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기에 인류는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치렀다. 인류 역사에서 전에 볼 수 없던 참화였다. 나머지 절반도, 평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끝마치기 무섭게 인류는 이념의 동과 서로 갈라섰고, 이후 반세기 동안 이어질 ‘냉전’이 시작됐다. 한국전쟁은 냉전의 본격화를 알린 신호탄이었다.
1989년 11월 냉전의 또 다른 상징인 독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져내렸다. 그해 12월2~3일 지중해 섬나라 몰타의 어촌 마르사실로크 앞바다에 정박한 크루즈 선박 ‘막심고리키호’에서 미국과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마주 앉았다. 조지 ‘아버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이틀간의 선상 회담을 마친 뒤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이제 세계는 한 시대를 지나, 새로운 시대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항구적인 평화의 시대로 가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무력 위협과 불신, 심리·이념적 갈등은 모두 지나간 과거의 일이 돼야 할 것입니다.”(고르바초프 서기장)
“우리는 항구적 평화를 실현하고, 동-서 관계를 지속 가능한 협력적 관계로 탈바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미래를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제가 바로 이곳 몰타에서 시작했습니다.”(부시 대통령)
회담 결과를 담은 합의문은 따로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몰타 정상회담’은 미-소 두 강대국이 공식적으로 냉전 종언을 선언한 자리로 평가된다. 부시 대통령은 회담을 마친 뒤 독일에서 미리 공수해온 무너진 베를린장벽 파편을 양국 참석자 모두와 ‘기념품’으로 나눴다. 새로운 세기를 앞둔 인류가 화해와 평화를 다짐한 순간이다. 그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유일하게 남은 ‘냉전의 외딴섬’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이 몰타 회담에 비견되는 이유다. 앞서 송영무 국방장관은 6월2~3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7차 아시아 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국민은 물론 국제사회 전체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반도의 완벽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해 세계사에 남을 역사적 합의를 이룰 것이라 기대합니다.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는 동북아뿐 아니라 세계 평화와 번영을 보장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이럴 경우 북-미 정상회담은 냉전 종식의 시발점이 된 1989년 미-소 간 몰타 회담에 비견되는 세계사적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전격적인 정상회담 수용과 급물살을 탄 북-미 접촉, 일방적인 회담 취소 발표와 특사 파견을 통한 봉합에 이르기까지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다만 이 과정을 거치면서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위한 ‘눈높이 맞추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낸 것으로 보인다. 북-미 정상회담 취소 발표 8일 만인 지난 6월1일 “회담이 예정대로 열릴 것”임을 밝히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발언이 이런 분석을 뒷받침해준다. 이혜정 중앙대 교수의 말이다.
“미국 쪽이 ‘기대치’를 상당히 많이 낮췄다. 기대치와 목표를 조정하는 방식 역시 급속하게 이뤄졌다. 그간 전문가들이 걱정한 것은 정책 결정이 충동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높은 목표를 가지고 회담에 임한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일괄타결을 주장해온)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비핵화를 ‘과정’이라고 말했다. 빨리 할 수도 천천히 할 수도 있다면서, 북한에 대해 ‘시간을 갖고 해나가자’고 얘기했다. 한 번의 정상회담이 아니라 여러 번의 정상회담도 가능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비핵화의 반대급부로 일정한 체제 보장이 필요한데,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이에 대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선 안전보장·안보제공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쉽게 가기는 어렵다’는 점도 인정했다. 지금까지 북한에 대한 비판은 양극단이 있었다. 첫째, 북한이 체제 위협을 느낀다고 하는데, 그걸 미국이 해소해줄 수 없다는 논리다. 미국은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전혀 없는데도 북한이 위협을 느낀다면, 미국이 어떻게 하든 북한은 계속 안보 위협을 들먹일 것이란 얘기다. 