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소중함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평화를 일궈내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 더 깊게 다가온다.”
2박4일 일정으로 러시아를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6월21일 하원(두마)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2020년 수교 30주년을 맞는 두 나라의 협력 확대 방안으로 미래 성장동력 확충, 극동 개발협력, 교류 기반 강화 등을 언급한 뒤였다. 문 대통령의 발언을 좀더 들어보자.
<font size="4"><font color="#008ABD">경제공동체 언급 나선 문 대통령</font></font>“지금 한반도에는 역사적인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판문점선언을 통해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더 이상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세계 앞에 약속했다. 이어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북-미 간 적대관계 종식을 선언했다. 이제 남·북·미는 전쟁과 적대의 어두운 시간을 뒤로하고 평화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한반도에 평화체제가 구축되면 남북 경제협력이 본격화될 것이며, 러시아와의 3각 협력으로 확대될 것이다. 3국 간의 철도·에너지·전력 협력이 이뤄지면 동북아 경제공동체의 튼튼한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남북 간의 공고한 평화체제는 동북아 다자 평화안보협력체제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달라졌다. 평창겨울올림픽을 앞둔 지난해 12월 중순 한-미 연합군사훈련 연기 발언을 내놓을 때만 해도 대단히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꿈처럼 성사된 4·27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서도,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디딤돌’이라 표현했다. 성공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만들어낸 낙관적인 정세 때문일까?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넘어 동북아 경제공동체와 다자안보체제까지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이혜정 중앙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5월25일 북-미 정상회담이 한 차례 취소됐을 때 입장문을 내어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는 포기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역사적 과제’라고 말했다. ‘소통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셈이다. 북-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6월11일엔 수석보좌관회의 모두발언에서 ‘북핵 문제와 적대관계 청산을 북-미 간의 대화에만 기댈 수는 없다’고 말했다. 북-미 정상회담 결과와 상관없이 남북이 가야 할 길을 가겠다는 뜻이다. 이어 6월14일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모두발언에선 ‘북한 비핵화와 체제 보장이라는 안보 과제를 넘어 한반도 평화와 남북 공동번영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받아들여야 할 때다. …나아가서는 동북아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희망의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핵 문제를 뛰어넘어 동북아 차원의 다자안보체제를 말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꿈이 점점 커지고 있다. 놀랍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활짝 꽃핀 ‘외교의 시대’</font></font>‘외교의 시대’가 부활했다. 바야흐로 ‘꽃을 피우고 있다’고 해도 좋겠다. 북-미 정상회담 일주일 뒤인 6월19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 베이징으로 날아가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다. 지난 석 달 남짓 만에 벌써 세 번째 방중이다. 앞선 두 차례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김 위원장의 방중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단순히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자리였다면, 굳이 김 위원장이 직접 나설 필요가 있었을까? 더구나 북한의 정치·외교·국방·경제를 책임지는 당 지도부도 대거 김 위원장을 수행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북한이 일주일 간격으로 소련·중국과 동맹을 체결했던 1961년 7월을 떠올리게 한다. 싱가포르에서 새로운 북-미 관계를 만든 직후다. 특히 이번 북-중 정상회담에서 인상적인 건 ‘정세가 바뀌어도 북-중 관계는 유지된다’는 발언이다. 혹 북-미 갈등이 재연되거나, 한반도 문제의 해법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해도 북-중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다짐이자 약속이다. 북-미 관계 개선에 이어 북-중 동맹을 복원하는 방중이다. 북한 처지에선 적극적인 등거리외교, 균형외교를 본격화한 셈이다. 덧붙여 핵 문제와 관련해 북-미 공동성명에서 공개되지 않은 내용도 설명했을 것이다. 방중단에 북한 경제를 총괄 지휘하는 박봉주 내각총리가 포함된 것은 대북제재 해제와 북-중 경제협력에 대한 논의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은 김 위원장의 세 번째 방중을 이례적으로 신속하고 자세하게 전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6월19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환영연회에서 나온 북한과 중국 두 지도자의 발언이다. 은 6월20일치 보도에서 시 주석이 환영사에서 “중-조(북) 두 당과 두 나라 관계의 불패성을 전세계에 과시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답사에 나선 김 위원장도 ‘한집안 식구’와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특별한 관계’ 등의 표현을 썼다. 특히 김 위원장은 “조선반도(한반도)와 지역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는 역사적인 여정에서 중국 동지들과 한 참모부에서 긴밀히 협력하고 협동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계속해서 구갑우 교수의 말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김정은의 ‘친서민 행보’</font></font>“김정은 위원장은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6월9일 평양 대동강 수산물 식당을 현지 지도했다. 서울의 노량진수산시장 같은 곳이다. 인민들과 접촉 범위를 넓히는 이른바 ‘친서민 행보’다. ‘반미’ 담론으로 체제를 유지해온 북한이 이제 북-미 관계 개선을 통해 경제 중심 노선으로 가려고 한다. 미국의 군사적 안전보장 조처가 어느 정도 이뤄져야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될 수 있다고 느낄까?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이번 북-중 정상회담에서 (중국이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는) 군사적 측면에서 어떤 논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북-중 관계의 역사를 보면, 사실 두 나라가 그리 좋지 않았던 적이 많다. 한국전쟁 때는 중국 지원군이 김일성 주석에게서 작전지휘권을 박탈하기도 했다. 전쟁 이후엔 지원군사령관으로 왔던 펑더화이가 방북해 김 주석의 지위를 박탈하려고도 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으로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하던 시기에, 중국이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인도적 문제에 개입했다면 북한의 어려움은 상당히 줄었을 것이다. 그런 역사를 보면, ‘한집안 식구’니 ‘한 참모부’ 등의 표현이 나온 건 서로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북으로선 경제적 필요와 군사안보적 필요가 맞아떨어졌을 것이고, 중국으로서도 미-중 관계 속에 북한을 자기편으로 확실히 해두려는 움직임이 아닐까 싶다.”
