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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대한민국이 ‘아뿔싸’ 서둘러 지운 문건은…

국방부, 1999년 학살 보도한 언론사 회유·협박 문건…‘노근리 조사 방해’ 등 적나라한 인식 드러내
등록 2025-11-03 09:20 수정 2025-11-06 07:15
2022년 8월11일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오른쪽)과 응우옌득쩌이(왼쪽)가 참전군인 류진성씨 등과 만나 학살 피해를 증언하고 있다. 응우옌티탄은 8월9일 한국 법정에서 피해자 최초로 증언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2022년 8월11일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오른쪽)과 응우옌득쩌이(왼쪽)가 참전군인 류진성씨 등과 만나 학살 피해를 증언하고 있다. 응우옌티탄은 8월9일 한국 법정에서 피해자 최초로 증언했다. 한베평화재단 제공


피고 대한민국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제기한 소송으로 인해 법정에서 설 수밖에 없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실수를 했다. 속내를 들켰다. 이번 화의 ‘날짜’는 피고 대한민국이 증거로 제출했다가 철회한 국방부 문건이 작성된 1999년 11월15일이다.

증거 제출했다가 급히 철회한 대한민국

“증거 제출을 철회합니다. 전자소송시스템 삭제도 간청합니다.” 베트남 퐁니마을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이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의 첫 번째 변론기일은 2020년 10월12일이다. 이날을 앞두고 피고 대한민국은 정신이 없었다. 한국 정부는 변론기일 나흘 전에 첫 번째 준비서면과 증거를 제출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흘 뒤인 10월11일, 이를 철회한다는 서면을 제출했다. 그리고 변론 당일 오전 9시55분에 일부 수정된 준비서면만을 제출했다. 1차 변론기일이 열리기 불과 35분 전이었다.

현재 대법원이 운용 중인 전자소송시스템은 소송당사자가 문서를 등록하면 삭제할 수 없다. 안정성을 위해 수정할 사항이 있으면 다시 제출하고, 예전 자료는 그대로 쌓이는 방식이다. 그런데 피고 대한민국은 첫 번째 제출한 준비서면과 증거를 전자소송시스템에서 삭제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삭제했다. 법원에 제출한 준비서면과 증거가 소송에서 증발해버린 것이다. 당시 필자를 포함한 원고 쪽 변호사들이 이 모습을 보며 ‘국방부가 재판부에 얼마나 전화를 했으면 이렇게 사라질 수 있느냐’고 했을 만큼 이례적인 일이었다. 통상의 소송당사자라면 상상도 할 수 없다.

피고 대한민국은 왜 이토록 필사적이었나? 제출을 철회한 증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던, 총 11쪽인 ‘월남전 양민피해 관련 대책’이라는 문건(이하 문건)이었다. 작성 주체는 국방부다. 전자소송시스템에서 삭제됐지만 피해자 쪽 변호사들은 1차 제출 이후 삭제 전 피고 대한민국의 증거를 모두 내려받아뒀고 그 내용을 다행히도(피고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해당 문건에 작성일이 적혀 있지는 않다. 하지만 국방부가 1999년 11월15일까지 실행한 일이 적혀 있고 국방부 장관의 결재가 11월16일 이뤄진 것으로 확인되기에, 1999년 11월15일 생산된 문건으로 볼 수 있다. 당시는 한겨레21 보도로 1999년 5월 시작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첨예한 쟁점으로 증폭되던 때였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이 시기 학살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이 문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피고 대한민국이 증거로 제출했다가 서둘러 철회하고 전자소송시스템에서 삭제한 국방부의 ‘월남전 양민 피해 관련 대책’ 문건 갈무리.

피고 대한민국이 증거로 제출했다가 서둘러 철회하고 전자소송시스템에서 삭제한 국방부의 ‘월남전 양민 피해 관련 대책’ 문건 갈무리.


