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와이번스의 인기에 힘입어 인천 문학구장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 2009년 10월14일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응원하는 SK 팬들. 연합
아주 우연히, 지극히 감상적인 이유로 야구장을 다시 찾았다. 2000년 현대 유니콘스가 고향 인천을 떠난 이후 프로야구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철저하게 야구장과 담을 쌓고 살았었다. 사회인 야구에서 공을 던지기는 했지만, 스포츠 뉴스에 야구 소식이 나오면 채널을 돌려버렸고 인터넷 뉴스에서도 야구 기사는 클릭하지 않았다. 물론 16년 동안 맹목적으로 좋아하던 무언가를 잊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삼미·청보… 늘 꼴찌였지만처음 야구장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7살 때였다.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을 배낭에 넣고 옛 도원동 야구장의 1루 스탠드에 앉아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팀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 팀은 이기기보다는 질 때가 압도적으로 많은 동네북이었다. 1984년 시즌 삼미는 전기 리그와 후기 리그에서 모두 꼴찌를 했다. 그래도 야구장의 아저씨들은 를 부르며 소주를 입에 털어넣었다. 우리가 인천에서 태어났으니 어쩌겠느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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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청보그룹이 팀을 인수해 ‘핀토스’로 개명했지만 꼴찌는 여전히 우리 몫이었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니 ‘핀토’는 ‘얼룩무늬 말’이라는 뜻이었는데, 얼룩말이 사자·호랑이·곰에게 늘 잡혀먹는 신세인 것은 당연한 운명인 듯했다. 나와 친구들은 핀토스라는 팀 이름을 지은 사람을 원망하면서도 인천구장의 장외로 홈런을 날려보내던 김동기와 김바위의 이름을 외쳤다.
그렇게 나는 야구팬이 되어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저녁이면 라디오를 켜놓고 야구 중계를 들었고, 다음날은 친구들과 경기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학교에서도 별명이 ‘야구에 미친 놈’이었다.
청소년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8시 학교로 향하는 내 손에는 스포츠신문이 들려 있었고, 지금도 거부하고 싶은 야간 자율학습에서 탈출해 야구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다음날 아침 담임선생이 휘두르는 하키 스틱에 맞아 엉덩이가 시퍼렇게 멍들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야구와 함께하고 싶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다는 밀레니엄은 인천 야구팬들에게는 ‘종말의 해’로 기억됐다. 2000년 1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인천에서 8천km나 떨어진 영국에서였다. 현대 유니콘스가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고 전북을 연고지로 했던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들로 새롭게 창단할 SK가 인천으로 온다는 하늘이 샛노래지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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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원년부터 역사를 쌓아온 우리 팀을 통째로 옮기겠다는 발상이 기가 막혔다. 인천 팬들을 서울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현대 유니콘스 구단 사무실에 국제전화까지 걸었다. 구단 직원은 “아직 결정된 것이 없으며, 언론의 기사만 믿지 말고 앞으로도 많은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구단 직원의 한마디는 구원의 메시지처럼 들렸다. 잠시나마 무서운 꿈에서 깨어난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몇 주 뒤, 현대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도망쳤고, SK로 새롭게 창단한 쌍방울 레이더스가 인천에 들어왔다.
“SK 파이팅!” 외치는 시민들
16년 동안 무얼 해온 것인가? 프로야구가 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런 고민 속에 몇 주를 멍청한 머리로 살았다. 타국에까지 고이 모셔온 선수들의 사인 스크랩북을 태워버릴까도 고민했다. 그러나 선수들이 무슨 잘못이냐 싶어 차마 그러지 못했다. 이후 몇 달은 ‘현대’에 대한 증오심과 함께 살았고, 나중에는 아예 프로야구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잊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주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었다.
실패한 사랑을 아물게 하는 가장 좋은 치료 방법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나는 축구로 눈을 돌렸다. 당시 내가 머물던 곳이 축구를 ‘종교’로 믿는 나라 영국이었기에 야구를 잊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지역 아마추어리그부터 프로 2부, 3부 리그 경기까지 갈 수 있는 축구장은 모두 찾았다. 그렇게 몇 년을 노력하자 야구의 기억도 뇌의 해마와 편도에 봉인돼 희미해졌다. 이때의 시간이 훗날 축구 전문기자로 일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떠올려보면 인생은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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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그토록 잊기 위해 노력하던 야구장을 다시 찾은 계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인천의 한 번화가를 걷다 마주친 한 무리의 사람들 표정이 계기가 됐다. 사람들은 신발가게 앞에 설치된 대형 TV를 통해 야구를 관전하고 있었다. 여중생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SK 선수가 나오자 환호성을 질렀고, 머리가 희끗한 50대 장년도 옅은 미소와 함께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잘 모르는 선수들이 나오는 야구보다는 사람들의 표정에 더 관심이 갔다. 그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가 서려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인천 SK 파이팅!”
화면에 비치는 문학야구장은 평일인데도 많은 관중이 들어찼고, 거리의 시민들도 야구를 보며 즐거워했다. 순간 옛 도원 구장의 바람에 실려오던 컵라면과 오징어 굽는 냄새를 떠올렸다. 우리는 고향 팀이란 이유만으로 삼미·청보·태평양·현대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었다. 무조건적인 사랑, 그 시절은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현대 유니콘스가 떠나고 많은 인천 시민이 야구를 버렸다. 하지만 이제 그 빼앗긴 야구장에도 또 다른 봄이 찾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번 야구장에 가보고 싶었다. 표를 사서 경기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동안 느끼던 설렘이 그리웠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실제로 야구장을 찾았다. 1960년대에 지은 낡은 야구장만을 기억하는 내게 최신 시설과 화려한 장내 프로그램은 낯설기만 했다. 인천 시민은 그곳에서 맥주와 치킨, 바비큐 등을 즐기며 야구와 함께 행복해했다. 경기 막판 가 울려퍼지자 나도 모르게 일어나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우리’ 선수였던 박재홍이 나올 때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아직 상처는 아물지 않아
이후 스포츠지의 야구면을 다시 펼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면 케이블 TV의 야구 중계도 찾는다. 그러나 내 행동들은 여전히 조심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많은 팬이 있는데 SK 와이번스가 인천을 떠날 일은 없겠지?’라고 반문해보지만, 10년 전에도 현대 유니콘스가 인천 시민을 그렇게 내팽개칠 줄은 꿈에도 몰랐다.
SK 와이번스의 홈페이지에 접속해본 뒤에는 불안이 조금 더 증폭됐다. 인터넷 창 상단에는 와이번스 홈페이지 대신 ‘SK 스포츠단’이라는 글자가 떴다.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부천 SK 축구팀을 하루아침에 제주도로 옮겨버린 SK의 만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그들은 팬들의 시선이 두려운 듯, 팀 이름을 아예 ‘제주 유나이티드’로 바꿨다). 축구계 언저리에서 일하며 SK가 부천 팬에게 준 슬픔을 목격하고 전해들었고, 나는 그들의 아픔에 한없이 공감했다.
10년 만에 다시 야구장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야구팬으로 돌아갈 준비는 되지 않은 것 같다. 지역 팀으로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하는 SK의 시도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는 자연스레 따라 부를 수 있을지언정, ‘인천 SK’라는 구호는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한 번 그렇게 외치고 나면 다시 사랑에 빠질까 두려웠다. 연고 이전이라는 배신에 깊게 베인 상처는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조건호 스포츠마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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