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0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이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두 가지에 집중하고 있다. 대외적으론 정상외교, 대내적으로 철저한 민생 행보다. ‘핵-경제 병진노선’에서 ‘경제건설 최우선’으로 옮겨가기로 한 당 중앙위의 결정을 몸으로 웅변하는 셈이다.
두 달 반 남짓한 기간 김 위원장은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4월27일, 5월26일)과 방중 북-중 정상회담(5월8일, 6월20일)을 했고, 싱가포르로 날아가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6월12일)도 치러냈다. 그 사이사이 강원도 동해안 고암~답촌 철길(5월25일)과 원산 갈마 해안관광 지구(5월26일), 평양 대동강 수산물 식당(6월9일) 현지지도에도 나섰다. 6월30일~7월2일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평안북도 일대를 돌아봤다. 정상외교를 통해 안보를, 민생 행보를 통해 경제를 챙기는 모양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6월30일 평북 신도군 방문 때 함께 들렀던 인민군 1524부대 현지지도 관련 북쪽 매체의 보도 내용이다. 김 위원장은 군부대를 둘러보며 철통 같은 방위태세나 전력 강화 같은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콩 농사와 다수확 우량 품종 농작물과 남새(채소) 재배, 메탄가스를 활용한 땔감 문제 해결과 군인들의 식생활 보장 등을 강조했다. 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사실상 북한군이 군사적 단위가 아닌 경제적 단위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전투만 하는 군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근로병사라고 할까? 쿠바가 대표적 사례일 텐데, 사회주의 국가가 체제 전환 또는 개혁·개방을 시도할 때 경제적 단위로서 군의 중요성이 커진다. 김 위원장의 인민군 부대 현지지도 보도에서도 이런 현실이 잘 드러났다. 북한 입장에서 군축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 사례다.”
군사 아닌 경제가 된 북한군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7월6일 평양으로 향하면서, 6·12 북-미 정상회담 합의 내용 이행을 위한 후속 협상도 본궤도에 올랐다.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 3월 말 중앙정보국장 자격으로 방북한 이후 석 달여 만에 벌써 세 번째 평양을 찾았다. 당일치기였던 앞선 두 차례와 달리 이번엔 평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취재진도 6명 동행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합의한 것처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최종적이고 완전하며 검증 가능한 비핵화’(FFVD)를 위한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며 “이번 방북을 통해 두 지도자가 국제사회 앞에서 약속한 원칙에 구체성을 더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동력을 지속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혜정 중앙대학교 교수의 말이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이틀 뒤인 지난 6월14일 백악관은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외교력을 복원했다’는 내용을 뼈대로 모두 5개항으로 이뤄진 보도자료를 내놨다. ‘북-미 협상을 통해 긍정적 변화를 위한 동력을 마련했다’는 내용이 첫손에 꼽혔다. 전쟁의 위협을 줄이고, 냉전 해체에 이어 이란 핵협정 탈퇴와 이슬람국가(ISIS) 격퇴, 시리아 정부군 화학무기 사용에 대한 강경 대응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것 등이 나열됐다. 모두 워싱턴 주류 정치권과 언론·연구단체가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이다. 성과다운 성과는 북-미 협상뿐이다.
결국 폼페이오 장관은 이번 방북을 통해 이른바 ‘트럼프 방식’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내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새로운 북-미 관계, 한반도 평화체제를 통한 신뢰 구축, 이를 바탕으로 실제 비핵화를 어떻게 진척시킬 것인지에 대한 방안이 나와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북-미 협상을 ‘정치적 성과’로 못 박았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를 물릴 수 있을까? 정치적 투자가 너무 많이 된 상태다. ‘매몰비용’을 생각한다면 그대로 갈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간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 방식으로 제시했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란 표현도 슬며시 바뀌었다. 이와 관련해 폼페이오 장관과 함께 방북길에 오른 헤더 나워트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의 대북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합의한 북한의 비핵화에 전념하고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구갑우 교수의 말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관련해 미국에서 새로운 용어와 개념의 ‘발명’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점이 흥미롭다. 이번엔 ‘최종적이고 완전하며 검증 가능한 비핵화’(FFVD)란 용어가 등장했다. 그간 북한이 반발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돌이킬 수 없는’(I)이란 조건이 빠진 게다. 미국 국내 정치와 맞물린 비핵화의 ‘정치적 시간표’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CVID에서 FFVD로 바뀌어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외교적 업적’으로 포장하려면, 북한의 적극적 협력이 절대적이다. 이르면 11월 중간선거 전까지, 늦어도 재선에 도전해야 하는 2020년까지는 비핵화와 관련한 가시적 성과를 전세계에 보여줘야 한다. 비핵화는 ‘신고-사찰-검증-폐기’ 등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북한이 협력하지 않으면 트럼프 대통령이 원하는 시간표에 맞출 수 없다. 비핵화는 체제 안전 보장과 ‘단계적, 동시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미국이 시간표에 맞추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북한도 이에 맞춰 핵폐기 절차를 빠르게 밟아갈 가능성이 크다. 