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지면이지만, 인용 표시를 해야겠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이 귀한 지면을, 위대한 소설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소금처럼 반짝이는 글로 채우려는데, 그에 합당한 표시를 해야 할 의무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 ) 안에 (축, 11) 이렇게 표시하는 것은 갈레아노의 의 11쪽을 뜻하며 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3부작 의 3권 243쪽을 말한다. 그 243쪽에는 “오는 것 같은데 가고, 가는 것 같은데 온다. 경기장에 바나나 껍질이라도 뿌려진 듯, 당황한 적들은 제자리에 풀입처럼 눕는다”라고 적혀 있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을 빛낸 브라질의 가린샤를 묘사한 것이다.
대를 이어 우루과이에 우승컵을 안기다
아무튼, 이 지면은 그렇게 쓰일 것인데, 이유가 있다. 갈레아노는 우루과이 출신이고 우루과이 대표팀이 7월25일 중남미 국가 축구대회인 코파아메리카(COPA America) 결승에서 파라과이를 3:0으로 꺾고 우승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루과이의 간판스타 디에고 포를란(32)은 대를 이어 자국민에게 우승컵을 선물하게 되었다. 아버지 파블로 포를란이 수비수로 참가한 1967년의 같은 대회에서 우승했고, 그의 외할아버지 후안 카를로스 코라소도 1959년 우승 멤버다. 이번 대회 MVP는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16강전에서 우리 대표팀 골망을 두 번이나 흔든 루이스 수아레스가 차지했다. 과연 우루과이의 신생아들은 ‘고오오오오오오올!!!’이라고 외치며 태어난다는데, 갈레아노는 이렇게 쓴다. “유구한 역사의 뿌리는 아직도 살아 있다.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을 때면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전국의 숨소리가 멈춰지고 정치가, 가수, 박람회 잡담꾼들의 입이 조용해진다. 애인들의 사랑도 정지되고 파리들도 비행을 멈춘다.”(축, 161) 아마도 지난 7월25일 결승에서 우승했을 때,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의 풍경이 그러했으리라.
어떤 독자는, 축구로 해가 뜨고 지는 남미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 하고 하품 소리를 하겠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나는 갈레아노의 또 다른 책 3부작을 함께 읽자고 하는 것이다.
3부작은 시간 이전의 시간, 공간 이전의 공간, 즉 억조창생의 신화에서 시작해 마야·잉카·아스텍 문명과 그것을 휩쓸어버리고 등장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그 뒤를 이은 영국·독일·프랑스·네덜란드, 그리고 20세기 패권자 미국의 말발굽 아래 남미의 수많은 나라가 어떤 상처와 위엄의 역사를 써왔는지를 쓴, 특유의 냉소와 애정이 교차하는, 흡사 우루과이 축구의 현란한 드리블에 대한 그 자신의 묘사 ‘8번의 리본 매듭’에 어울리는 문체로 장대하고도 섬세하게 기록한 역작이다. 이 3부작에는 모국 우루과이를 비롯해 브라질·아르헨티나·칠레·콜롬비아·니카라과·과테말라·에콰도르·수리남·아이티·멕시코 등의 역사와 인물과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시선이 날카롭다.
이를테면 “비 한 방울이 여자의 몸에 떨어졌다. 아홉 달이 지나자 여자는 쌍둥이 형제를 낳았다”(불, 1-29)로 시작하는 창세의 신화에서 “권한이 강한 대주교가 반란자들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왕실 대표단 수장으로서 달콤한 약속으로 그들을 속일 것이다. 그를 싣고 갈 노새가 대주교의 몸집을 보고 경악한다”(불, 2-106)는 참혹한 식민 수탈을 넘어 파업 노동자에 대한 토끼몰이식 소탕 작전 과정에서 태어난 한 아이가 “망각의 역병으로 인해 모든 것의 이름을 잃어버린 한 지역의 비밀을 세상”(불, 3-120)에 밝히는 현대의 기록까지 이어진다. 그 아이는 가르시아 마르케스고 그가 밝힌 세상의 비밀은 에 적혀 있다. 그 곁으로 한 여인이 “두려움에 마비되고 추위에 빨개진 얼굴로 두 손을 움켜쥐고 울기만 한다. 그리고 한참 뒤, 눈물을 닦고 이를 악물며 종이가방을 단단히 그러쥐고, 도시 속에 묻힌다.”(불, 3-155)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에바 두아르테. 훗날 에바 페론 ‘에비타’로 불리게 되는 여인이다.
