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인 노버트 위너와 클로드 섀넌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공지능(AI)의 원형을 구상했던 초기 이론가였다. 둘 다 정보라는 개념에 근거해서 피드백 시스템을 구상했는데, 위너는 정보를 훨씬 의미론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정확한 의미 전달 메커니즘의 안정을 추구했다. 섀넌은 정보를 기본적으로 소음의 간섭을 받는 불확실한 메시지로 보고 이 불확실성의 정도를 엔트로피 단위의 정보량으로 이해했다. 섀넌의 이론으로 보면 불확실한 정보일수록 정보량이 많은 셈이다. 아날로그적인 것이 위너의 이론이고 디지털적인 것이 섀넌의 이론이라 볼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인공두뇌학)가 훨씬 철학적인 추상화한 개념이고, 섀넌의 정보이론은 공학적인 설계다. 위너가 사이버네틱스라는 용어를 대중화시켰다면 섀넌은 정보이론을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개념과 결합했다. 정보이론이나 커뮤니케이션 같은 용어는 학술적인 용어가 됐지만, 위너가 제안한 사이버네틱스는 이제 과학소설(SF)이나 일본 애니메이션 정도에서 흔적이나마 찾을 수 있게 됐다. 이런 극적인 대비가 일어난 까닭은 앞서 언급했듯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과학정책에 부정적이었던 위너의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
20세기 들어 본격화한 인공지능 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미국이 이 분야에서 다른 국가를 제치고 앞서 나갈 수 있었던 요인도 바로 전쟁과 그 이후 이어진 냉전이었다. 전쟁이라는 비상사태는 필연적으로 정부의 힘을 강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미국처럼 기업과 은행의 힘이 정치를 압도했던 국가에서 전쟁은 정치가 경제를 장악할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명분은 과학자들에게 전례 없는 특혜를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전폭적인 재정 지원이 이뤄졌다. 인공지능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물적 토대가 갖춰진 것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인공지능과 관련해서 획기적인 연구 결과가 많이 나온 까닭이다. 각자의 연구실에 고립돼 있던 과학자들이 집중적으로 협업할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지체됐던 연구가 급진전하게 된 이유일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전쟁이라는 비극의 상황은 과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이룩할 수 있었던 부흥의 시기였다.
그렇다면 전쟁이 끝난 뒤에 어땠을까.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당장 재정 지원이 끊기진 않았는데, 그 이유는 전후 자본주의 재건과 반공주의 전선을 강화하기 위한 미국의 외교 정책 때문이었다. 전쟁 중에 위너나 프랭크 로젠블랫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의 연구를 지원한 단체는 록펠러재단이나 포드재단 같은 곳이었다. 특히 록펠러재단은 전후에도 과학자들의 연구를 지속적으로 지원했고, 그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책임자의 자리에 섀넌과 함께 ‘섀넌-위버 모델’을 창안한 워런 위버를 앉혔다. 위버는 수학자이면서 뛰어난 행정력을 발휘했는데, 이런 능력은 과학 분야에 한정해서 두드러졌던 것은 아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위버는 냉전 시기 미국의 과학 정책을 결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공지능의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배경이 바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미국의 기술관료주의와 실용주의로 세계를 통일하려 했던 “위대한 미국의 임무”가 있었다. 위버와 같은 과학자들은 전쟁의 위험 요소인 파시즘과 공산주의 같은 위험 요소를 박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반공주의 노선과 과학 정책을 결합한 미국의 대외 전략에 충실하게 복무했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에게도 한때 유행했던 “문송합니다”의 기원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기술관료주의와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고등교육제도를 재편했던 미국의 전략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위버와 같은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은 공공연하게 비과학적인 인문학이 정치 과잉을 선동한다고 간주하고, 과학적인 방법을 인문학에 적용해 이데올로기적 경향성을 통제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정책 시행의 결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이른바 ‘학제 간 연구’였다. 표면상 이 정책은 다양한 학문 분야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제거한 기술관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 목적에 부합하는 탈정치적인 학문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등장한 이런 정책 입안의 논리를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대학 정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우리 고등교육의 기원과 별개로 취급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셈이다.
