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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국적 AI 시대, 이상하게 ‘국가’ 강조하네

‘인공지능 주권’ ‘데이터 주체 국민’ 중시…미 일극 체제 넘어설까
등록 2024-11-29 17:53 수정 2024-12-05 18:09
네이버가 2023년 추가로 개소한 데이터센터 ‘각 세종’의 모습. 네이버 제공

네이버가 2023년 추가로 개소한 데이터센터 ‘각 세종’의 모습. 네이버 제공


얼마 전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인공지능(AI) 관련 포럼에 참석했다. 인공지능과 관련한 다양한 주제가 논의됐는데, 그중 싱가포르에서 온 한 패널이 발표한 “소버린(주권) AI”가 청중의 관심을 많이 끌었다. 소버린 AI는 국가나 정부가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통제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의미한다. 이는 국가의 디지털 주권과 기술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서, 국외 기업이나 타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의 AI 기술력을 확보하자는 입장이다.

‘인공지능 주권’이라는 정치적 담론

소버린 AI의 개발은 여러 가지 중요한 동기에서 비롯된다. 가장 핵심적인 것은 데이터 주권과 국가 안보의 보장이다. 자국민의 데이터를 보호하고 핵심 산업의 기술 독립성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한다. 이런 취지에서 다양한 소버린 AI에 대한 논의와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중국은 AI 기술 자립을 위해 대규모 투자와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유럽연합(EU)은 유럽 중심의 AI 생태계 구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한국 역시 국가 AI 전략을 통해 기술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싱가포르 패널의 발표도 이런 세계적인 추이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AI를 민족국가 단위 또는 경제권역 단위로 개발해야 한다는 생각은 AI와 관련해서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견제와 다극 체제의 수립에 대한 희망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과연 성공적일 수 있을지 논란은 분분하다. 간단히 말해서 소버린 AI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반영한 조어법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기술 개발자나 기업보다 정부 관계자가 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내가 보기에 “인공지능 주권”으로 번역할 수 있는 소버린 AI라는 용어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인 담론에 가깝다. 아마 AI 개발자의 입장에서 보면 중립적 보편성에 기반한 인공지능을 왜 국가 단위로 가두려고 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글에서 계속 강조했듯이, 인공지능은 근본적으로 노동의 사회성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회적인 산물이다. 마치 사회적인 차원이 없는 순수 자동화의 기계장치가 인공지능의 핵심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있지만, 사실은 그 자동화를 만들어내기 위한 일련의 과정은 과거보다 더 집중적이고 광범위하게 기존의 산업 인프라에 의존한다. 에너지 확보부터 데이터센터 설치, 그리고 안정적인 지피유(GPU·그래픽처리장치) 공급망까지 오히려 인공지능은 과거에 견줘 더 확고하게 정치경제학적인 문제가 됐다.

마빈 민스키의 촌철살인처럼, 인공지능은 인간이 하기 어려운 복잡한 일은 인간보다 더 잘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인간에게 별것 아닌 단순 작업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인공지능은 그 별것 아닌 단순 작업을 인간에게 계속 외주를 줘야 한다. 이것이 빅테크 기업의 실상이고, 이런 의미에서 평등한 글로벌라이제이션(세계화)으로 포장해온 현재의 위계적인 불평등 체제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과 그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테슬라 최고경영자 일론 머스크의 계산은 이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일극 체제 강화된 ‘AI 시대’

인공지능의 원리와 기술은 중립적이지만, 그 기술의 개발을 추동하는 조건은 중립적이지 않다. 인공지능 개발은 미국의 압도적인 지배를 통해 가능하고, 한편으로 인공지능 산업의 논리는 그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방식으로 발전한다. 이런 국제정치적인 상황에서 인공지능 개발을 둘러싼 문제는 사회적인 쟁점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소버린 AI를 주장하는 입장은 지금 체제를 미국 헤게모니의 약화에 따른 다극 체제 이행기라고 판단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판단에 회의적이다. 지금 체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로 강화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은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글로벌 자본주의의 지속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빅테크 기업이 잘 보여주듯이, 지금 현재 가속화하는 인공지능 개발은 금융과 기술의 결합을 더욱 강화하고 있고,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물적 토대는 무소불위의 군사력에 의존한 미국의 헤게모니다. 미국은 기술 우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GPU 생산량까지도 제어하고자 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버린 AI에 대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국제정치 질서를 인정하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현재 머신러닝의 표준이 된 ‘파운데이션 모델’(기반 기술) 자체를 전제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한다.

파운데이션 모델이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챗지피티(ChatGPT) 시리즈나 버트(BERT·구글에서 개발한 자연언어 처리 모델), 또는 클로드(Claude·앤트로픽에서 개발한 대형언어모델 제품군) 같은 인공지능 응용프로그램을 구축 가능하게 만드는 기본 방식이다. 이 모델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컴퓨터 자원을 필요로 한다. 주로 트랜스포머 아키텍처나 그와 유사한 딥러닝 접근 방식을 활용해서 수천억 개의 토큰을 포함할 수 있는 거대한 데이터셋을 통해 유지된다.

파운데이션ᅠ모델을ᅠ설명하는ᅠ가장ᅠ눈에 띄는 특징은ᅠ전이ᅠ학습ᅠ능력이다. 이전의 AI는 작업마다 새로 학습을 시켜야 했지만, 파운데이션 모델은 한 번 배운 내용을 다른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과거 모델과 달리 예제를 아예 보여주지 않거나 몇 개만 보여줘도 새로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처럼 추론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ᅠ유연성ᅠ덕분에ᅠ한ᅠ영역에서ᅠ학습한ᅠ지식을ᅠ다른ᅠ영역으로ᅠ효과적으로ᅠ전이할ᅠ수ᅠ있다.

