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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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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연, 그 짠한 성공


엘리트 선수 키워 만든 U20 여자 월드컵 신화, 그 뒤엔 열악한 환경이…
공부와 축구를 즐겁게 할 방법은 없나
등록 2010-08-03 22:17 수정 2020-05-03 04:26
단기적 성과만으로는 여자축구가 발전하기 어렵다. 7월29일 U20 여자월드컵 준결승 한국-독일 경기에서 지소연이 드리블을 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단기적 성과만으로는 여자축구가 발전하기 어렵다. 7월29일 U20 여자월드컵 준결승 한국-독일 경기에서 지소연이 드리블을 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뭐, 그냥 하는 거죠.”

그 아이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지난 2007년의 일이다. 그해 봄,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전국 10개 시도에서 ‘학생 선수, 학부모, 지도자와 함께하는 2008 스포츠 분야 인권교육’을 했다. 스포츠 분야의 폭력과 성폭력 등 인권침해 실태가 심각했고, 또 그것이 한두 사람의 어설픈 행동이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된 구조의 문제이자 인식 문제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 일에 참여해, 몇 개 도시를 방문해 강의를 했다.

지원 줄면서 해체되는 팀 늘어

내가 맡은 것은 ‘공부하는 학생 선수’라는 주제였다. 크고 작은 대회 때문에 교실은커녕 학교에 가기도 어려운 학생 선수들 앞에 서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일찌감치 ‘준프로’의 길에 들어선 중·고교 유망주들은 나의 설익은 강의와 모처럼 의자에 앉아 ‘쉴 수 있는’ 기회 때문인지 많이들 졸았다. 피차, 힘든 시간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이런 기획을 탐탁지 않게 여긴 대한체육회의 일부 관계자와 지역의 일부 지도자는 ‘수업 지도’ 명목으로 강의실에 들어오곤 했는데, 나는 나가줄 것을 정중히 요청했다. 그들 중 일부는 학생 선수들에게 ‘차렷 열중쉬어!’를 몇 차례 시킨 뒤 ‘인권 강의’를 잘 들으라고 지시하며 강의실을 나갔다. 그로테스크한 풍경이었다.

내 강의가 끝난 뒤 또 이어지는 다른 강의 때문에 잠깐의 휴식 시간이 있었는데, 나는 화장실에서 그 아이를 보았다. 후덥지근한 강의실을 막 벗어났기 때문인지 그 아이는 윗옷을 벗고 세수를 하고는 바로 그 옷으로 얼굴과 목을 닦았다. 날렵하고 다부진 체격이었다. 고1이었고 권투 선수였다. 나는 손을 씻으면서, 지루한 강의를 092한 죄책까지 씻으면서, “그래, 선수 생활 할 만하니?”라고 물었다. 그 아이는 물기 어린 윗옷을 천천히 입고 나서 화장실의 커다란 거울을 통해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저 한마디 내뱉었다.

“뭐, 그냥 하는 거죠.”

그 말을, 어쩌면 ‘그냥’ 내뱉은 말일 수도 있는 그 몇 마디를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말은 정말로 권투를 ‘그냥’ 한다는 게 아니라 사각의 링을 어느새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춘기 격투기 선수의 자의식이 강렬하게 표출된 것이었다. 이후 나는 순회 강의에 좀더 진지하게 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0여 개 도시를 순회하는 과정 속에 나이 어린 여자축구 유망주들도 있었던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확증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저 멀리 독일에서 전해져오는 승전보를 들으면서, 지난 6월 2010 남아공 월드컵 소식보다 더 ‘짠한’ 그 소식을 들으면서, 오히려 마음은 더욱 심란해진다.

독일에서 20살 이하 대표 선수들이 4강 신화에 도전하고 있을 때, 경남 합천에서는 2010 전국여자축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초·중·고·대학·실업 등 5개 부 53개 팀이 참가해 각급별로 수원시설관리공단, 여주대학, 오산정보고, 경기설봉중, 인천가람초교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이 대회의 초등부 참가팀은 14개. 한때 24개에 달했으나 현재 18개로 줄었고 그마저도 몇 개 학교는 한 경기를 뛸 수 있는 최소 인원인 11명이 충족되지 않아 결국 14팀이 참여했다. 서울에서는 송파초교 1개 팀뿐. 관심과 지원이 줄면서 해체되는 팀이 늘고 있는 실정이 이번 대회에 반영된 것이다.