미국 쪽도 달라진 모습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6·12 북-미 정상회담을 마친 뒤 한·미·일 3국 외교장관 회담을 위해 서울을 찾았다. 그의 다음 행선지는 중국이었다. 지금까지 미국이 보여온 것과 다른 행보다. 이혜정 교수의 말이다.
“이전까지 미국은 북한과 직접 협상을 거부한 채 무시하고, 한·미·일을 하나로 묶어 동맹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일관해왔다. 여기에 북핵 문제를 중국 쪽에 떠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에 폼페이오 장관이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에 이어 중국을 방문한 것은, 한반도 정세가 완전히 새 국면에 들어섰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외교가 부활한 것이다. 이전 외교는 미국 중심의 ‘부챗살’ 모양으로 이뤄졌다. 지금은 다르다. 남북은 4·27 판문점선언에서 ‘전쟁 불가’와 ‘운명공동체’임을 선언했다. 그 정신 위에서 남북 중심의 새로운 외교가 펼쳐지고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한-미 동맹 조정 ‘금기’ 건드리나</font></font>한반도 냉전체제 해체는 두 갈래 길이다. 한국전쟁이 내전이자 국제전으로 치러졌기 때문이다. ‘내전’의 당사자인 남과 북은 4·27 판문점선언을 통해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다짐했다. 인위적인 체제 흡수도 통합도 시도하지 않는, 새로운 남북관계를 약속했다. 남북 사이의 ‘내전’이 끝났음을 선언한 것이다. 남은 것은 ‘국제전’이다. 계속해서 이혜정 교수의 말이다.
“남쪽은 1991년 ‘국제전’의 상대였던 중국·러시아와 이미 관계 개선을 했다. 북쪽이 ‘국제전’을 끝내려면 북-미 관계가 개선돼야 한다. 북-미 수교가 이뤄지면 일본도 따라올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한국전쟁의 ‘국제전’이란 측면이 끝났음을 알리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세계적 차원의 냉전이 끝난 뒤 남북 간 힘의 격차가 갈수록 커졌음에도, 한반도에서 냉전 질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북핵 문제가 ‘블랙홀’처럼 다른 모든 문제를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은 냉전이 끝난 직후부터 한국 쪽에 작전통제권을 넘겨받으라고 요구했다. 우여곡절 끝에 평시 작전통제권은 넘겨받았지만, 전시 작전통제권 이양은 계속 미뤄졌다. 북핵 문제에 일정한 해법이 보이면, ‘금기’로 여겨왔던 한-미 동맹 조정을 포함해 지금까지 미뤄온 문제가 한꺼번에 닥쳐올 것이다. 당장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문제를 중국이 제기하고 나올 수도 있다. 얼음이 녹으면 안에 있던 문제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공론화할 시점이 돼가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은 북한에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CVID)의 비핵화를 강조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목표다. 6·12 북-미 공동성명에서 ‘검증 가능’(V)과 ‘돌이킬 수 없는’(I)이란 표현이 빠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사실 ‘돌이킬 수 없는’이란 말은 한반도 평화체제에 더욱 어울리고, 또 절실한 표현이다. 이혜정 교수와 구갑우 교수의 이구동성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평화-군축-경제 혜택의 선순환</font></font>“판문점선언에 따라 남북이 군축 협상에 들어가면, 국방개혁 문제 등이 만만찮을 것이다. 남북의 군사적 긴장 완화 조처를 어느 정도 속도로, 어느 수위까지 진행하느냐가 관건이다. 최악의 경우 북한과 미국이 다시 갈등 상황으로 치달을 때, 무엇으로 정세 악화를 막을 것인가?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평화의 방어벽이 필요하다.
평화가 이익이 되고, 평화 때문에 먹고사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평화로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평화로 이익공동체를 건설해야 한다. 평화를 전제로 군축에 나서고, 군축 효과로 피부에 와닿는 복지와 경제적 혜택이 만들어져야 한반도 평화를 위한 국내의 토대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것이 다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줄여줄 것이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평화가 경제다’라고 말했다. 이제 실행에 옮길 차례다.”
<font color="#008ABD">대담 </font>이혜정 중앙대학교 교수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font color="#008ABD">정리</font>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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