북-미 간 연락사무소 개설 문제가 미국 내에서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실제 제1차 북핵 위기를 무마시킨 1994년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 체결 직후, 북·미는 외교관계 수립을 전제로 평양과 워싱턴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당시 미국 쪽 협상팀을 이끌었던 린 터크 태평양세기연구소(PCI) 이사는 지난 6월29일 미국의 한반도 전문 매체 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1994년 9월부터 1995년 중반까지 평양과 워싱턴을 오가며 모두 5차례 대면협상을 진행했다. 그사이에 팩스와 전화를 이용해 양쪽 협상팀이 수시로 직접 소통을 이어갔다. 협상은 ‘외교관계에 관한 제네바 협정’ 제14조에 근거해 진행됐다. … 초기엔 양쪽 연락사무소에 각각 7명씩 주재하고, 앞으로 관계가 발전하면 점차 서로 늘려나가는 것으로 합의했다. 궁극적으로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는 것을 목표로 했다.”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 논의도 주목협상이 구체화하면서 북한 협상팀이 워싱턴과 버지니아주 등지에서 연락사무소와 주재원 숙소 등을 알아보기도 했다. 미국 협상팀은 평양의 독일대사관 일부 공간을 임차해 쓰기로 하고, 독일 정부에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단다. 미 국무부는 연락사무소 대표로 한국 근무 경험이 있는 스펜스 리처드슨을 내정하는 한편, 국무부 내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 중 연락사무소 근무 지원자를 신청받기도 했다. 당시 북-미는 양국 외교장관의 서한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연락사무소 개설 절차를 시작하는 것까지 의견을 모았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터크 이사의 말이다.
“1995년 여름 북한이 서한 교환을 무기 연기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그해 말엔 별도로 알릴 때까지 서한 교환을 취소한다고 통보해왔다. 북한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협상이 한창이던) 1994년 12월 미 육군 헬기가 비무장지대를 잘못 넘어갔다가 격추된 일이 있었다. 이 사고로 미군 조종사 1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미국 쪽은 당시 협상 채널이던 외무성 쪽을 통해 사망자 주검과 부상자 신병 인도를 요청했다. 비무장지대를 관할하던 북한 군부가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추측이지만 북한 군부 쪽에서 판문점과 뉴욕 주재 유엔대표부 등을 통해 이미 연락사무소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주장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평양에 미국 연락사무소를 추가 개설한다고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1995년 북·미가 상대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했다면 이후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 수 없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은 상호 신뢰에 바탕한 ‘새로운 북-미 관계’를 약속했다. 상호 연락사무소 개설이 그 시작일 것이다. 터크 이사의 경험담에 눈길이 가는 이유다. 이혜정 교수의 말이다.
“지금까지 북핵 협상은 안보와 경제를 맞바꾸는 방식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안보와 안보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신뢰를 바탕으로 전쟁 상태를 끝내고, 냉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고 북-미 관계를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갔을 때 비로소 비핵화가 가능하다. 거기까지 나아가려면 때로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정이다. 북-미 관계가 삐걱거릴 수도 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돌아설 수도 있다. 한반도 정세의 ‘역진’을 막기 위해서라도, 남북이 나서 ‘평화의 방어벽’을 세워야 한다.
이른바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핵과 재래식 무기로 나눌 수 있다. 핵 위협은 북-미 간에 ‘트럼프 방식’으로 해법을 마련했다. 재래식 무기 위협은 남북 간 군축 협상으로 줄여야 한다. 다시 군사적 긴장 상태로 갈 수는 없다. 핵 위협도 단계적 동시적으로 해결해나가기로 했다. 재래식 무기 위협도 같은 방식을 따라야 한다. 정세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북핵 위기의 정점에서 마련했던 이른바 ‘3축’(북한의 도발 징후를 사전에 포착해 제거하는 ‘킬 체인’, 한국형 미사일방어체계(KAMD), 한국형 대량응징보복체계(KMPR) 등을 묶은 한국군의 독자적 북핵 억지능력) 도입을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2차 북-미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지난 4월27일 남과 북의 두 정상이 고무줄놀이하듯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나들었던 그 순간, 전쟁은 이미 끝났다. 현실 변화 가능성은 상상력의 크기와 정비례한다. 담대한 상상이 필요한 때다. 65년간 이어져온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 프로젝트도 거기서 시작된다. 미국 인터넷 매체 를 비롯해 미국 일각에선 9월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총회에 맞춰 제2차 북-미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을 거론하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이혜정 교수와 구갑우 교수의 이구동성이다.
“뉴욕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이 유엔 총회장에서 전세계를 향해 평화와 비핵화 의지를 밝히는 연설 장면을 떠올려보자. 이어 백악관을 방문한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 두 번째 정상회담을 하고,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3자가 한국전쟁 종전선언을 할 수도 있다.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고 평화와 번영의 미래로 가는 문이 열리는, 한반도 냉전체제 해체의 9월을 상상해보자.”
대담 이혜정 중앙대학교 교수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정리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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