전기가 있었다.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둘이 기억하는 첫 대화다. 그런데 남자팀 선수들이 쓰던 이민희의 충전기가 사라졌다. 그걸 박찬영이 찾아줬다. 귀국 전날 이민희는 박찬영에게 초콜릿을 선물했다. 따로 준비한 건 아니고 룸서비스로 나온 간식이었다. 이민희는 “고마움의 표시였을 뿐이었다”고 의미를 축소했다. 하지만 박찬영은 “나한테 특별한 감정이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둘은 전자우편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속삭였다. 그리고 서로의 코치가 됐다. 장점을 칭찬하고 단점을 지적하며 정을 쌓았다. 늘 가슴 뛰는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박찬영은 “단점을 지적하다가 토라져서 싸운 적도 많다”며 웃었다.
승리와 금메달을 염원하는 정글 같은 태릉선수촌. 그러나 그곳은 선남선녀가 모여 사는 곳이다. 1966년 6월, 태릉선수촌이 문을 연 뒤 수많은 커플의 사랑이 꽃피었다. 1970~80년대 대표적인 ‘태릉 커플’은 조재기(유도)-이계정(양궁), 안지영(역도)-박진숙(농구), 김호철(배구)-임경숙(배구), 김희철(체조)-안세옥(체조) 등이다.
1980년대 초 국가대표 남자핸드볼 골키퍼로 이름을 날린 임규하(56) 전 대표팀 감독과 김미영(53) 전 수원시청 감독은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 때 인연을 맺었다. 숙적 일본과의 남자핸드볼 경기날이었다. 그런데 임규하가 상대 슛에 얼굴을 맞아 벌겋게 부어올랐다. 응원하러 왔다가 그 모습을 본 김미영은 경기 뒤 임규하에게 위로를 건넸다. 둘은 대회 뒤풀이 때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외국 선수들 틈에서 춤을 췄다. 그리고 이듬해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대표 선발에서 김미영이 탈락하자 임규하가 위로의 말을 하며 프러포즈를 했다. 둘의 결혼 기사 제목은 ‘큐피드의 화살이 철벽 수문장을 꿰뚫었다’였다.
1990년대에도 태릉 커플은 줄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도의 김병주(45)-김미정(42) 부부가 화제를 모았다. 김병주는 1989년 베오그라드 세계선수권대회 챔피언이고, 김미정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용인대 2년 선후배인 둘은 “오빠” “정아”라고 부르다 1994년 크리스마스(12월25일)에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유도 금메달리스트인 박경호(49)와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 서향순(45)도 태릉이 낳은 스타 커플. 이들의 1남2녀 중 큰딸은 골프선수, 아들은 야구선수로 자라고 있다.
가장 최근에 태릉이 배출한 부부는 펜싱 남현희(30·성남시청)와 사이클 공효석(25·금산군청)이다. 지난해 11월 결혼한 이들은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이 끝난 뒤 환영 행사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엔 둘 다 서울시청 소속이었다. 친한 누나·동생으로 만나다가 2008년 베이징올림픽 이후 본격적으로 사귀었다. 남현희는 “(공)효석이의 어른스럽고 자상한 성격에”, 공효석은 “(남)현희의 정 많고 예의 바른 성격에” 반해 결혼에 이르렀다.
첫 번째 진천 커플은 누구일까
태릉에서 꽃피는 사랑이 늘 낭만적이진 않다.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야 하는 지도자 처지에선 ‘연애’가 경기력에 지장을 주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양궁 남녀 대표팀이 태릉선수촌과 진천선수촌을 2주씩 오가며 따로 훈련하는 것을 두고 대표선수들의 이성교제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다. 대한양궁협회는 “이성교제 우려와 남녀부가 따로 훈련하는 것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베이징올림픽이 끝난 뒤 결혼을 발표했던 박경모(37)와 박성현(29)의 교제 사실을 미처 몰랐던 일과 무관치 않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국 스포츠는 이제 태릉 시대가 막을 내리고 진천 시대가 문을 연다. 지난해 8월 충북 진천선수촌이 일부 완공돼 문을 열었다. 이제 ‘진천 커플’이 탄생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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