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깰 수 없는 맏언니의 전설

여자농구 ‘코트의 지휘관’ 전주원, 최고령 은퇴, 7시즌 연속 도움주기 1위 등 기록 남기고 지도자로 돌아가
등록 2011-05-06 16:00 수정 2020-05-03 04:26

지난해 4월6일 경기도 안산 와동체육관. 여자프로농구 안산 신한은행은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네 시즌 연속 정규리그와 챔피언전을 동시에 석권하는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신한은행 선수들은 우승의 기쁨보다 ‘맏언니’의 최우수선수(MVP) 수상에 더 감격해하는 듯했다.
맏언니 전주원은 최우수선수 트로피를 옆에 들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리고 후배들을 향해 울먹이며 “고마워”를 연발했다. 그것으로는 모자랐는지 그는 후배들에게 큰절까지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후배들도 입을 가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뼈가 부딪히는 고통으로 잠 못 이룬 밤

전주원에게 2009~2010년은 좌절과 고통, 환희가 뒤섞인 드라마 같은 시즌이었다. 그는 시즌이 한창이던 지난해 2월12일 천안 국민은행과의 원정경기 도중 왼쪽 무릎을 크게 다쳤다. 자기공명영상(MRI) 촬영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3년 전 수술했던 왼쪽 무릎 연골이 다시 파열된 것이다. 수술대에 오를 경우 재활 기간까지 적어도 두 달이 필요했다. 플레이오프까지는 불과 4주가 남았다. 병원에서는 연골이 뭉친 부위라도 제거하자고 했다. 그래도 재활 기간까지 6주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망설임 끝에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하지 않으면 아예 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달식 감독, 위성우 코치와 상의 끝에 엿새 뒤 그는 수술대에 올랐고, 이 사실을 후배들에게는 비밀에 부쳤다.“수술한 걸 알면 후배들이 동요할까봐 그랬다.”
전주원은 수술 뒤 한 달 만에 기적같이 코트에 섰다. 지난해 3월19일 구리 금호생명과의 4강 플레이오프 첫 경기 때였다. 복귀를 앞두고 사나흘 정도 농구공을 만지작거린 게 전부였지만 무릎에 두꺼운 보호대를 착용하고 매 경기 30분 가까이 뛰며 3전 전승으로 팀의 챔피언 결정전 진출을 이끌었다.
챔프전에 오른 전주원은 “빨리 우승을 결정짓고 싶다”고 했다.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시합을 치르고 난 밤에는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엄습했기 때문이다. 뼈와 뼈 사이에 윤활유 구실을 해주는 연골이 없다 보니 코트에서 뛸 때면 뼈와 뼈가 부딪혀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밤에는 생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전주원은 위기에서 더욱 빛났다. 1승1패로 맞선 3차전에서 전반에만 12점을 넣었고, 4차전에서는 풀타임으로 뛰며 기어이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기자단 투표 61표 가운데 36표를 얻어 생애 두 번째 챔피언 결정전 최우수선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전주원의 생애 첫 번째 챔프전 최우수선수 등극도 극적이었다. 그는 2004년 3월, 아테네 올림픽을 앞두고 덜컥 임신한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요즘 선수들에게는 한창나이인 32살 때 원치 않는 은퇴를 해야 했다. 한국 여자농구 간판스타의 갑작스러운 은퇴는 팬들에게도 충격적이었다. 남편 정영렬(40)씨는 “당시 농구계 안팎에서 나한테 쏟아지는 비난이 굉장히 심했다”고 회고했다. 그해에는 소속팀(현대산업개발)까지 해체돼 더욱 힘겨웠다. 팀은 그해 가을 신한은행에 인수됐고, 전주원도 딸 수빈을 출산한 뒤 신한은행 코치로 새 출발을 하게 됐다. 하지만 ‘코트의 지휘관’을 잃은 신한은행은 2005년 겨울리그에서 꼴찌를 했다. 그의 복귀설이 모락모락 나왔다. 그 무렵 전주원은 기자에게 이런 고민을 털어놨다. “내가 복귀해서 잘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쟤는 아기까지 낳아놓고 왜 또 나왔어?’라는 비난이 두렵다.”