둘째, 북한이 핵무장을 한 이유는 남한 적화통일을 위한 것이란 주장이다. 따라서 북한이 절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폼페이오 장관의 발언은 이런 양극단의 주장을 정면에서 깨는 얘기다.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안보제공은 이제 미국 쪽 임무가 됐다. 분명 의미가 큰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7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뒤 기자회견을 열어 비슷한 발언을 되풀이했다. 특히 “우호적 협상을 앞둔 시점이므로 ‘최대의 압박’이란 표현을 굳이 쓸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만약 회담이 끝난 뒤 내가 ‘최대의 압박’이란 표현을 쓴다면, 회담 결과가 좋지 않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폼페이오 장관도 같은 날 언론 브리핑에서 ‘체제안전 보장 방안’을 묻는 질문에 “김정은 위원장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이전 행정부는 하지 않았던 일을 해야 할 것”이라며 “(체제안전 보장 방안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의회에 관련 문서를 제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의제에 대해선 일정한 합의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과정’을 언급한 것은, 북한이 주장한 ‘단계적·동시적 조처’를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속 회담 개최 가능성을 언급한 것도 마찬가지다. 비핵화의 반대급부로 미국이 북한에 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제도적 장치’를 모색하는 것 같다. 우리는 4·27 판문점 선언에 대한 국회 비준 동의 절차를 아직 거치지 못했지만, 북-미 합의문이 나오면 의회에서 비준 동의 절차를 밟을 것으로 보인다. 법적 구속력을 가진 합의문이 미국이 생각하는 ‘제도적 장치’인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평양과 워싱턴에 (수교에 앞서) 이익대표부를 설치하는 문제까지 거론된다. 북이 원하는 것과 미국이 원하는 것 사이에 일정한 합의점을 찾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악관 쪽 움직임이 낙관론의 근거라면, 미 의회 쪽 상황은 비관론에 부채질을 하고 있다. 척 슈머 원내총무를 비롯한 민주당 상원 중진의원 7명은 6월4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5개항에 이르는 북-미 합의 기준을 제시하고, “기준에 맞지 않으면 대북 제재 해제에 협조하지 않을 것”임을 공언했다. 이들은 특히 기존 핵·미사일에 더해 생화학무기를 비롯한 모든 대량살상무기(WMDs)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뿐 아니라 중단거리미사일까지 폐기 대상으로 거론했다. 또 “언제, 어디서든” 사찰·감시가 가능해야 하며, 북한이 이에 응하지 않으면 언제든 제재를 재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도 조건으로 내걸었다. 사실상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의 ‘강경론’과 맥을 같이하는 주장이다. 이혜정 교수의 말이다.
트럼프, 점점 짙어지는 위기의 그림자“대단히 위선적인 태도다.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가 ‘예방전쟁’을 거론할 때 민주당 쪽은 협상을 하라고 강조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합의를 파기했을 때, 민주당 쪽은 강력히 반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핵개발 자체도 제대로 막지 못하고, 미사일 개발도 막지 못하고, 테러단체 지원 문제도 전혀 다루지 못한 합의’라며 일방적 파기를 선언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을 포함한 미국 주류는 일치된 목소리로 ‘이게 최선이다. 미사일 문제는 따로 다뤄야 한다. 지역 안정 문제도 별도로 협상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똑같은 세력이 북한의 모든 대량살상무기, 생화학무기까지 폐기하라고 주장한다. 미사일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중적이고, 모순된 주장이다.”
의회 쪽 움직임은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 국내 정치적 상황과 고스란히 맞닿아 있다. 이란 핵합의뿐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싸고 포위망을 좁혀오는 위기의 그림자가 갈수록 짙어지고 있다. 중국을 겨냥해 포문을 연 무역전쟁은 캐나다와 유럽연합 등 전통적 우방국으로 확전일로를 치닫고 있다. 2016년 대선 때 러시아의 선거 개입 의혹을 수사 중인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팀은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인 폴 매너포트 선거대책본부 위원장이 ‘위증 교사’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갈수록 번지는 ‘러시아 스캔들’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셀프 사면’을 거론하자, “대통령이 법 위에 군림하겠다는 거냐”는 비난이 거세지고 있다. 사면초가로 몰리는 상황이다. 구갑우 교수의 말이다.