1949년에 섀넌과 위버는 자신의 모델을 이론화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수학 이론’이라는 책을 집필했고, 이 책은 위너의 ‘사이버네틱스’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인공지능의 원리를 수학적으로 설명한 결과물이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즐겨 언급하는 인공지능은 언어적 의미망을 기계화하는 상징 모델이 아니라 인간의 뉴런 작동을 모방하는 신경망 연결 모델이다. 이 모델은 연구비 수주를 두고 경쟁했던 다른 연구 집단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럼에도 오늘날 인공지능과 관련한 담론의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많은 개념과 용어를 만들어 이론적 논의의 토대를 제공한 위너나 섀넌을 무시할 수 없다. 둘의 이론은 비단 인공지능 분야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그 ‘커뮤니케이션학’이나 ‘미디어학’이 바로 섀넌의 정보이론에 대한 대응으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미디어 이론의 선구자로 불리는 마셜 매클루언은 직접적으로 정보이론을 언급하면서 섀넌의 이론은 커뮤니케이션 이론이 아니라 정보 전달에 대한 것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매클루언의 입장에서 커뮤니케이션은 그 과정에 참가하는 당사자들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 커뮤니케이션 과정은 단순하게 기계적 회로의 작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섀넌-위버’ 모델이나 정보이론은 이런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 매클루언의 요지였다. 매클루언의 미디어 이론과 마찬가지로 섀넌의 정보이론에 대한 수용과 비판으로 등장한 이론이 바로 문학과 문화 분야에서 익숙하게 들어봤을 구조주의다. 이 대목은 좀더 긴 설명이 필요하다.
구조주의의 창시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뉴욕에 간다. 거기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소련에서 망명한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을 만났다. 이 만남은 현대 인문학의 전환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의 시작이었다. 뉴욕에 안착하긴 했지만 레비스트로스에게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당시 연방수사국(FBI)에 속해 있던 중앙정보국(CIA) 설립자 존 에드거 후버는 비밀 메모를 통해 레비스트로스가 유대인국제공산주의 단체에 가담했기에 위험인물이라고 록펠러재단에 보고했지만, 레비스트로스의 뉴욕 입성을 막진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FBI의 감시 대상이었던 레비스트로스가 뉴욕에서 살게 된 곳은 바로 섀넌의 아파트 아래층이었다. 후일 레비스트로스는 당시 상황을 감상에 젖어 회고하면서,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섀넌은 사이버네틱스를 창안하고, 나는 ‘친족의 기본 구조’를 집필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섀넌의 정보이론과 같은 공간에서 태어났다. 이후 레비스트로스는 프랑스 파리로 돌아간 뒤 야콥슨이 보내 준 섀넌과 위버의 책을 읽고 신화 분석 방법론을 그 책에서 배웠다고 편지에서 밝혔다. 1950년대부터 인문학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는 구조주의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런 전환은 오늘날의 인공지능과 역사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 물론 매클루언처럼 레비스트로스 역시 섀넌의 정보이론을 그대로 수용해 단순하게 자신의 신화 연구에 응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정보와 반복을 기계적으로 파악해서 커뮤니케이션을 단순화한다며 매클루언과 비슷한 관점에서 섀넌의 정보이론을 비판했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그 난해한 ‘구조’라는 용어다.
이 ‘구조’라는 용어는 레비스트로스가 섀넌의 코드 개념을 적용해 창안한 것이지만, 커뮤니케이션을 양적으로 계산할 수 없는 질적 과정이라고 봤다는 점에서 다른 개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질적 과정인 구조의 코드를 이해하기 위해 “질적 차원의 수학”이 필요하고, 이런 수학이 인간적인 수학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레비스트로스의 관점은 이후 등장한 많은 이론가를 통해 반박되거나 재구성됐고, 이를 인문학은 ‘탈구조주의’ 또는 ‘후기 구조주의’라고 명명한다. 요즘은 누구도 구조주의를 심각하게 연구하지 않지만, 다시 도래한 인공지능의 부흥을 보면서 구조주의의 문제의식을 되새겨보는 것도 무용한 일은 아닐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상은 ‘사이버네틱스’의 저자 위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너에게 사이버네틱스는 위기에 처한 인류 문명을 재정립하기 위해 라이프니츠 이후에 분과 학문으로 전락해버린 철학과 수학을 다시 결합해 통합 학문을 복원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파시즘과 전쟁의 발발 원인을 유럽 형이상학의 위기에서 찾으면서 새로운 철학을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의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전쟁 이후 다보스 포럼을 주도했던 칼 포퍼 역시 비슷한 문제의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로 입장은 달랐지만,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초래한 파국의 상황, 특히 아우슈비츠와 원자폭탄에서 확인한 전쟁의 비인간성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오늘날 우리가 인공지능을 논의할 때, 이런 과거의 유산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는 이런 의미에서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보다도 훨씬 복잡한 내력을 숨기고 있다.
이택광 문화비평가·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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