데이터 주체인 ‘국민’에 눈 돌리다

파운데이션ᅠ모델은ᅠ오늘날ᅠ다양한ᅠ플랫폼과ᅠ응용프로그램에ᅠ쓰이고ᅠ있다. 앞서 예시로 든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달리(DALL-E·이미지ᅠ생성ᅠ인공지능)와ᅠ스테이블ᅠ디퓨전(Stable Diffusion·텍스트를ᅠ이미지로ᅠ변환하는ᅠ인공지능ᅠ모델) 같은ᅠ멀티모달(텍스트·이미지·음성ᅠ등ᅠ다양한ᅠ형태의ᅠ데이터를ᅠ인식·생성하는ᅠ것) 모델들은ᅠ텍스트와ᅠ이미지ᅠ처리의ᅠ통합을ᅠ가능하게 했다. 소프트웨어ᅠ개발에서는ᅠ코덱스(Codex·자연어를ᅠ코드로ᅠ변환하는ᅠ새로운ᅠ딥러닝ᅠ언어ᅠ모델)와ᅠ깃허브ᅠ코파일럿(GitHub Copilot·자동ᅠ코드ᅠ완성ᅠ인공지능) 같은ᅠ코드ᅠ모델들이ᅠ프로그래머들의ᅠ작업ᅠ방식을ᅠ텍스트ᅠ생성과ᅠ요약부터ᅠ언어ᅠ번역, 코드ᅠ완성, 이미지ᅠ생성, 질문ᅠ답변, 콘텐츠ᅠ분석에ᅠ이르기까지ᅠ고유한 인간의 능력으로 간주했던 작업을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편리하게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효능감은 인공지능의 발전 방향을 더 많은 데이터를 활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이제 데이터를 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소버린 AI에ᅠ대한ᅠ논의는 이처럼 파운데이션ᅠ모델의ᅠ등장에ᅠ따라ᅠ데이터의ᅠ자원화라는ᅠ새로운 문제가ᅠ제기됐기ᅠ때문에ᅠ관심을ᅠ받게 됐다. 생산ᅠ표준화에ᅠ도달한ᅠ하드웨어가ᅠ아니라ᅠ혁신을ᅠ도모할ᅠ수ᅠ있는ᅠ소프트웨어가ᅠ중요한ᅠ산업의ᅠ근간이ᅠ되면서ᅠ데이터는ᅠ이제ᅠ무에서ᅠ유를ᅠ창출하는ᅠ중요한ᅠ천연자원ᅠ취급을ᅠ받게ᅠ됐다. 당연히 미래 산업을 위해 모두 데이터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는데, 정작 그ᅠ데이터를ᅠ생산하는ᅠ당사자는ᅠ인공지능이ᅠ아니라ᅠ고전적인ᅠ민족국가를ᅠ구성하는 ‘국민’이다. 소버린 AI는 이렇게 기존에 정치적 주체로 규정했던 ‘국민’을 데이터의 주체로 다시 봐야 한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데이터라는 천연자원을 제공하는 ‘국민’은 국적을 갖고 그런 의미에서 자국 데이터를 자국 기업이 관리할 수 있는 사회적 생산 기반을 국가가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소버린 AI의 핵심 논리다.

이 지점에서 근대적 의미의 민족국가가 인공지능 산업의 논리와 결합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분명 의의는 있지만, 현재 공고한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를 뒤흔들 만한 잠재력을 가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적극적인 입장을 내비친 한국의 네이버를 보더라도, 이 주장의 한계는 너무도 뚜렷하다. 네이버는 한국의 기술 주권과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소버린 AI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피력한다.

각 세종 관제센터. 네이버 제공

각 세종 관제센터. 네이버 제공


네이버의 야심과 전략적 계산

네이버는 영어 기반으로 개발된 국외 AI 모델들은 한국어의 문법 구조, 존댓말, 맥락적 의미 등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어의 특수성을 고려한 AI 개발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정작 네이버의 주장에서 중요한 내용은 국내 사용자들의 데이터가 국외 기업에 종속되는 것을 막고, 중요한 데이터를 국내에서 보호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는 AI 기술을 미래 산업의 핵심 역량으로 간주하고 국가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다. 물론 네이버는 이런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초거대 AI 모델인 ‘하이퍼클로바’를 구축하고 다양한 기업들과 협력을 추진한다고 밝히면서 미국 빅테크 기업에 버금가는 한국의 빅테크 기업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야망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전략은 여전히 미국 일극 체제를 극복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는 점에서 크게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 파운데이션 모델은 단순하게 데이터와 기술이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대규모 머신러닝을 실행하려면 무엇보다도 전력이 필요하고, 또한 GPU의 수급이 원활해야 한다. 이렇게 전력을 생산하고 칩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체제는 국제 협력이 없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국제 협력은 말이 협력이지 미국 중심의 질서로 이뤄져 있다.

이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물적 토대가 무엇인가. 바로 미국의 군사력과 달러다. 그리고 많은 이가 간과하고 있지만, 헨리 패럴과 에이브러햄 뉴먼이 ‘언더그라운드 엠파이어’에서 밝혔듯이, 95% 이상을 미국이 소유한 해저 케이블이다. 이 케이블이 없다면 인터넷도 쓸 수 없다.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이런 물적 토대와 이에 조응하고 있는 글로벌 체제의 내적 논리를 더욱 강고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지금 우리 일상을 파고들어온 인공지능 산업이다.

이택광 문화비평가·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저자가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 사회가 비평적으로 봐야 할 인문사회적 쟁점을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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