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웃긴다. ‘가짜뉴스’, 특히 《NBC》와 《CNN》 말이다. 북한과 한 협상 흠집내기 경쟁이라도 하는 거 같다. 500일 전만 해도 이번 협상과 비슷한 걸 하라고 ‘애걸’을 했다. 흡사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우리나라의 주적은 바보들이 쉽게도 보급하는 ‘가짜뉴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주류 언론 딴지에 뿔난 트럼프</font></font>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뿔났다.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을 마치고 귀국한 직후, 주류 언론에 대한 적개심을 여과 없이 트위터에 드러냈다. 하긴,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반트럼프’ 정서로 똘똘 뭉친 미국 주류 세력과 트럼프 대통령의 갈등은 2016년 대선 기간부터 노골적이었다. 이번엔 번지수 잘못 짚은 듯싶다. ‘미움’이 눈을 가려, 트럼프 대통령의 ‘변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싫어서 눈을 감은 건지도 모른다.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은 분명 ‘역사적’이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북-미 정상의 공동성명에 ‘처음’이란 말과 ‘역사적’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두 정상이 손을 잡는 순간 그 두 가지를 다 보여준 것 같다. 미국은 지금까지 적대관계에 있던 사회주의 국가와 모두 관계를 정상화했다. 전쟁을 치렀던 중국·베트남과도, 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와도 수교했다. 북한만 예외였다. 약 70년에 걸친 적대관계를 종식할 수도 있는 첫 만남이란 점에서 1차적으로 의의가 있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밖에서 핵무장 국가가 됐다. 미국은 조약 안에서 공식 인정받은 핵보유국이자 패권국가다. 그런 두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사상 처음 만났다. 그간 북한은 주류 국제정치학의 문법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지속해왔다. 강대국에 편승해 동맹을 맺는 방식이 아닌, 이른바 ‘내적 세력균형’ 정책, 핵무기 개발로 체제 안전을 보장받는 방식을 추구해왔다.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 같은 작은 나라가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핵억지력을 확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작은 나라’와 패권국가가 만났다. 인상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6월1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연 기자회견에서 나온 질문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CVID)의 비핵화란 목표는 어디로 갔느냐는 게다. 둘째, 참혹한 인권유린을 서슴지 않는 북한과 어떻게 협상할 수 있느냐는 항변이다. 셋째, 북한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다. 1시간5분에 걸친 기자회견 내내 같은 질문이 무한 반복됐다. 이혜정 중앙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인공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걸린 장소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악수를 했다. 이를 두고 미국 주류 진영에선 ‘미국 국기를 모독했다’는 비난이 나온다.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서 채택한 공동성명에 합의하지도 않았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를 ‘나약하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동맹을 공격하는 건 트럼프 대통령의 전매특허다.
패권국가로서 미국은 일종의 전세계 국가등급 체계, 미국판 문명표준 같은 걸 갖고 있다. 19세기 서구가 비서구 지역을 식민화할 때, 서구의 제도와 관습·관행을 문명의 기준으로 놓고 이에 부합하지 않으면 ‘야만’으로 싸잡아 비난하던 ‘오리엔탈리즘’ 말이다. 냉전기에도 그랬지만 탈냉전기를 맞아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이란 자신감을 바탕으로 이른바 ‘미국적 문명표준’을 만들었다. 그 표준의 최상위에 주요 7개국이 있다. 거기에 끼지도 못하는 나라가 ‘민주주의도 인권도 무시한 채 국제사회의 기준을 지키지 않는’ 북한이다. 캐나다의 트뤼도 총리를 비난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하루 뒤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한 것 자체가 미국 주류의 입장에선 미국적 문명표준을 전복하는 행위로 느껴졌을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과거 본 김정은, 미래 본 트럼프</font></font>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정은 위원장은 모두발언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다”고 했다.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또 그릇된 편견과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귀를 가리우기도 했는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고도 했다. 오랜 세월 적대로 점철된 북-미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핵무기 폐기란 ‘전략적 결단’을 했다는 뜻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화답해 “굉장한 성공을 거둘 것이다. (김 위원장과의 만남이) 내게는 영광이고, 우리는 엄청난 관계를 맺게 될 것임을 확신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이 ‘과거’를 되돌아봤다면, 트럼프 대통령은 ‘미래’를 강조한 셈이다. 구갑우 교수의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전쟁연습’(워게임)을 거론하며, 한-미 연합훈련 중단 카드를 꺼냈다. 주한미군에 대해선 논의하지 않았다면서도, ‘집으로 데려오고 싶다’며 철수 가능성도 거론했다. 많은 얘기가 오간 것으로 보인다. 공개된 공동성명 외에 따로 부속 합의서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공동성명에 없는 많은 얘기를 기자회견에서 공개했기 때문이다.”
‘비핵화’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에도 큰 변화가 감지된다. 회담을 목전에 두고 비핵화를 ‘과정’이라 표현했을 때부터 눈에 들어온 일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회담 전날까지 강조했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CVID) 방식의 북핵 폐기는 공동성명에서 빠졌다. 이혜정 교수의 말이다.
