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8월13일 서울고등법원이 ‘하미 학살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할 의무가 없다’고 판결하자,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이 화상으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임재성 제공
누군가 ‘변호사 직업의 적성’ 같은 걸 물어보면 ‘승패의 긴장감을 즐길 줄 아는 성정’이라 말한다. 그만큼 ‘이기고 지고’의 반복이 변호사의 일상이고, 연차가 늘어갈수록 동요의 폭도 줄어든다. 그런데 그날은 선고를 듣기 위해 방청석에 앉아 재판부를 기다리는데,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떨렸다. 2025년 8월13일,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하미 학살 항소심 판결 선고가 있는 날이었다. 예감이란 게 있었을까.
“원고들의 항소를 모두 기각한다. 소송비용은 원고들이 모두 부담한다.”
두 줄의 판결 주문 낭독이 끝나고 방청석을 메웠던 이들은 기자회견을 위해 이동했다. 기자들도 법정에서 함께 결론을 확인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변호사에게 패소 확인을 요청했다. “네, 피해자가 졌습니다.” 이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나는 피해자 대리인으로 첫 번째 발언을 했다.
“오늘 서울고등법원은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라도 피해자가 외국인이면, 불법행위 발생지가 외국이면 국가의 조사 의무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피해자 국적, 불법행위 지역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진실을 규명하는 일에 왜 이것들이 차별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입니까? 오늘은 대한민국이 민주화 이후 이루어낸 빛나는 과거사 청산의 역사가 자국민에 한정된 반쪽짜리라는 것이 확인된 날입니다.” 화는 당사자가 내고 대리인은 상황과 쟁점을 설명하는 것이라 배웠지만, 배운 것과 달리 대리인인 내가 화를 쏟아내버렸다.
베트남전쟁 시기인 1968년 2월24일, 하미마을에서 파월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 130여 명이 살해됐다. 시체 더미 속 살아남은 하미 학살 피해자들이 시간과 고통을 견디고 2022년 가해국 대한민국에 진실규명을 요청했다. 그런데 가해국의 답변은 ‘거부’였고, 서울고등법원마저 가해국의 ‘외면이 정당하다’고 판결한 것이다.
기자회견은 승소와 패소의 경우를 모두 대비해 각각의 입장문을 준비한다. 피해자이자 이 소송의 원고인 하미마을 응우옌티탄도 ‘이겼을 때’와 ‘졌을 때’의 소감 초안을 각각 준비해뒀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영상으로 연결된 그는 준비한 내용을 전혀 읽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후 체념 가득한 목소리로 “재판부가 우리 피해자의 일에 너무도 무감하다고 생각한다. 재판 결과에 깊은 실망과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무감’, 베트남어로 ‘vô cảm’(보깜)이라는 단어를 거듭 강조했다. ‘감정이 없는 판결’이라는 비판이었다.
대한민국은 2000년대부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등 독립적인 국가기구를 통해 과거 발생한 국가폭력 문제의 진실을 규명해왔다. 하미 학살 피해자들은 이 진실화해위에 본인들의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 범위 중 하나로 하는 기구였기에, 비슷한 성격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는 2023년 5월 각하 결정을 한다. 피해자가 외국 국적자라는 이유였다. 진실화해위 역사상 내세운 적 없는 논리였다.
피해자와 변호사들은 법원이 진실화해위의 각하 결정을 위법하다고 판단해줄 것으로 믿었다. 법 어디에도 피해자를 구분하는 내용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1심이던 서울행정법원은 진실화해위가 옳다고 판단했다. 서울고등법원까지 같은 판단을 했다.
판결문 전체를 확인하며 눈을 의심했다. “하미 사건이 대한민국 군인들에 의하여 발생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으로서 안타까운 일임은 부정할 수 없다.” 상상도 못한 문장이었다. 대법원 바로 아래인 서울고등법원이 하미 학살에 대해 ‘대한민국 공권력에 의해 발생한 학살’이라고 인정한 것이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사법부가 인정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사건은 ‘퐁니 학살’ 한 건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 1·2심에서 퐁니 학살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고 현재 피고인 대한민국이 상고해 대법원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서울중앙지방법원보다 심급이 높은 서울고등법원에서 두 번째 학살을 인정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라는 감정과 ‘부정할 수 없다’는 강조까지 더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재판부는 “위 사건의 진실규명과 권리구제를 위한 국가 차원의 조사 필요성도 상당한 정도로 소명된다”고 판결문에 기재했다. 사법부가 제출된 증거를 두고 학살 유무를 판단하는 수동적 위치를 넘어서서 국가 차원의 조사 필요성까지 언급한 것이다. 이 내용만 놓고 본다면, 지금까지 이뤄진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관련 대한민국의 공식 판단 중 가장 진전된 내용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정도다. ‘감정 없는 판결’이 아니라 ‘반성문’이었다.
그러나 반성문은 비겁했다. 학살을 인정하고 조사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지금 제도하에서는 조사할 수 없다’고 결론 냈다. 그 근거로 든 것이 ①진실화해위 관련법의 목적 조항에는 ‘민족의 정통성 확립’과 ‘대한민국 국민의 통합’이라는 문구가 있고, ②입법자들이 법 제정 당시에 피해자가 외국인인 경우를 예정했다고 볼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입법자들의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실증 자료는 제시되지 않았다.
피해자가 외국인인 사건을 조사하면 민족의 정통성이 무너지나? 온전한 법적 논증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결론에 내용을 억지로 맞추면서 무리한 결론을 내려다보니 피해자에게 미안한 마음이 판결문에 반영돼 ‘반성’의 내용을 어색하게 담은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지독하게 비겁한 판결문은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참전자 단체들은 ‘게릴라전의 특수성’을 주장하지만, 그 내용 대부분은 법적으로 학살을 인정한 것과 다름없다. 진실규명 자체의 당위성을 부인하는 이는 드물고, 피해자들에게 안타까움도 표명한다. 그런데 정작 ‘가해의 책임을 언제 질 것이냐’에 대해서는 온갖 회피와 외면이 등장한다. 비겁한 사회가 비겁한 반성문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피해자들과 한국의 사회운동은 서울고등법원이 쓴 ‘반성문’을 가지고 한 발 더 나아가보려 한다. ‘국가 차원의 조사 필요성 인정’을 들고 국회와 이후 설립될 3기 진실화해위를 두드릴 것이다. 비겁함이 염치로 바뀔 순간이 그렇게 멀진 않았다고 믿는다.
임재성 변호사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가해국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최초의 소송에서 피해자를 대리하며 마주한 순간들, 그 법정 안팎의 이야기를 ‘열두 번의 날짜’를 통해 소개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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