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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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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권투의 침체, 권투계가 자초한 일”



김지훈 등 한국 선수의 미국 진출 돕는 에이전트 이현석씨…
“세계 복싱의 흐름이 무엇인지 아는 한국 지도자 거의 없어”
등록 2010-08-25 16:10 수정 2020-05-03 04:26
체육관에서 훈련 중인 권투선수 김지훈(왼쪽)과 그의 미국 원정을 주선한 이현석씨. 침체된 한국 권투를 살리려면 세계의 흐름에 눈떠야 한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체육관에서 훈련 중인 권투선수 김지훈(왼쪽)과 그의 미국 원정을 주선한 이현석씨. 침체된 한국 권투를 살리려면 세계의 흐름에 눈떠야 한다. 한겨레 신소영 기자

대한민국 복싱의 새로운 희망 김지훈(23·경기 일산 주엽체육관)은 광복절 아침(미국 현지시각 8월14일 저녁)에 열린 국제복싱연맹(IBF) 라이트급 챔피언결정전에서 멕시코의 미겔 바스케스에 아쉬운 패배를 당했다. 현지에서 붙은 ‘볼케이노’(활화산)라는 별명답게 공격적인 자세가 돋보였으나, 상대의 스타일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나온 바스케스의 전략에 말리며 제대로 된 펀치를 적중시키지 못했다. 결과는 0-3 전원 일치 판정패. 그러나 많은 팬들은 여전히 김지훈에게 희망의 시선을 보낸다. 꺼져가는 촛불보다도 기운이 없는 대한민국 복싱의 현실에서 메이저리그라 할 수 있는 미국 링에서 싸우는 파이터가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임을 알기 때문이다.

<font color="#00847C">미국 유학 중에도 식지 않은 ‘권투 사랑’</font>

김지훈을 이 자리까지 이끈 것은 그의 두 주먹 집념과 김형열 관장의 열정적 가르침이었다. 하지만 실력이 있어 상대를 압도하는 것만으로 성공할 수 없는 것이 프로스포츠의 세계다. 제대로 된 프로 경기가 열리려면 이벤트를 주최하는 단체와 선수 사이에서 사업적 문제를 조율해주는 전문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런 역할을 하는 이들을 통상적으로 ‘에이전트’라고 부르며, 격투기에서는 ‘매치메이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김지훈의 미국 진출 역시 이런 전문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작품이었다. 그 주인공은 미국 프로복싱 무대에 한국 선수들의 파이트를 주선하는 이현석(41·미국 필라델피아 거주)이다. 김지훈·이재성·손창현 등 한국의 젊은 복서들이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위해 미국 전역을 누비고 있는 그는 복싱 비즈니스맨이기 이전에 뿌리 깊은 권투 마니아다.

“초등학교 시절이던 1970년대 후반부터 복싱에 푹 빠져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복싱 선수가 되려고 체육관을 찾아갔다가 쫓겨나서 선수로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는 복싱 전문 기자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복싱에 대한 동경으로 청소년기를 보낸 이현석은 경북대를 졸업한 뒤 뉴욕 시립 퀸스대학 미술대학까지 마치며 복싱과 관계없는 길을 걷는 듯했다. 그러나 한국의 복싱 전문 잡지에 통신원으로 기고를 하는 등 간접적 활동을 하며 링에 대한 열정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미국 복싱계의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은 세계복싱기구(WBO)와 IBF의 총회에 참석하면서다.

“처음에는 그냥 단순한 열정과 호기심에 가본 것이었습니다. 복싱을 너무 좋아하니까요. 내 돈을 내고 WBO·IBF 총회를 다니면서 인맥을 쌓았고, 그렇게 일들이 시작됐습니다. 동양인에 대한 무시나 차별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한국 복서의 미국 진출’이라는 목표를 세웠지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만 나타났다. 그러나 조국의 복싱을 위해 무언가 해내겠다는 의지가 있었기에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현석은 세계 주요 복싱 기구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배너프로모션(대표 아트 펠룰로)에 한국 선수를 계약시키기 위해 6개월 동안 그들을 괴롭혔다.

“한국 선수와는 죽어도 계약을 안 하겠다는 사람들이었어요. 6개월을 쫓아다니며 설득했고, 결국 마음을 돌려놓았습니다. 처음에는 김지훈이 아니라 다른 선수들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김지훈이 실력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지요.”

이현석은 미국 복싱에서 성공할 경우 한국에서 인기 있는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들만큼 부와 명예를 잡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박찬호까지는 모르겠지만, 인지도로만 보자면 김지훈은 이제 김병현 정도로는 유명해졌습니다. 물론 아직까지 버는 돈은 적지만 나중에 좀더 큰 경기들을 치르면 큰돈과 명예를 거머쥘 수 있습니다.”

김지훈의 성공으로 미국 복싱 무대를 꿈꾸는 청년이 갑자기 늘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박찬호의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대한민국 야구 명문고의 난다 긴다 하는 유망주 수십 명이 미국 무대를 노크했으나 성공이라 부를 만한 활약을 한 경우는 다섯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이현석은 해외 무대에서 성공하려면 마음가짐부터 달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font color="#C21A8D">“성공하려면 완전히 미쳐야 한다”</font>

“복싱을 좋아하거나 사랑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미쳐야 해요. 지도자도 미쳐야 하고 선수도 광기를 갖고 글러브를 껴야 합니다. 많이 사랑한다고 해도 성공할 수 없는 게 프로 무대예요. 게다가 여기는 해외입니다. 이방인으로서 이 나라를 정복하고 사냥하러 오는 것인데 그저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성공할 수는 없지요. 그런 마음으로 도전하려는 분들은 꿈조차 꾸지 말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은 한 사람의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낼 때 성공과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현석은 대한민국 링의 침체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이는 권투계가 자초한 일이라고 말했다.

“복싱 비즈니스가 침체되고 인기가 사라져서 한국 권투가 이 모양이 됐다고 보는 시각이 있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는 권투인들이 현실을 직시하기 못했기에 일어난 비극입니다. 한국 지도자들을 보면 외국에 어떤 선수가 활동하는지, 새로운 복싱 흐름이 무엇인지 아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정보를 지닌 분들은 손에 꼽을 정도예요. 선수들 가르치는 방식도 세계적 흐름과 거리가 멉니다. 지금 한국 선수들은 가장 기본인 잽을 제대로 못 냅니다. 이게 선수들 잘못일까요?”

이현석은 인터뷰 내내 자신의 이야기가 한국 복싱인들을 폄하하는 것처럼 들릴까 조심스러워했다. 하지만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하게 밝혔다.

“제가 한 이야기는 대한민국 복싱이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많은 권투인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열심히 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저의 활동과 이야기가 자극제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권투를 위해 맡은 바 책임을 다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도자들은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치고, 선수들은 뛰고, 저는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지요.”

조건호 스포츠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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