“비핵화의 진전과 남북관계 진전을 끊어놓은 게 판문점선언이다. 그동안은 이 두 가지가 묶여 있었다. 이 때문에 비핵화에 진전이 없으면 평화도 남북·북-미 관계도 진전될 수 없었다. 비핵화란 커다란 바윗돌이 입구를 막고 있었다는 얘기다. 지금은 길이 3개나 만들어졌다. 비핵화의 길, 한반도 평화의 길, 적대관계를 청산한 새로운 남북·북-미 관계의 길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전쟁하는 것보다 한국에서 하는 게 낫다’는 극언을 했던 린지 그레이엄 공화당 상원의원도 ‘북한이 비핵화를 하기 위해 숨 쉴 공간을 줘야 한다’며 한-미 연합훈련 중단에 찬성하고 나섰다. ‘비핵화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게다.
6·12 북-미 공동성명은 4개항의 합의 내용보다 전문 격인 앞부분이 더 중요하다. 북-미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한반도 평화가 더욱 공고해지고, 북-미 사이에 신뢰가 생겨야 비핵화에도 진전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신뢰가 생겨야 검증이 가능하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 핵심을 담고 있다. 비핵화를 위해 신뢰가 있어야 하는데, 신뢰는 전쟁이 끝나야 만들어진다는 논리다. 이 논리적 구조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6·12 정상회담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릴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미 주류도 결국 거부 못할 것</font></font>트럼프 행정부 이전과 이후의 북핵 문제는 차원이 달라졌다. ‘전략적 인내’란 이름의 대북 무대책으로 일관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 8년 동안, 북한의 핵능력 ‘질량적 증대’는 기하급수적으로 이뤄졌다. 북한은 지난해 11월29일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할 정도로, 실제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트럼프 대통령 편에선 ‘명백하고 현존하는’ 현재적 위협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구갑우 교수의 말이다.
“미국 내에서 대북 협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더라도 트럼프 대통령은 할 말이 있다. ‘지금까지 당신들은 대체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당장 미국 본토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든 위기를 해결하는 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6·12 북-미 공동성명은 한반도 평화를 가장 큰 목표로 두고, 북한의 체제 안전 보장과 완전한 비핵화를 교환하는 방식이 기본 틀이다.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그간 북쪽이 얘기한 ‘단계적 동시적 해법’에 미국이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딜레마는 일상적인 국가 대 국가 차원의 안보 딜레마와는 성격이 다르다. 북한의 핵무기와 한-미 동맹을 단순 등치시키면 그 둘이 경쟁을 하면서 위기를 증폭한다. 또 남과 북은 분단국가로서 양쪽 다 상대방의 영토를 미래의 자기 영토로 간주하는 통일 담론을 갖고 있다. 안보 딜레마가 심화해 전쟁 위기까지 가면, 한쪽이 다른 쪽을 흡수하려는 욕망이 표출되는 대단히 위험한 형태다. 지난해 4월과 8월 그 극단을 경험했다. 미국이 ‘쌍중단’(핵·미사일 시험과 연합군사훈련 동시 중단)을 수용한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국 주류도 결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수용한 이 협상 틀을 끝까지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 본토 위협이 가시화한 상황에서 이를 거부하면 전쟁 외에 다른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으로선 ‘기대 이상’의 소득도 있었다. 직접 언급하기 껄끄러웠을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과 중국의 종전선언·평화협정 체결 참여를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언급했기 때문이다. 연합훈련 중단을 정부가 먼저 꺼내들었다면 ‘동맹을 깨려 한다’는 안팎의 비난이 쏟아졌을 게다. 또 판문점선언 제3조 3항에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주체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회담 개최’를 언급한 터라, 중국의 참여 문제를 쉽게 꺼내들기 곤혹스러운 측면도 있었다. 정부로선 운신의 폭이 넓어진 셈이다. 이혜정 교수와 구갑우 교수의 이구동성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운신의 폭 넓어진 한국 정부</font></font>“중국·북한이 강조해온 ‘쌍중단’ 체제가 완성됐다. 자칫 정세를 긴장 국면으로 몰아갈 수 있는 8월 을지프리덤가디언 훈련은 중단 가능성이 커졌다. 문재인 대통령의 가을 방북 정상회담도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남북 정상회담을 징검다리로 삼았던 북-미 정상회담은 끝났다. 후속 회담이 열리겠지만, 이제 공은 다시 한국 쪽으로 넘어왔다.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을 어디까지 이완할 것인지, 어디까지 군축을 진행할 것인지 등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겨야 한다. 판문점선언을 적극적으로 이행해야, 북-미 공동성명의 이행도 가능해진다. 북-미 공동성명에서 판문점선언을 직접 언급하면서, 그만큼 우리 정부의 자율성이 커졌다. 남북관계를 더욱 끌어올려 한반도 냉전 해체 프로젝트를 적극 이끌어나가야 한다.”
<font color="#008ABD">대담 </font>이혜정 중앙대학교 교수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font color="#008ABD">정리 </font>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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