네덜란드 간판 공격수가 된 수리남의 후손
그러니까 이 책에는 몬테비데오와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산티아고와 아바나와 아순시온과 키토와 유카탄반도의 기억들, 그리고 그 도시의 연대기를 아로새긴 불멸의 인간들에 대한 추념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과 저 책 사이를 넘나들며 읽어보면, 양식이 있는 독자라면 남미의 역사에 대한 저마다의 통념이 산산이 박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리베라·아옌데·네루다·유팡키·파라·펠레·마라도나 등이 얼마나 위엄 있는 인물이며, 그들을 낳은 ‘수탈된 대지’가 얼마나 아름다운 연대기를 써왔는지 알게 된다. 더 이상 ‘월드 뮤직’ 운운하며 커피 한잔 마시기 위한 값싼 낭만의 시럽으로 남미를 사용하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
탱고? 갈레아노의 말을 들어보자. “탱고의 밑바닥에는 내륙지방 목동들의 운율과 선원들의 뱃노래가 있고, 아프리카 흑인과 안달루시아 집시들의 음악이 깔려 있다. 탱고를 연주하는 기타는 스페인에서, 반도네온은 독일에서, 만돌린은 이탈리아에서 건너왔다. 합승마차의 마부는 뿔나팔로, 이민 노동자는 고독의 친구인 하모니카로 탱고를 연주한다.”(불, 2-354) 어떤가. 는 물론이고 요요마의 조차 조미료를 잔뜩 끼얹은 소리가 아닐는지. 그렇다면 브라질의 삼바는? “삼바는 검고 가난하고 경찰의 쫓김을 받는 자들의 피난처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의혹을 받는다. 그러나 영혼을 애무해주는 삼바 리듬에 한번 몸을 맡기면 경멸 따위는 눈 녹듯 스러진다.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왕이 되고, 모든 불구자가 성한 자가 되고, 모든 따분한 자가 아름다운 미치광이가 되는 축제에서 세상은 삼바 리듬을 따라 숨쉰다.”(불, 3-175) 어떤가. ‘삼바의 나라 브라질’ 운운하는 그 흔한 스포츠 중계 멘트가 진부하게 들리지 않는가. 이는 단지 빈곤한 수사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성찰의 부재가 낳은 천박함이다.
그를 따라가면, 네덜란드가 수리남을 어떻게 억압했는지 그럼에도 “수리남을 휩쓰는 자유라는 돌림병”(불, 2-38)이 어떻게 창궐했는지, 그리하여 수리남의 후손인 네덜란드 간판 공격수 뤼트 휠리트(현 러시아 프로팀 테레크 그로즈니 감독)가 “복종하기 싫어하는 성격과 축구의 본질을 왜곡하는 금전 만능주의의 문화를 고발”(축, 422)해왔는지 알 수 있다.
축구의 땅에 대한 어수선한 편견
아니, 까짓 축구 경기 하나 때문에 남미의 역사를 통째로 알아야 한단 말이오? 이렇게 묻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내가 축구 칼럼을 처음 쓴 것이 1997년이었는데 그 뒤로도 오랫동안, 늘 들어온 푸념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우루과이의 우승을 축하하며 갈레아노의 말을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다. 그는 ‘축구전쟁’으로 유명한 1969년의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전쟁에 대해 “군부독재자들에 의해, 100년이 넘도록 서로 증오하도록 훈련받은 양국 빈민들 간의 증오가 분출된 사건”이라고 말하며 “얼굴이 못생긴 것은 거울 탓이 아니며, 열병이 생긴 것도 체온계의 탓이 아니다”(축, 40)라고 말한다.
그러니 최소한 남미 축구를 보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면서 허구한 날 춤이나 추고 마약이나 하고, 게다가 광기에 휩싸여 축구전쟁이나 벌이는 이상한 나라들로 여기는 편견부터 버리자. 그것들은, 알고 보면, 강대국의 외신 뉴스가 두 세기에 걸쳐 살포한 이미지의 어수선한 산란 작용 아니던가.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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