대한축구협회는 2002년 이후 여자축구 발전에 대한 장기적인 프로그램을 추진해왔다. 여자축구 선진국에 비해 그 저변이 현저히 취약한 상태에서 ‘성적’을 내기 위해 연령별 상비군 제도를 도입하고, 이 바탕 위에서 엘리트 선수를 집중적으로 선발해 키웠다. 7년 동안 월드컵 잉여금으로 여자축구팀 창단을 돕거나 초·중·고를 대상으로 국내 대회 출전 참가비를 지원해 여자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여기에 한·중·일 친선 여자축구대회와 피스컵코리아조직위원회가 주관하는 ‘피스퀸컵’ 대회 등도 경기력 향상에 이바지해왔다. 그 결과 성인 여자축구 상설 리그인 ‘WK리그’가 지난 2009년 개막하는 등 상당한 성취를 이뤘다.

유망주든 일반 학생이든 함께 공 차는 문화

이런 과정에서 최인철 감독의 20살 이하 대표팀이 4강 신화를 이룬 것이다. 지소연을 비롯한 주요 선수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체계적인 훈련 속에서 기본기부터 착실하게 다졌으며, 그렇게 성장한 선수들이 2002년 월드컵 이후 조금은 확장된 여자축구의 지평 위에서 각급 대표와 유소년 상비군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들보다 선배가 되는 선수들이 대체로 다른 종목의 유망주였다가 축구장으로 걸음을 옮긴 것에 비해, 지금의 20살 이하 선수들은 어릴 때부터 신체 리듬을 축구에 맞춰 성장해왔기 때문에 패스, 킥, 볼터치 등 기본기부터 착실하다.

그러나 여전히 현실적 처우와 미래의 기대가치는 취약하다. 그 때문에 운동에 소질 있는 아이들과 그 부모는 아직까지 미래가 불투명한 여자축구보다는 전통과 처우와 연봉이 상대적으로 좋은 농구와 배구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편이다. 위로 갈수록 상황은 열악하다. 현재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여자축구 고등부팀 수는 16개이고, 선수는 339명이다. 대학팀은 겨우 6개고 선수 158명이 있다. 그중 영진전문대는 2010년 들어 신입생을 받지 않기로 했다. 고교 선수들의 대학 진학이 더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대학을 마친 선수들의 선수 생활 지속 여부도 점점 불투명해진 것이다. 여자축구 지도자들의 형편 또한 여의치 않다. 남자축구에 비해 처우가 부족하고 미래 또한 어둡다.

미국은 대학팀만 800여 개고, 일본도 50여 대학팀이 있다. 4강에서 맞붙은 독일의 경우 등록 선수가 105만여 명에 달하고, 이 가운데 16살 이하 선수가 무려 33만9512명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자축구 선진국의 경우 성장기의 일상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축구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스포츠 선진국이기도 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독일 같은 곳에서 장차 스포츠를 직업으로 삼을 유망주나 일반 학생이나 큰 차이 없이 학교 안팎의 문화생활을 함께한다. 체육 교육에서 성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공을 차고 싶으면 성별에 관계없이 축구화를 신을 수 있다. 장래성이 보인다고 해서 갑자기 교실에서 사라지지도 않는다. ‘저변’이란 단순히 천연 잔디 구장 개수나 등록 선수 현황이 아니라 청소년의 성장 과정에 축구가 녹아 있는 현실을 가리킨다.

‘어려운 가정환경’만 선전할 때인가

20살 이하 여자축구 대표팀의 ‘4강 신화’를 전하는 일부 언론의 기사는 예외 없이 ‘한부모 밑에서 어렵게 성장’한 고행담을 전한다. 마치 가정이 어려워야 실력이 늘어난다는 주장을 하는 듯하다. 물론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성공 신화의 눈물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은 대다수 유망주가 어려운 여건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교육 문화가 ‘정상화’되는 것이다. 축구(스포츠 일반까지)가 성장기 학생의 일상 문화로 스며드는 것, 성별이나 빈부나 성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활달하게 학교 안팎에서 축구(스포츠)를 접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유망주가 자연스럽게 발탁되는 과정이 우리에게는 절실하다. 그런 ‘저변’에 의해 축구(스포츠) 그 자체에 대한 가치와 관심이 증대되고 팀 수도 늘어나게 되면, 미디어와 기업이 자연스럽게 보조를 맞추게 되는 것이다. 그 미래를 향해 지금 20살 이하 여자 대표 선수들이 독일에서 안간힘을 다해 뛰고 있는 것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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