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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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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계의 박노자’ 존 듀어든을 아시나요


한국 축구에 대한 애정과 정보를 바탕으로 촌철살인과 풍자가 어우러진 글을 쓰는 영국인 칼럼니스트
등록 2010-01-20 16:45 수정 2020-05-03 04:25

여기 한 사나이가 있다. 돼지갈비보다는 삼겹살을 좋아하는 사나이. ‘너구리’보다는 ‘신라면’을 좋아하는 사나이. ‘소녀시대’도 좋지만 이효리를 더 좋아하는 사나이. 그리고 삼겹살이나 이효리만큼이나(아니 그 이상으로) 한국 축구를 사랑하는 칼럼니스트, 존 듀어든이다.
‘듀어든 현상’이라고 하면 심한 표현이 될까. 그가 포털 사이트 ‘네이트’에 연재하는 칼럼은 젊은 축구팬들의 성지순례와 같은 곳이다. 그의 새 칼럼이 게재되는 순간, 그 흔한 ‘1빠 놀이’도 없이, 곧장 팬들은 열렬한 환호와 지지부터 보낸다. 이 ‘악플 공화국’에서 압도적인 수치로 수백 개의 선플을 받는 필자가 있다면 아마도 존 듀어든이 유일할 것이다.

‘나와 의견이 다르지만, 뭐지? 이 설득력은?’

칼럼니스트 존 듀어든. AZA STUDIO

칼럼니스트 존 듀어든. AZA STUDIO

수백 개의 기막힌 선플 중에 몇 개 간추려본다. ‘듀어든을 축구협회로’(권효상), ‘듀어든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고영환), ‘나와 의견이 다르지만, 뭐지? 이 설득력은?’(김홍중), ‘한국인보다 한국 축구를 더 잘 아는 영국인’(신정환), ‘듀어든 이름을 사칭한 한국인이 쓰는 것은 아닌가 의심해본다. 이 사람 진짜 한국 사람 같다’(김충현), ‘자네 국가대표팀 감독 해볼 생각 없는가?’(하범휘)….

존 듀어든. 영국 블랙번 출신인 그는 영국의 최고 명문 가운데 하나인 런던정경대(LSE)에서 역사와 정치를 공부했으며, ‘5년 동안 매주 2~3편의 에세이’를 제출해야 했던 체험이 능란한 칼럼니스트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축구 칼럼은 영국의 축구 전문지 에 기고하면서 시작했고, 현재는 〈AP통신〉 〈CNN〉 등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골닷컴’의 아시아 부문 편집장이기도 하다.

그가 열혈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 ‘이 사람 진짜 한국 사람 같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한국 축구와 그 문화를 깊이 알기 때문이다. 2002 한·일 월드컵 이후로 여러 일간지에서는 해외 칼럼니스트에게 지면을 할애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썼다는 것이다. 그것도 유럽의 구단이나 협회나 유럽축구연맹 같은 조직 이야기 말이다. 국내 팬들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기 어려운 소재다.

두 번째로, 그들이 어쩌다 한국 축구에 대해 쓴 적도 있는데 대체로 번지수가 틀린 훈수였다. 장기 두는데 바둑 훈수를 두는 듯한 비현실적인 제언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존 듀어든은 10년에 걸친 한국 생활, 특히 늘 축구 현장에 밀착해 판단하고 이를 다양한 정보와 취재를 바탕으로 쓴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또 박지성의 맨유 활동 등 축구팬들의 초미의 관심사를 제외하고는, 5년 가까이 쓴 글 가운데 단 한 번도 소재가 겹친 적이 없다.

2009년의 마지막 날 칼럼을 보자. 그는 ‘10년간 한국 축구 10대 충격의 순간’을 게재했다. 그중에는 ‘부천SK의 제주도 연고 이전’이나 ‘K리그 승격 거부’ 같은 두드러진 사건도 있지만, 지난 2008년 울산과 수원의 판정 시비에 따른 경기 지연까지 기억하고 또한 기록한다. 선수들의 항의로 이 경기의 전반전은 무려 20분 이상 지연됐다.

존 듀어든은 이른바 ‘정론직필’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축구협회의 권위주의적 행정은 물론 일부 심판의 부실한 자질이나 프로선수들의 아마추어 같은 행동, 그리고 스타성이 강한 선수나 감독의 행보에 대해 가감 없는 비판을 한다. 그 비판에는 풍부한 사례와 논리적 근거가 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한국 축구의 속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비판하는데, 존 듀어든은 말한다. “저는 한국과 아시아 여러 곳을 여행하며 축구를 보고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생산해냅니다. 저는 협회 관계자, 선수, 감독들과 지나치게 가까워져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그렇게 한 번 인맥에 빠져들면 큰 그림을 보는 게 어려워집니다.”

그런 그의 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대목은 날카로운 칼날로 벼리기는 해도 그것에 위트와 풍자와 유머가 살아 있다는 점이다. 공격을 받는 사람조차 우선은 웃지 않을 수 없는 절묘하면서도 지적인 유머가 그의 글을 관류한다. 그가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쓴 칼럼을 보자. 제목은 ‘산타 할아버지께…’. 주요 선수와 감독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산타할아버지에게 가상의 편지를 쓰는 형식이다.

우선 박지성. “엉덩이 보호대가 들어간 푹신한 유니폼을 갖고 싶습니다. 벤치에만 앉아 있다 보니 엉덩이가 정말 아프네요. 축구팀이 있는 도시들이 모두 나오는 유럽 지도도 필요합니다. 크리스마스 동안 집에 머물며 앞으로 진출해야 할 팀들에 대한 고민을 해보려고요.” 다음으로 이동국. “가레스 사우스게이트(이동국의 전 소속팀 미들즈브러 감독) 휴대전화 번호나 알려주세요.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할 겁니다. ‘나 말이죠, K리그 득점왕과 MVP 모두 먹었거든요. 주소 줘보세요. 골 모음 퍼레이드나 보내드릴 테니.’” 마지막으로 차범근 감독. “좋은 방석을 갖고 싶습니다. 방석이 있으면 골이 나온 다음에 기도할 때 좀더 편할 것 같아서요. 지난 시즌에는 골이 하도 안 나와서 방석도 기도도 필요 없었지만, 다음 시즌에는 분위기가 달라져야 합니다!”

비판받는 당사자도 웃지 않을 수 없는 유머가

존 듀어든. 그는 서울 마포구에 거주하며 매주 K리그 경기장을 찾는다. 필요할 경우 핌 베어벡 전 대표팀 감독이나 모하메드 빈 하만 아시아축구연맹(AFC) 회장, 그리고 잉글랜드 축구 관계자들을 취재한다. 아마도 영국 명문대 출신의 글로벌 저널리스트라는 조건이 국내 취재 환경(마감·인맥·관습)에 얽매인 기자들보다 훨씬 더 활발한 집필을 가능케 해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풍부한 정보와 성실한 취재, 비범한 직관과 날카로운 필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안는 한국 축구에 대한 사랑은 실로 존 듀어든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최근 펴낸 칼럼집 (산책 펴냄)가 이를 증명한다. 존 듀어든은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지난해 가을에 첫딸을 얻었다. 딸의 이름은 ‘단비’. 그 이름만큼이나 존 듀어든은 건조한 관습과 인맥으로 얽혀 있는 한국 축구계에 단비 같은 존재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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