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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천재 가드를 기다리며

구단과 이면계약과 법적소송 등으로 KBL에서 임의 탈퇴 공시됐던 ‘매직 핸드’ 김승현 복귀 막판 진통… 마술 같은 패스 다시 볼 수 있을까
등록 2011-11-24 16:40 수정 2020-05-03 04:26
한미 FTA 관련 국회 외교통일위 회의실 스케치.
2011.11.17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한미 FTA 관련 국회 외교통일위 회의실 스케치. 2011.11.17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딱 10년 전 이맘때다. 2001년 늦가을, 프로농구 팬들은 ‘천재 가드’의 출현에 흥분했다. 그의 별명은 ‘매직핸드’. 뒤에도 눈이 달렸다는 농담을 할 만큼 상대 수비를 현혹시키는 마술 같은 패스가 일품이었다. 예측을 불허하는 감각적인 어시스트와 고정관념을 깬 창의적인 공간 활용은 한국 프로농구를 한 차원 올려놓았다는 평까지 들었다.

2002년 아시안게임 영광의 주역

주인공은 당시 동국대를 막 졸업하고 프로에 뛰어든 김승현(33)이다.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지명될 정도로 그다지 눈에 띄는 선수는 아니었다. 얼마 뒤 김승현이 프로농구 코트에 엄청난 핵폭풍을 몰고 올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동갑내기 외국인 선수 마커스 힉스와 호흡을 맞추며 만년 하위팀 대구 동양(현 오리온스) 돌풍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동양은 2001~2002 시즌에서 9연승을 거두는 등 36승18패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챔피언전에서 서장훈이 이끌던 서울 SK를 4승3패로 물리치고 마침내 정상에 등극했다. 김승현은 최우수선수(MVP)와 신인선수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국내 프로농구 16년 역사에 MVP와 신인왕을 동시에 석권한 선수는 김승현이 유일하다.

영광의 순간은 6개월 뒤 절정에 달했다. 김승현은 2002년 10월14일 열린 부산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결승에서 중국을 상대로 대역전극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한국은 준결승에서 필리핀에 66-68로 뒤지다가 이상민의 극적인 버저비터 역전 3점슛으로 69-68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다. 하지만 결승전 상대는 ‘걸어다니는 만리장성’ 야오밍이 버티고 있는 아시아 최강 중국이었다. 누구도 중국의 아시안게임 5연패를 의심하지 않았다. 한국은 4쿼터 종료 3분 전까지 71-84, 13점이나 뒤졌고, 32초 전에도 83-90, 7점이나 뒤져 있었다. 모두가 역전은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저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김승현의 손끝에서 나왔다. 번개 같은 가로채기와 현란한 어시스트로 90-90 동점을 만들며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 갔고, 결국 한국은 102-100으로 중국을 물리치며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이후 20년 만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어쩌면 2002년은 당시 만 24살이던 김승현의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한 해였을 것이다. 김승현은 2002~2003 시즌에도 소속팀을 정규리그 우승과 챔피언전 준우승에 올려놓는 등 오리온스를 6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그의 어시스트 능력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의 등장으로 대형 포인트가드 ‘6년 주기설’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강동희(1966년생)·이상민(1972년생)·김승현(1978년생)이 공교롭게도 6년씩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김승현은 2003~2004 시즌부터 세 시즌 연속 어시스트 타이틀을 차지하는 등 통산 네 차례나 어시스트 1위에 올랐다. 특히 2004~2005 시즌에는 국내 프로농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한 시즌 경기당 평균 두 자릿수 어시스트(10.5개) 기록도 세웠다.

부상과 소송, 연이은 시련

김승현에겐 지금 ‘비운의 천재’ ‘풍운아’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발단은 ‘돈’ 때문이었다. 오리온스 구단은 2005~2006 시즌을 마친 뒤 자유계약(FA) 선수 자격을 얻은 김승현과 5년간 연봉 4억3천만원에 계약했다고 한국농구연맹(KBL)에 신고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연봉 10억5천만원에 이면계약을 맺었다. 3년 동안은 ‘비밀’이 지켜졌다. 그런데 김승현이 고질적인 허리 부상에 시달리자 팀 성적도 꼴찌로 곤두박질쳤다. 2007~2008 시즌 꼴찌에 이어 2008~2009 시즌 9위에 그치자, 구단은 2009년 7월 연봉 협상 과정에서 김승현에게 연봉 삭감을 요구했다. 그러자 김승현은 구단과의 이면계약을 폭로해버렸다.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지던 구단과 스타 선수의 뒷돈 거래가 만천하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KBL은 이면계약에 대해 징계를 내렸다. 김승현에게 제재금 1천만원과 1라운드(9경기) 출전 정지, 구단에는 제재금 3천만원을 물렸다. 하지만 KBL은 연봉 협상에서는 구단의 손을 들어줬다. 김승현의 연봉은 2009~2010 시즌 6억원으로 깎였고, 2010~2011 시즌엔 3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김승현은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임금 청구 소송을 냈다. ‘오리온스 구단은 이면계약서대로 연봉을 지급하라’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KBL은 지난해 11월12일 김승현을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광저우 아시안게임 개막일이었다. 부산 아시안게임의 영광은 광저우 아시안게임 개막날 눈물로 변했다.

김승현은 임금 청구 민사소송 1심에서 이겼다. “오리온스는 이면계약에 따른 미지급분 12억원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아낸 것이다. 소송에선 이겼지만 그렇다고 당장 코트에 복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올 초 KBL을 상대로 낸 임의탈퇴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은 기각됐다. 겨우 1심 판결에 불과했고, 김승현은 1년 넘게 임금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곤란한 지경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김승현은 이자까지 포함해 14억원에 이르는 임금을 받지 않을 테니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해달라고 했고, 시즌 초 최하위로 처지며 선수 보강이 시급한 구단도 이에 동의했다. 마침내 김승현의 코트 복귀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오리온스 구단 심용섭 단장은 “김승현이 올 시즌엔 오리온스에서 명예회복을 하지 않겠느냐”며 며칠 만에 미묘하게 말을 바꿨다.

며칠 전 김승현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오리온스 구단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한 직후였다. 그는 답답해했다. “운동을 하다가도 ‘코트에 다시 서지 못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했다. “한동안 텔레비전 농구 중계는 쳐다보기도 싫었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그래도 울진 않았다”고 했다. 힘들수록 자신을 더 채찍질한 듯했다.

김승현이 코트에 복귀하려면 이적 시점을 둘러싼 오리온스 구단과의 이견을 해소해야 한다. 하지만 11월18일 현재 양쪽의 간극은 상당하다. 오리온스 구단은 김승현이 코트 복귀 뒤 ‘남은 시즌의 절반을 오리온스에서 뛰어야 트레이드하겠다’는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김승현 쪽은 ‘구단 방침대로라면 올 시즌 중 이적은 불가능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양쪽의 갈등이 파국으로 치달을지, 전격적 합의라는 극적 반전을 이룰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즐겁고 재밌는 농구 하고 싶다”

김승현은 과거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미국프로농구(NBA) 선수로 앨런 아이버슨을 꼽았다. 그는 “아이버슨처럼 즐겁고 재밌는 농구를 하고 싶다”고 했다. 김승현의 바람이 꼭 이뤄졌으면 좋겠다. 그의 마술 같은 어시스트를 다시 보고 싶다. ‘매직핸드’ 김승현이 그립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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