당시 국방부의 핵심적 대책은 언론사 회유였다. 문건 기재 내용이다. “11.11~15일 국방부 관계자 언론사 방문: 균형보도/보도자제 요청” “MBC 균형보도, 한겨레 신중보도 약속, 월간조선 未보도” “한겨레 방문, 편집국장 및 정치부장 설득/이해” “한겨레사에 국익고려 편파보도 및 성금활동 캠페인 자제토록 설득”

연인원 30만 명이 넘는 한국군이 파병 8년 동안 작전을 했던 베트남전쟁에서 학살당했다는 민간인 피해자들의 호소가 30여 년 만에 이윽고 한국 땅에 도착했을 때, 대한민국 국방부가 꺼낸 대책이라는 것이 고작 언론 통제였다. 국방부는 국내 언론뿐만 아니라 외국 언론도 신경 썼다. “로이터 통신 관심 표명으로 국제적 확산 우려”

문건 내용 중 상당 부분은 국방부가 언론사 접촉 과정에서 해당 언론사에 문서 또는 구두로 전달할 내용으로 추정되는데, 협박에 가까운 표현도 담겼다. “언론보도 지속시 예상되는 문제점” “‘노근리 사건’과 달리 베트남 사건에 대한 참전자 증언 미확보시 언론사의 신뢰성 하락 우려” “언론사에 대한 ‘명예훼손’ 이유로 소송 제기 가능” “시위 등 집단행동도 예상 가능” “동 문제가 더 확산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함”

민간인 학살, 자국민 피해만 중요한가

이 문제가 ‘확산되면 안 되는 이유’로 문건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되는 것은 ‘노근리’다. 1999년 한국 사회에서는 두 가지 학살 문제가 동시에 공론화됐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그중에서도 노근리 다리에서 미군에 의해 벌어진 학살과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었다. 같은 시기에 이슈화가 되었기에 당시 베트남 학살에 대한 진실 규명 운동의 구호 중 하나는 “베트남에도 노근리가 있다”였다.

미국과 노근리 문제를 협상하는 과정에서 ‘한국’은 피해자였다.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에서는 가해자였다. 문건 속 ‘한국’의 국방부는 가해자 자리를 부인하기 위해 피해자의 위치를 강조했다. “노근리 문제 등 한·미 간 해결해야 할 사안이 산적한 시점에 우리 정부의 대미 협상 입지 약화” “현재로서는 노근리에 대한 성숙한 접근이 필요한 때”

이 얼마나 노골적이고 부끄러운 내용인가. 미국에 노근리 학살 문제의 진상조사를 요구하면서, 정작 자국의 책임을 묻는 베트남 피해자들 목소리를 담은 보도가 중단돼야 한다며 드는 이유가 ‘협상력 약화’였다. 베트남 학살이 공론화하면 노근리 문제 관련 대미 협상력이 약화된다는 주장 자체도 근거가 없지만, 이런 논리가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으로 채택됐다는 것이 절망스럽다. 베트남은 노근리에 방해가 된다는 것 아닌가. 정의는 피해자일 때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국방부의 의도대로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는 2000년 초반 이후 ‘확산’되지 못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퐁니 학살 국가배상소송이 제기된 2020년 전후로 다시 확산된다. 첫 번째 확산을 막기 위해 작성한 문건. 이 문서가 20여 년 만의 두 번째 확산 국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징후적이다.

두 가지 평가가 가능하다. 성공한 듯 보였던 진실 은폐가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 하나의 평가다. 다른 하나는 피고 대한민국이 비록 뒤늦게 철회하긴 했지만, 처음엔 그 문건을 ‘활용할 만한 증거’로 판단했을 만큼 문건에 기재된 내용의 심각성을 여전히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문건 첫 장에 조성태 당시 국방부 장관이 직접 기재한 것으로 보이는 메모가 있다. “양국 간 협력의 장애 요소로 작용할 것임” 현재 한국 사회의 인식은 25년 전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의 메모에서 얼마나 변했는가?

임재성 변호사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가해국 대한민국을 상대로 제기한 최초의 소송에서 피해자를 대리하며 마주한 순간들, 그 법정 안팎의 이야기를 ‘열두 번의 날짜’를 통해 소개합니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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