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출신은 지도자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게 스포츠계의 통설이다. 그러나 축구의 차범근, 야구의 선동열, 농구의 신선우 등은 선수와 지도자로 모두 성공했다. 2011~2012 프로농구에선 스타 출신으로 성공한 지도자가 한 명 더 탄생할 것 같다. 주인공은 원주 동부를 이끌고 있는 강동희(46) 감독이다.
동부는 프로농구 정규리그가 막바지로 치닫는 가운데 2월2일 현재 35승7패로 선두에서 고공 질주하고 있다. 2위 안양 인삼공사(29승12패)와는 5.5경기나 벌어져 있다. 동부의 정규리그 우승 매직넘버는 ‘7’. 동부가 이기거나 인삼공사가 질 때마다 매직넘버는 한 개씩 줄어든다. 인삼공사가 남은 13경기를 모두 이긴다고 해도 동부는 12경기 중 7승을 거두면 된다. 따라서 동부의 정규리그 우승은 ‘떼논 당상’.
“넌 공부하는 게 낫겠다”
동부는 정규리그 우승은 물론이고 역대 최고 승률을 넘어 사상 최초로 꿈의 8할 승률에도 도전하고 있다. 프로농구 역대 최고 승률은 프로농구 원년인 1997년 기아가 세운 0.762(16승5패)다. 하지만 당시엔 팀당 경기 수가 21경기에 불과했다. 54경기 체제가 된 2001~2002 시즌 이후 최고 승률은 KT가 지난 시즌에 작성한 0.759(41승13패)다. 당시 KT는 41승으로 역대 최다승 기록도 세웠다. 동부는 남은 12경기에서 7승5패만 해도 42승12패, 승률 0.778로 KT의 역대 최다승 및 기아의 역대 최고 승률 기록을 모두 넘어선다. 또 여기에 2승을 더해 44승10패가 되면 꿈의 8할 승률도 달성한다. 아울러 강동희 감독은 ‘농구 명장’의 대열에 합류한다. 동부의 선두 질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시즌 전에 상위권으로는 꼽혔지만 이렇게 잘하리라고 내다본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성공한 농구 인생을 걷고 있는 강동희 감독이지만, 중학교 때 하마터면 농구를 그만둘 뻔했던 숨은 사연이 있다.
강동희 감독은 인천 송림초등학교 4학년 때 특별활동으로 농구와 인연을 맺었다. 그는 “배구반, 핸드볼반도 있었는데 그때 내가 왜 농구반을 택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송림초등학교는 원래 농구 명문이었지만 당시엔 해체되고 없었다. 그런데 그가 농구반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학도체육대회 출전을 위해 농구부가 부활됐다. 강동희는 당시 센터였다. “키가 147cm 정도였는데, 우리 팀에서 가장 컸다”고 했다. 이듬해 인천 지역 학도체육대회에서 우승을 했다. 그리고 소년체전 준우승을 차지하고 센터로 ‘베스트5’에도 뽑혔다.
그런 그가 중학교 때 갑자기 농구를 그만뒀다. 중2 때 5월 소년체전이 끝난 뒤 체육부장이 “넌 공부하는 게 낫겠다”며 농구부에서 나가라고 했다. 땅딸해서 키가 더 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때 제 키가 163cm였는데, 큰 애들은 보통 170~175cm 됐어요. 장래성이 없다고 본 거죠.” 농구에 흥미는 없었지만 막상 그만두라고 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사실 농구부에서 선배들한테 매도 많이 맞고 벌도 많이 섰어요. 선배들이 몽둥이에 물을 묻혀서 때리기도 하고, 청소와 심부름도 많이 시켰지요.”
농구를 잊으려고 공부에 더욱 매진했다. 일부러 전교 1·2등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중 한 명한테는 영어, 다른 한 명한테는 수학 과외를 받았다. 70명 중 65등 하던 성적이 20등, 15등, 12등으로 쭉쭉 올랐다. 그는 “운동하다 그만두면 나쁜 길로 빠지기 십상인데, 그런 소리 듣지 않으려고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털어놨다.
중3의 늦가을 어느 날,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일이 일어났다.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고 있는데, 인천 지역 부대에 있는 군인 40~50명이 학교에 와서 같이 운동을 하자고 했어요. 사람이 많으니까 선생님이 체육관에 가서 농구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강동희는 송도중 농구선수 2명, 농구를 좋아하던 친구 2명과 한 팀을 이뤄 180cm 넘는 군인들과 시합을 했다. 그런데 강동희가 코트를 휘저으며 특출한 기량을 뽐냈다. “농구부에서 나온 뒤에도 취미로 농구를 했는데, 인천 지역의 길거리 농구를 평정하고 다녔죠. 그 실력이 나타난 겁니다.”
그 모습을 본 체육부장이 “농구 다시 할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그를 내쳤던 바로 그 선생님이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거절했다. “고입 연합고사가 열흘 정도 남았을 때인데, 저는 인문계와 실업계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었어요.” 사실 농구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그 친구가 대신 체육부장한테 찾아가 “동희 농구 다시 한대요”라고 말했다. 부랴부랴 체육특기자로 등록해 송도고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날 군인들이 학교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겠지요. 참 신기한 일이에요. 군인들만 보면 절로 웃음이 나와요.”
군인들과 시합을 붙지 않았더라면
강동희는 송도고 1학년 때 쌍용기 고교농구 결승전에서 용산고 3학년 허재와 ‘맞짱’을 떴다. 비록 8점 차이로 졌지만 강동희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순간이었다. 언론에선 ‘제2의 유재학’ ‘제2의 허재’ ‘초고교급 선수’라는 수식어로 강동희를 주목했다. “고교 랭킹 1위 자리를 지키려는 부담감이 컸어요. 체육관에서 밤 12시까지 혼자 미친 듯이 운동을 한 뒤 체육관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어요.”
강동희는 송도고를 졸업한 뒤 중앙대에 진학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송도고 출신들은 고려대 진학이 하나의 코스였다. 김동광, 이충희 등 스타 선수들의 출신만 봐도 그렇다. 그 역시 중앙대보다는 연세대나 고려대를 원했다. 그런데 송도고 농구부의 ‘대부’ 전규삼(작고) 선생님의 권유로 중앙대에 선택했고, 중앙대와 기아 시절 허재·김유택과 함께 ‘허동택 트리오’라는 신조어를 만들며 한국 농구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프로 원년 정규리그와 챔피언전 통합 최우수선수(MVP)도 그의 차지였다.
중학교 때 농구공을 다시 잡지 않았다면 농구 스타 강동희도 농구 명장 강동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3 어느날 느닷없이 학교를 찾아온 군인들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셈이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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