만장일치 MVP 선정되기도

하지만 전주원은 오랜 고민 끝에 다시 유니폼을 입었다. 코치를 지냈기 때문에 “주원 샘(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나이 어린 후배들과 코트에서 땀을 쏟았다. 마침내 2005년 여름리그에서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노장 포인트가드 한 명이 복귀했을 뿐인데 꼴찌 팀이 6개월 만에 우승을 차지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당시 신한은행은 정규리그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뒤 2위 천안 국민은행을 2승1패로 따돌리고 챔피언 결정전에 올랐다. 챔프전 상대는 정규리그 우승팀 춘천 우리은행이었다.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우리은행의 우세를 점쳤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신한은행은 여자프로농구 챔프전 사상 처음으로 3전 전승의 완벽한 우승을 차지했다. 전주원 역시 여자프로농구 사상 최초로 기자단 만장일치로 챔프전 최우수선수에 선정됐다.

그는 아기 엄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체력을 지녔다. 복귀 1년여 뒤인 2006년 강원도 함백산에서 펼쳐진 신한은행의 여름훈련 현장. 경사로가 무려 50도는 됨직한 악명 높은 함백산 크로스컨트리 코스(7.4km)에서 전주원은 새파란 후배들을 물리치고 늘 선두로 들어왔다. 당시 이영주 감독은 “체력을 안배할 줄 알기 때문”이라고 칭찬했다.

전주원은 올 시즌 이따금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며 은퇴가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4월20일 은퇴를 선언했다. “처음 은퇴하고 나서 이번 시즌까지 6년간은 나에게 덤으로 주어진 시간이었다. (…) 무척이나 행복했던 덤이었다.” 사실 무릎 부상만 아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는 “뛰면 뛸수록 악화될 뿐 나아지는 병은 아니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1972년 11월15일에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꼭 마흔이다. 공식 기록은 ‘38살5개월’이라는 한국 여자농구 사상 최고령 선수로 은퇴하게 됐다.

전주원은 1983년 선일초등학교 5학년 때 농구를 시작해 28년 동안 코트를 누비며 한국 여자농구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됐다. 1991년 농구대잔치 신인상을 시작으로 각종 상을 휩쓸었다. 2005년 복귀 뒤 지난 시즌까지 7시즌 연속 도움주기 1위는 당분간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그는 또 태극마크를 달고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대회와 1997·1999년 아시아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는 한국 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았을뿐만 아니라 쿠바와의 경기에서 10득점, 10튄공잡기, 11도움주기로 올림픽 농구 사상 세계 남녀 선수를 통틀어 최초의 트리플더블을 달성하는 위업을 보였다.

실력만 최고가 아니다. 그는 겸손이 몸에 뱄다. 기자들의 칭찬하는 질문에는 늘 손사래를 치며 몸을 낮춘다. 통산 기록을 꺼내면 “오래 뛰었으니 자연히 쌓인 기록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이번 시즌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어릴 때는 체력은 됐지만 농구가 안 보여서 힘이 들고, 농구가 보일 때쯤에는 체력이 안 되죠. 그런데 저는 아직도 농구가 잘 안 보이네요.”

다시 ‘주원 샘’‘수빈 엄마’로

전주원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성실성과 지독한 자기관리다. 커피는 아예 마셔본 적이 없고, 탄산음료는 고교 시절 이후 20년 넘게 먹지 않았다. 그는 “이제는 마셔도 맛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며 웃었다. 인스턴트 식품도 거의 입에 대지 않는데, 라면은 비시즌 때 가끔 먹는 정도다. 한국방송 에서 그를 취재해갈 정도로 그의 철저한 몸관리는 화젯거리다.

‘농구선수’에서 ‘수빈이 엄마’로 돌아온 전주원은 여전히 바쁘다. 신한은행 코치로 여전히 코트를 지키며 이번 학기부터 대전 우송대 스포츠건강관리학과 3학년에 편입해 학업을 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주원, 그가 28년 동안 코트에서 흘린 땀과 열정, 눈물과 환희는 이제 한국 여자농구의 ‘살아 있는 전설’로 오래오래 팬들에게 추억으로 각인될 것이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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