북-미 정상회담 이후가 걱정스러운 이유“미국 국내 정치적 맥락에서 볼 수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북한을 도구로 쓰는 형국이다. 사실 민주당 쪽이 그간 요구해왔던 내용을 트럼프 대통령이 이행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반트럼프 세력이 북한 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고 있다. 일종의 ‘북풍’이다. 4·27 판문점 선언 이후 목소리가 줄어들긴 했지만,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보수의 반격이 준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북-미 정상회담 이후 본격화하지 않을까 싶다.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상원에서 인준받으려면 의석 3분의 2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민주당 의원들은 공개서한에서 비준 동의 절차를 거부할 수도 있다고 암시했다. 북-미 정상회담 이후가 더 걱정스러운 이유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국내 정치적 위기가 트럼프 대통령이 현실적 접근을 하도록 기여한 점도 있다. 북-미 협상조차 파국으로 간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울 외교적 업적이 전무하게 된다. 6월2~3일 샹그릴라 대화에서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과 송영무 국방장관이 나눈 대화 내용을 곱씹어보면, 한-미 연합훈련에 일정한 형태 변환을 줄 수 있다는 점에 합의한 것으로 보인다. 핵 관련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도 없을 것이고, 언론에 훈련도 공개하지 않고 ‘조용하게’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정치적 위기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라도 해결해야 한다. 따라서 북-미 정상회담을 성공시켜야 하는 정치적 부담이 훨씬 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를 둘러싼 국제정치적 위기도 커지고 있다. 이란 핵합의 일방 파기와 동맹을 겨냥해 불을 뿜고 있는 무역전쟁의 여파다. 힘의 우위에 바탕한 미국의 패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6월8일 캐나다 퀘벡주 샤를부아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앞두고 유럽 쪽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이를 웅변한다.
영국·프랑스·독일과 유럽연합 쪽은 최근 폼페이오 장관과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 앞으로 보낸 공개서한에서 미국의 추가 이란 제재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특히 이란과 정상적 거래를 하는 제3국 기업·은행에도 제재를 가하는 이른바 ‘세컨더리 보이콧’을 유럽 기업에 대해서는 예외로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동맹으로서, 우리는 미국이 유럽의 안보 이익을 침해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강조했다.
평화와 번영, 새로운 안보 시대정상회의 개막을 하루 앞둔 6월7일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주요 7개국에 참가하는 미국을 제외한 6개국을 합치면, 미국보다 큰 시장이다. 미국의 대통령은 고립되는 것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인데, 필요하다면 우리도 ‘주요 6개국’이 되는 것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냉전을 관통해온 대서양 협력 체제가 파열음을 내고 있다. 저무는 옛 체제의 끝자락에 한반도 냉전체제가 매달려 있다. 이혜정 교수와 구갑우 교수의 이구동성이다.
“북-미 정상회담을 1989년 미-소 몰타 정상회담에 비유한 것은 한반도와 동아시아 차원에서 냉전 종언을 선언하는 상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 질서, 대북 적대의 기성 질서를 지키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보수세력과 미국의 반트럼프 진영이 3자 연합 전선을 구축할 가능성도 있다. 대비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한반도 평화다. 그 안에 비핵화가 포함돼 있다. 지난해 북핵 문제가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이 되면서, 한반도에서 전쟁 위협이 커졌다. 이전과 전혀 다른 빠른 속도로, ‘정상 차원’으로 협상의 급이 올라간 것도 이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도,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평화와 번영, 새로운 안보의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 이제야 여기까지 왔다. 다시 돌아갈 순 없다. 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안 된다.”
대담 이혜정 중앙대학교 교수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정리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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